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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끝에서 책의 향기를 맡다
코 끝이 아찔하게 시려오는 겨울이다. 이런 때 따뜻한 이불 속에서 조용히 책을 탐닉하기 제격이다. 이번 달 눈길을 끄는 책들이 유독 많았다.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와 따뜻한 위로,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과 그를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 등 무겁지 않으면서 무거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들을 볼 수 있었다. 추운 겨울, 찌뿌둥한 몸은 움직이기는 귀찮더라도 머리는 잔뜩 움직여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들 5권을 주목해보았다.
세상을 여행하는 방랑자를 위한 안내서 김현철 ㅣ 마호
“사랑, 환멸, 그리고 이전 안내서들을 위한 안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여행 안내서>가 떠오르는 제목이다. 마치 실제 여행안내서 같은 재미있는 디자인과 함께 환상적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한동안 ‘힐링’이라는 키워드가 출판계에서 인기를 얻었다면, 최근에는 ‘불안’이 주요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세상사람들이 많이 불안하다는 소리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할지, 지금 나의 감정은 왜 이러는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불안하고 두려운 사람들에게 단순하고 담담한 태도로 작가는 응원의 말을 전한다.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형체 없는 희망고문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괜찮아’하며 동정 아닌 시선으로 우리를 어루만져준다. 이 책이라면 여전히 세상을 방랑하는 내게 조금은 응원해줄 수 있지 않을까.
소리가 보이는 사람들 제이미 워드(지은이), 김성훈(옮긴이), 김채연(깜수) ㅣ 흐름출판
“뇌과학이 풀어낸 공감각의 비밀”
웹툰 <냄새를 보는 소녀>,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 한동안 ‘공감각’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일반적으로 음악에서 색깔을 보고, 글자에서 맛을 느끼는 등 하나의 감각에서 다른 감각까지 느껴지는 현상을 공감각이라고 한다. 하지만 공감각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아주 일부이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일반인들은 때때로 그들을 ‘장애’로 치부하기도 한다. 공감각을 경험하는 이들은 많다. 리처드 파인먼, 니콜라 테슬라, 반고흐 칸딘스키, 랭보 등 그들에게는 공감각이 예술성을 이끌어낸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공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다. 물론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만큼 명확한 감각은 아니었지만, 어떠한 글자에서 색감을 떠올리고, 후각에서 색감을 느끼기도 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책이다.
판타스틱 과학 책장 이한음, 조진호, 이정모, 이명현(지은이) ㅣ 북바이북
“과학책을 읽고, 쓰고, 번역하는 고수들의 choice”
무엇보다 출판사 서평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코스모스』를 냄비받침으로 사용하고 계신 분
·책장에 문학, 인문학 책만 있으신 분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 이후 과학책을 한 권도 안 읽은 분
마치 나를 겨냥하고 쓴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눈길을 끌었다. 나는 원래 고등학교 시절 이과생이었지만 수능을 치기 직전, 중도에 문과로 전과했다.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내게 너무 흥미로웠던 과학이 수험생 시절을 거치며 나를 옥죄어 오는 사슬처럼 느껴졌다. 과학을 느끼기도 전해 암기가 필요했고, 이해하기도 전에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이 책은 과학책을 읽고 싶지만,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 망설였던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다. 어쩌면 과학을 알고 싶지만 과학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 한동안 과학을 내려 놓았던 나지만 다시 한 번 과학책을 집어 드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정의를 부탁해 권석천 ㅣ 동아시아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
언제부터 우리는 정의를 부탁해야만 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정의’란 더이상 제 의미를 상실해버렸다. 한 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다. 인문학적인 사고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만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 자체가 상실된 시대였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권석천 기자는 25년 동안 기자로 일하며 주로 법조 분야를 맡았다. 검찰과 법원 사이에서 벌어지는 숱한 비상식적인 일들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정의’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25년차 베테랑 기자이기에 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아닐까싶다. 우리 사회가 정의를 부탁해야만 하는 이야기들.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야전과 영원 사사키 아타루 (지은이), 안천 (옮긴이) ㅣ 자음과 모음
“푸코, 라캉, 르장드르……”
제목만으로도 충분하다. 야전과 영원, 끝없는 밤의 전투다. 참 맘에 드는 제목이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할 것인가. 작가는 자크라캉에서 피에르 르장드르, 미셸푸코 그들의 개념을 비판하며 그 속에서 인간 주체의 구조를 더듬어나간다. 사실 세 철학자 각각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세 사람이 내세운 개념으로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짧은 서평에서부터 다가오는 묵직한 울림은 사사키 아타루라는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한권의 책의 책이 크게 나를 변화시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