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인 더 헤이그
하지환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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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인 더 헤이그

정재민 지음
황매 2009.11.20
펑점

독도 인더 헤이그 - 1905 년 한일 합방이 쳬결되고 나서 1907 년 만국박람회에 조선의 자격으로 고종의 밀사였던 이준 열사의 외침과 숭고한 그의 자결의 흔적인 남아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책은 소설이지만 가상의 시나리오들은 더욱 사실감을 더한다 아래 작가의 경력 또한 이채 롭다 현직 판사 이면서 문학을 지향란 그의 마지각 글은 새겨 볼만 하다. - " 법관의 일과 소설가의 일은 닮았더. 법관은 거짓 속에서 진실을 찾고 , 소설가는 거짓 (허구를 ) 통해서 진실을 말한다. " -어느 쪽이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이에 소설가는 현실을 살피고 , 법관은 문학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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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하지환 (河智還) 작가 자세히 보기 관심작가 등록

저자이미지 저자 하지환(정재민)은 하지환河智環은 지혜를 강처럼 흘려 널리 공유하자는 뜻으로, 새로운 생각과 가치로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을 지향하는 저자의 인생관이 담긴 필명筆名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에서 국제법 석사학위를, 경북대학교에서 국제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사법시험 합격 후 국방부 국제정책팀 법무관을 거쳐 판사로 6년째 근무하다 ‘독도 인 더 헤이그’를 읽은 외교통상부장관의 제의를 받고 2011년 8월부터 외교통상부에서 독도법률자문관으로 활동 중이다. 대학시절 뒤늦게 습작을 시작한 그는 장편소설로 <사법연수생의 짜장면 비비는 법(2004)>, <독도 인 더 헤이그(2009)>, <소설이사부(2010)>을 출간했다. <소설이사부>는 매일신문사의 제1회 포항국제동해문학상을 수상했다. 법관이 왜 소설을 쓰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법관의 일과 소설가의 일은 닮았다. 법관은 거짓 속에서 진실을 찾고, 소설가는 거짓(허구)을 통해서 진실을 말한다. 어느 쪽이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이에 소설가는 현실을 살피고, 법관은 문학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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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어느정도의 역사적 배경을 필요로 한다 현재 우리가 실효 지배 하고 있는 독도란 일본 그들이 애기하는 타케시마 이고 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샌프란시코 강화조약 제 5차 개정 에서부터 동해 지명중 독도 라는 부분이 빠진 채로 강화가 되었기에 이를 밀비로 약 17세기 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국 영토 임을 주장 한다.. 법리적은 소송을 준비하여 최근 뉴스 지상에서 오르내리는 국제 사법 제판소 ( ICJ ) 에 제소를 하기까지의 과정 양국이 소송중에 벌어지는 진실 게임 , 이를 증명 하기위한 가상의 보물 가에에서 발원된 " 가락국기" 라는 철판에 인쇄된 문헌의 마지막 증거 제출 등 , 긴박 하게 돌아가는 소송 줄거리이지만 이야기의 결론은 합의롤 전제로한 타협점으로 끌고 가는 정부 대표 손 팀장의 우유 부단함과 자기 책임 회피 방식이 끝내 눈에 거슬린다..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반박 하기 위해 주로 사용 하는 자료는 아래의 러스크 서한 이다.

러스크 서한

러스크 서한

러스크 서한(영어: Rusk documents)은 1951년 8월 10일 미국 극동 당담 국무 차관보 딘 러스크양유찬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에게 보낸 외교 서한이다.

러스크 서한은 미국 국무부의 다음과 같은 협상 자세를 보인다.

러스크 서한은 일본측에서 한국독도 영유권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는 의도로 흔히 인용되는 문서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러스크 서한이 연합국 대표 11개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에서 검토된 적도 없는 미국 단독의 의견이라고 보고 있다.[1]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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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샌프란 시스코 강화조약의 개요는 다음 과 같다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영어: Treaty of San Francisco, Treaty of Peace with Japan, San Francisco Peace Treaty, 일본어: 日本国 (にほんこく)との平和条約 (へいわじょうやく)→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공연예술 센터에서 맺어진 일본연합국 사이의 평화 조약이다.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 이라고도 불린다.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48개국이 참가하여 서명하여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제1장 평화

[편집] 제1항

  • (a) 일본과 연합국과의 전쟁 상태 종료
  • (b) 일본 국민과 일본 및 영해의 주권 회복

[편집] 제2장 영토

[편집] 제2항:영토 포기 또는 신탁 통치 이관

..... (생략)

[편집] 상세 설명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대일강화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과 연합국 48개국이 맺은 평화조약이다. 전문(前文), 제1장 평화상태의 회복(제1조), 제2장 영역(제2∼4조), 제3장 안전(제5∼6조), 제4장 정치 및 경제(제7∼13조), 제5장 청구권 및 재산(제14∼21조), 제6장 분쟁의 해결(제22조), 제7장 최종 조항(제23∼27조)으로 되어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제3장의 안전조항으로서,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체결을 위한 복선을 그어 놓은 것이다. 즉, 국제정치의 입장에서 일본을 반공진영에 편입시키는 성격을 띠었다. 이는 미국의 정치적 의도가 드러난 것으로, 미국이 이 회의를 주도하면서 상식선을 넘는 관대한 정책을 일본에 베풀었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한국은 일본의 전승국에 대한 전쟁배상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가하지 못함으로써 전시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향유할 수 없게 됐다.

한편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명문 규정이 없다는 이유를 독도에 대한 일본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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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강화조약 최종 체결된 내용으로 보자면 " 독도" 가 빠져 있다. 이를 근거로 지금 까지도 줄기차게 일본은 아베 총리 집단은 자신들의 고유 영토 라고 신사에도 가고 나름대로 논리를 펴서 국제 사법 제판소의 승소를 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이번 ICJ 제소가 처음은 아니어서 1954 년 ( 1차 최초 ) 1962년 ( 4 차레-2차 ~ 5차 ) 부터 2012 년 ( 6차) 에 걸쳐 꾸준히 도발?을 감행 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icj 의 기본 Activites 에 대한 개괄 설명 이다. ( 위키피디아 참조 )

Activities

Established in 1945 by the UN Charter, the Court began work in 1946 as the successor to the Permanent Court of International Justice. Th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similar to that of its predecessor, is the main constitutional document constituting and regulating the Court.[2]

The Court's workload covers a wide range of judicial activity. To date, the ICJ has dealt with relatively few cases. However, since the 1980s there has been a clear increase in willingness to use the Court, especially among developing countries. After the court ruled that the U.S.'s covert war against Nicaragua was in violation of international law (Nicaragua v. United States), the United States withdrew from compulsory jurisdiction in 1986. The United States accepts the court's jurisdiction only on a case-by-case basis.[3] Chapter XIV of the United Nations Charter authorizes the UN Security Council to enforce World Court rulings. However, such enforcement is subject to the veto power of the five permanent members of the Council, which the United States used in the Nicaragua case.

현제 ICJ 구성 맴버 들이다 . 이중에선 일본 국적인 " 히사시" 라는 멤버 가 있기에 소설속에서도 그들의 주변 영향력에대해서는 우려하는 표현 이 나온다

Current composition

As of 27 April 2012, the composition of the Court is as follows:[10]

Name Nationality Position Tenure Began Term Ending
Peter Tomka Slovakia Slovakia President (2012–2015) 2003 2021
Bernardo Sepúlveda Amor MexicoMexico


Vice-President (2012–2015) 2006 2015
Hisashi Owada Japan Japan Member 2003 2021
Ronny Abraham France France Member 2005 2018
Sir Kenneth Keith New Zealand New Zealand Member 2006 2015
Mohamed Bennouna Morocco Morocco Member 2006 2015
Leonid Skotnikov Russia Russia Member 2006 2015
Antônio Augusto Cançado Trindade Brazil Brazil Member 2009 2018
Abdulqawi Ahmed Yusuf Somalia Somalia Member 2009 2018
Sir Christopher Greenwood United Kingdom United Kingdom Member 2009 2018
Xue Hanqin China People's Republic of China Member 2010 2021
Joan E. Donoghue United States United States Member 2010 2015
Giorgio Gaja Italy Italy Member 2012 2021
Julia Sebutinde Uganda Uganda Member 2012 2021
Dalveer Bhandari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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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도 소개된 중요한 사법적 판단 요소중 하나는 ICJ " 결정적 시점 " 이 있다 양국간 분쟁이 본격화 되기 시작 하여서 그 이후의 논거들을 짜 마출 우려가 있는 기준 시점 이전으로 거슬러서 법리적 판단과 유추 해석을 제한 한다는 의미로서 일본에서 제기하는 제소의 결정적 시점을 1951년 9월 샌프란 강화 조약이 체결된 이후 시점이 1952년으로 못 박고 있다.. 이는 그들에게 유리한 협약 서문이나 자료를 이용하기 위함인데 , 만약 한국 쪽에서도 결정적 시점을 해당 년도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17세기 나 15세기 장보고가 활약 하였던 시기를 근거로 사료를 제출 할 수가 있다면 그것을 근거로 결적적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는 말이 되고 그이후 2차 세계 대전 전후 식민치 하 상황에서의 불합리한 조건및 자료들 을 배제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그래서 소설의 배경으로 나온 곳이 가야의 가락국기와 이의 시조가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된 사료및 자료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 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분쟁은 이제는 역사적인 히스토리를 어느 정도 이해한 상황에서만 우리것으로 지키고 본존 할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

촛불 시위만으로 헤이그의 icj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 일수도 없으려니와 우리가 그들 보다 이지스함이 많지도 않다.. 해병사단으로 독도를 에워 싸도 그들의 생각은 더욱 치밀함의 성을 쌓을 것이다...

끝으로 이준 열사에 대해 찾아 보았다... 나라 잃은 서러움을 뒤로 하고 고종의 밀명을 받은 그의 마음은 얼마나 벅차 올랐을까 ,

헤이그 밀사사건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신임장을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고종 양위 사건)

[편집] 사망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죽었다.

《헤트·화데란트》, 1907년 7월 15일자 기사

그러나 검시관의 죽음의 원인란은 비어있다.

장지연의 《위암문고(韋庵文稿)》에 나타난 것과 같이 이준의 할복 자결은 분명하다.[3] 당시 일본은 억압에 대한 조선민중의 동요를 막고자 터무니 없는 종기설을 날조, 유포하였다. 순종은 그에게 영의정이란 벼슬내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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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번에 헤이그엘 방문 하게 되면 그의 열사 기념관은 꼭 방문 하고 싶다... 언젠가는 .

나는 이런 말이 와 닿는다 항상 준비 하는 자나 나라는 없겠지만 준비하고자 마음 먹는 자는 나라는 언제 닥쳐올 위태로움에 그래도 슬기 롭게 대처 할 수 있을 것이다...

옆의 전혀 잰틀맨 하지 않는 나라와 앞으로도 살아갈 날이 더 많다면 오늘날 국경없는 매체 소셜 네트웍을 활용해서 집단지성을 발현시켜 그들의 잘못된 의도를 꺽을 수 잇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

1592 년 --> 1905 년 ---> 1945 년 ---> 2013 년 ... 400 년 , 40 년 이후 약 60년 분쟁의 피난사이자 그들과의 피곤함의 역사이다...

2013 / 5/1 - 그래도 상생하고 좋은 면을 바라보려고 하는 책력거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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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하고 공유하라
제프 자비스 지음, 위선주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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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공개하고 공유하라

제프 자비스 지음 | 위선주 옮김
청림출판 2013.04.19
펑점

공개 하고 공유 하라 -- 요즘 세상의 Hot 트랜드는 무엇일까 최근 유트브 를 통한 K-POP의 성공을 우리 두준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싸이의 후속곡인 잰틀맨은 이미 빌보드 차트 10위 권 이내이다... 약 10여년 전만 해도 아시아 뮤지션이 미국 음원 차트 100위권 안에 드는거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담장을 여지 없이 무너 뜨리고 있다..

우리들의 생활도 그러하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한장 펼쳐든 책이 원제 " Public Parts " 이다. 아래는 저자 소개가 흥미롭다. 뉴욕대 저널 리즘 교소로서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이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를 연구 하는 분이다...

저자의 블로그가 궁궁 해서 잠간 들어가 보았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최근 보스톤 마란톤 폭발에 대한 기고를 하였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러가 보면 원문으로 보실 수가 있다..

http://buzzmach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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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공개하고 공유하라>,<구글노믹스>… 총 3종 (모두보기)

소개 :

뉴욕대학교 저널리즘 교수로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이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에 관해 끊임없이 연구해온 학자이다. 동시에 저자는 미디어, 뉴스, 정보통신 기술, 비즈니스에 대한 정보와 문제를 제기하는 ‘버즈머신(buzzmachine.com)’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이 블로그를 통해 그는 인터넷의 공개, 공유, 공공화의 혜택이 무엇인지를 증명해왔다. 예컨대 델 컴퓨터의 고객서비스에 대한 문제를 블로그에 제기하여 기업의 서비스 개선을 이루어낸 것. 모두가 연결되고 공공의 선을 추구하고자 할 때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뉴욕대학교 저널리즘 교수로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이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에 관해 끊임없이 연구해온 학자이다. 동시에 저자는 미디어, 뉴스, 정보통신 기술, 비즈니스에 대한 정보와 문제를 제기하는 ‘버즈머신(buzzmachine.com)’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이 블로그를 통해 그는 인터넷의 공개, 공유, 공공화의 혜택이 무엇인지를 증명해왔다. 예컨대 델 컴퓨터의 고객서비스에 대한 문제를 블로그에 제기하여 기업의 서비스 개선을 이루어낸 것. 모두가 연결되고 공공의 선을 추구하고자 할 때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힘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그는 우리가 공유하는 물리적 공간, 공기, 우리가 누리는 권리만큼이나 인터넷의 미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권력이 이를 통제하고, 사유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인터넷은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공간’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효율적이고 선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비스 교수는 저널리즘 기업을 위한 토-나이트(Tow-Knight) 센터장이며,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창간인이자 편집자이다. 〈가디언〉과 〈뉴욕 타임스〉 등의 미디어 기업에서 컨설팅을 담당하였고, 2007년과 2008년에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에서 ‘글로벌 미디어 리더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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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주제를 요약 하면 인터냇이라는 메체를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유익한 공동선과 공공화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아직 까지도 현제 소셜 네트웍 서비스인 페이스북이나 링크드인 , 포스퀘어, 구글 GPS 나 , 최근 구글 안경 까지

오픈화 추세에 있지만 자신만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어 한다... 어러한 반응은 문화 사회, 기업 모든 분야에 걸쳐서 동시에 일어 나고 있는 현상 이기도 하다 ..

예전 방식이면 델 컴퓨터나 IBM 머신이 고장이 나면 서비스 센터로 전화를 걸거나 불만을 표시 한다.. 종종 그마져도 전화가 불통 되는 경우가 많아서 기다려야 했고 ,, 회사의 방침에 따른 보상 규정이 아니면 소비자가 부당함을 느끼 더라도 좋은 조건의 거래가 성사 되기는 어려 웠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나 만약 특정 항공사 서비스가 좋지 못거나 무례 하였다면 간단히 트위터에

140자 이내의 글을 내 팔로워 나 파워 팔로워를 통해 전파 시킬 수만 있다면 클래임 처리 끝이다.. 아마도 수시간 이네에

사과 트윗과 함께 ,, 향후 대처 방식에 대한 회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도미노 피자의 경우도 고객의 불만사항이나 회사 내부의 유효기간 처리를 하지 않는 식품의 문제까지도 소셜 네트웍에 공개 되어 곤경에 빠진 적이 있었다.... 적절한 신속한 대응 없이는 이젠 어떤 기업도 자유로이 자신들의 서비스 센타를 폐쇄하거나 없앨 수 있는 권한 조차도 없다... 대중으로 확산되는 오픈 인터넷 미디어 환경에서는 ....

정치적인 측면도 긍정적이다.. 중동의 봄 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 시민 오픈 혁명도 간단한 누군가의 트윗으로 시작 되었다..

각기 전파 속도는 틀리지만 이는 전장터에 나가있는 현장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정보를 습득하는 원리와 같아 .. 이를 재생산 해내는 매체가 CNN 이나 알자지라 방송등이 후속 보도록 하게된다.... 당시 이러한 정치적인 민감한 사항하에선 중국에서는 인터넷으로 중동 관련 검색이 이뤄지지 못하게 페쇄한 징후도 포착 되고 있다.. 북한의 경우도 말할 나위가 없겠다...

혹자는 좋은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최근 생겨 나기 시작한 오픈 경쟁은 자신의 신용 카드 내역 까지를 공개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왜 공개 하는가 ? 다른 노출 증의 변형된 모습이 아닌지 궁금 하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지인들이나 회사들은 간접 상품 선전을 할 수 있고 이밴트 제공이 가능 한 경로로 또 하나의 비지니스 모델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카드 결제를 하면 자동으로 결제 내역이 공개 하고픈 단계의 사람들에게 전파 ? 되는 위력이 있다.. 과일 공개의 측면이겠지만 선택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증가 하고 있다..

구글의 경우도 구글 + 를 신청 하게 되면 휴대폰에서 찍은 사진들이 동시에 Upload 되어서 선책적으로 공개나 공유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제는 바야 흐로 공유 경제의 시대 이고 새로운 공공화의 시대이다 지난 세기 프라이버시는 무척이나 중요한 단어이고 지금도 마찬 가지 이지만 이러한 역류 현상을 가장 프라이버시를 중시했던 서구에서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공화에 대해

하나의 문화 코드로 보아야 할지 또다른 변혁의 문턱이라고 보아야 할지는 몇년후 시대의 시점에서 평가가 되리라 판단된다..

15-6 세기 중세의 공공화는 활자 였다.. 그 누구도 활자화 되는 것에 대하여 반대를 하였고 특히 권력을 가진 계층은 더욱 그러 하였으나 변화는 이뤄 졌고 활자화된 권력과 문화가 상당 기간 세상을 지배하고 오늘날 까기 이어져 왓다.. 이제는 어쩌면 빛의 속도로 전파 되는 소셜 네트웍의 변화와 개인화로 더이상의 비밀 사각지대는 생겨 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이러한 조류는 거부할 수 없는 제 3의 물결 이상 일 수도 있도 우리는 지금 그 한가운데 고요히 있다...

더불어 인터냇 전파률과 스마트 폰 보급률이 세계적으로 순위에 들어가는 한국 또한 예외는 아닌 시대가 되고 있음을 느낀다..

카카오톡으로 오늘 만 해도 몇사람과 단문 커뮤니케이션을 햇는지를 보면 ,, 그리고 때 되면 이제는 엽서나 연하장 대신 카톡 문자로 생일 축하나 신년 인사를 대신 한다.... 에전 같으면 결례일 수도 있는 행위 이나 이것은 엄연한 대세 이다..

공개 하고 공유 하는 가운데 공공의 선과 정의가 넓게 펼쳐 졌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다... 소외 되는 사람이 없이 구석 구석

등불을 비출 수 있는 누군가에겐 힘든 시절을 버틸 수 있는 끈기와 희망의 등불 또한 이러한 공공화 정보 사회에서 이뤄 져야 하는 일들이 아닐까 고민 해 본다 ..

2013 / 5/1 오월 첫날 녹음을 바라보며 쓰다--- 책력거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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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볼드 Get Bold - IBM은 어떻게 소셜 비즈니스의 최강자가 되었나
샌디 카터 지음, 최선영 옮김 / 맛있는책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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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볼드,( Get bold ) ! ,, 제목 처럼 대담 해져라라는 이책은 IBM 부사장을 지낸 샌디카터의 소셜 비지니스를 기업에 어떻게 접목 시킬지에 대한 화두이다.. IBM 하면 검퓨터의 대명사이자 퍼스널 컴퓨터의 표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80년대를 거쳐 90년대 까지 ..

이후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많은 부분 다른 기업체로 흡수 되거나 노트북 경우 레노버로 합병 되기도 했다..

이 책은 전통적 기업들의 생존 활로에 대한 이야기 이다.. 전통적인 마케팅 , 세일즈 기법도 있고 , 콜센터및 기타 고객 서비스 방식도 여러가지 있겠지만 무엇 보다도 최근 트랜드는 소셜 SNS 네트웍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더이상 우리 이웃은 지리적인 이웃이 아니고 고객은 한 지역에 머물러 있는 고객이 아니고 전 지구적으로 그리고 전 시간대에 콜센터의 24 시간 응대 이상으로 대응을 신속 정확 하게 받기를 원하는 시대 이다.

오늘날 시장은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이책에서 애기하는 주제는 기술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기업의 목표와 문화 , 신뢰 모델 , 그리고 지배 구조를 토대로 시작 하는 방식에 대한 책이다..

1장은 소셜 비지니스의 특성에 대하여

2장과 ~ 7장 사이는 소셜 비지니스의 어젠다를 달성 하기 위한 단계를 각기 보여 준디... 그중에도 포커스 해야 하는 주제를 모아보 면 목차와 같다..

CHAPTER2 조직의 목표와 문화를 정비하라
Align Organizational Goals and Culture
CHAPTER3 소셜의 신뢰를 얻어라
Gain Social Trust
CHAPTER4 경험을 통해 관계를 맺어라
Engage Through Experience
CHAPTER5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네트워크로 만들어라
(Social) Network Your Business Processes
CHAPTER6 평판과 위기관리를 위해 디자인하라
Design for Reputation and Risk Management
CHAPTER7 데이터를 분석하라
Analyze Your Data
CHAPTER8 경쟁력을 위한 요소로서의 기술
Technology as a Competitive Ingredient
CHAPTER9 자신만의 어젠다를 만들어라
Draw Up Your AGE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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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에서는 여러가지 사례 연구를 통해 왜 소셜 전략이 필요한지에 대해 역설 하고 있다.. 챕터 2 에대한 사례로서는 캐나다에 본사를 둔 글로벌 전자 제품업체인 셀레스티가를 통하여 전세계 약 30여곳의 혁신 사레를 공유 하고 서로 배우고 개선점을 찾아 나가는 방법에 사내 소셜 내트웍인 Connection 을 출범시켜 전체 직원들의 내부 협력을 도왔다... 자발 적인 참여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이외에도 " 소제티" 라는 15 개 국가 에서 연간 직원 수 약 2만 명에 해당 하는 IT 서비스 업체의 아이디어 교환과 직원들 사이의 유대 관계를 증진 , 촉진 하기 위해 " innovation Jam " 이라는 대규모 브레인 스토밍 공유 장치를 도입 하였다..

이를 통해 더욱 원할하고 활발한 내부 의견 교환과 협력 동기가 부여 되었고 이는 촉매제로 작용하여 새로운 창의적 콘텐츠 개발에 일조 하기도 한다...

챕터 2장의 주제는 기업은 친구가 있는가 이다.. 이런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요즘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페이스북이나 트윗 , 기타 소셜 도구들을 통해 얼마나 기업들이 고객과 잠재고객과 소통을 하고 있는지 유심히 관찰을 해볼 필요가 있다.. 기업의 새로운 소셜시대에 맞는 전략은 고객들과 시간을 보내는 장소와 동기를 이해 함으로서 고객의 신뢰를 이글어내고 좋은 평판을 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Web 상에서도 관계와 신뢰는 중요 해졌다 ...ComScore 라는 사이트는 온라인 소비자 행동 연구 를 위해 인터넷상 데이타를 추적 분석 하는 마케팅 시장 조사기관에 의하면 사람들 81 % 가 구매전 온라인으로 구매평을 확인 해보고 , 사용자 56 % 정도가 온라인을 통해 브랜드를 알게 된다고 한다.. 또한 58% 정도의 사람들이 사용자 제작 온라인 정보를 토대로 구매 결정을 내린 다는 사실과 89 % 정도의 사람들은 구매 하지 않더라도 온라인 구매평에 관심을 보인 다는 것이다.. 이전의 BTO B 시장에서 b TO C 시장으로 전이 단계에서는 기업과 소비자간의 긴밀한 신뢰관계가 생명이다..이를 위해 오늘날의 많은 수의 기업들이 소셜 네트웍 마케팅과 연결되는 모든 방법을 찾고 활용 하고자 하는 것이다..

2013 년을 벌서 2/4 분기에 접어든 이 시점 전세계 인터넷 사용자 수는 약 20 억명 정도이다.. 또한 이에 따라 소셜 비지니스 는 커뮤니케이션의 주된 수단이 되고 있고 , 훌룡하게 구축된 커뮤니티는 일반 다수의 군중들과는 차별화 된다.. 간략이 요약 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리더쉽 VS. 평등성

- 최고의 커뮤니티에슨 리더쉽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강력한 커뮤니티 관리자가 있다.

2. 목표와 자존심

- 커뮤니티는 목표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는다.. 또한 회원은 같은 목표를 공유 하여 활성화 된다.

3. 적극적인 참여 vs. 산발적인 참여

- 지속적인 관심사의 유뮤 이다.. 한가지 주제나 동일 선상의 컨텐츠에 대한 주제는 심화 될 수 있다.. 누군가 캠핑에 관련된 커뮤니티를 생각해보면 그속에는 온통 캠핑에 관련된 주제들만 즐겁게 있을뿐이다..

4. 소속감 vs . 이득

자신이 속해 있는 커뮤니티의 책임감이나 자율적인 동기부여가 작용한다.. 어떤 사사로운 이득을 바라기 보다 진정 도움을 주고 받는 멘토와 멘티 역할 분담도 가능 하다.

5. 협력 VS . 접속

- 위키디피아 같은 집단 지성을 필요로 하는 왭 백과사전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울 듯 하다.. 또한 나의 경우도 종종 시청을 하는 TED 의 경우도 발제는 보통 영어로 하지만 각 나라별로 자원 봉사를 자청 하여 자국의 언어로 번역에 참여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다... 이들이 무엇을 바라고 참여 하는 것일까 ? 여기에는 분명 저면에 흐르는 공통체 일에 대한 보람이 이고 내면의 목소리를 울려 퍼지게 만든다..... 집단 지성의 힘은 위대 하다...

제 4장 -관계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의 근간은 서로가 서로의 경험을 공유 한다라는 말과 일맥 상통 하다...

- 어느 기업이든 구성원은 직원 이고 매출을 올려 주는 사람은 고객 이다. 그들의 공통 관심사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 engagement ) 가 필요한 이유 이다.. 이를 위해 이 책에서는 " 소셜 직원" 이란 표현을 사용 하는데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1, 보스가 아닌 , 코치와 멘토를 찾는다.

2. 일정한 가이드 라인안에서 문제점을 해결할 권한을 갖는다.

3. 이슈나 문제 해결에 필요한 작업 그룹을 구성 할 수 있는 자률성

4. 통합 적인 의사결정 문화

5. 개방적이고 , 투명한 경영진을 요구 .

이를 통한 성공 사례로는 IBM 의경우 " 씽크 퓨텨" 라는 크라우드 소싱을 통하여 약 4일간 전세계를 걸처 온라인으로 리더쉽의 미래와 인재 개발에 대해 브레인 스토밍 하고 전략을 짜는 이벤트이다.. 그 다음 4일간은 " jam" 이라는 온라인 토론 포럼을 진행 한다.. 참가자 약 2천명 이상이고 게시물로만 약 3500 여개가 넘는다... 내부 전문가들이 항목별로 분석을 하고 , 도출된 주요 문제들을 토대로 결과물을 내놓는다. 이를 토대로 IBM 에서 다음 10년 동안 펼쳐질 단계적인 전략과 실행 프로세스를 밟는다. 등 ...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 " 소셜 고객" 이라는 용어를 쓴다.. 보다 적극적이고 다른 고객과 잠재 고객에 영향르 미치 기도하고

기업가에게 올바른 피드백을 주기도 하는 진정 합리적인 집단 지성의 본보기를 유도하기도 한다.. 우리들 주변 부는 어쩌면 이미

소셜 고객이기도 하고 그 이상 " 참여 " 하여 특정 제품의 디자인이나 구성을 바꾸기기도 한다..

더군다나 앞으로의 참여 추세는 전통적인 방식의 일방 커뮤니케이션 아니라 양방향이고 그 힘과 속도도 상당히 빨라 졌다..

이런 관계를 다시 요약 하면 3가지 I 가 된다..

- 상호 작용 하라 ( Interect ) -모바일 , 게임 ,선물 , 위치 기반 서비스 , 크라우드 소싱

- 통함 하라 ( Integrate ) - 온라인 , 오프라인

- 파악 하라 ( Identify ) - 콘텐츠 , 감정 , 개인화 등 .

사례 ] 크릭 워치 ( Creek Watch ) - 애플의 앱스토어에서 공짜로 다운 로드 받고 앱을 통해 지구를 구하는 일에 동참 하는 것이다 .자 ,,이제 부터 주변 개천 부터 관찰 하면 된다... 개천 이나 하천 근처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간단한 정보를 올린다..

- 수위 ( 가움 , 약간높은 , 고수위 등 )

- 유속 ( 고요 , 느림 , 빠름 )

- 오물 ( 없음 , 약간 , 많음 ) ,,,,

크라우드 소싱된 데이타들은 특정 위원회에선 이를 기반으로 조치를 취하고 자발적인 시민들의 도움으로 정부나 수자원 시스템관리를 돕는 수준가지도 참여가 가능 하다...

이외에도 위치기반 서비스를 이용한 참여와 상호 작용을 하여 가장 서비스가 좋은 식당과 맛이 좋은 스타 벅스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호텔의 취향 까지도 비교 분석 , 추출 해 낼 수가 있는것이다..

그외 5장 부터 8장 사이는 기업들의 입장에서 필요 불가결 하게 대응 하여야 하는 소셜 비지니스 전략에 관한 이야기 들이다. 이제는 소셜 기반을 배제하고서는 동네 구멍 가게를 하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특히 개인화 도구와 모바일의 급속한 성장은

공공의 장소에서도 개인화를 촉진 시켯고 이는 개인화이자 동시에 공통 커뮤니티의 집중을 초래 한다...기업들의 입장에서

소셜 비지니스를 구축 하거나 실행 , 소셜 직원을 ? 키우고 , 소셜 고객을 충성도 높은 고객으로 만들어서 거구로 기업의 맨토 역할을 부여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터넷 시대에 맞는 비지니스 프로세스 관리과 콘텐츠, 소셜 인프라의 구축과 사용에 대한 크라우드 소싱 방법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고려 하여야 할 일이다..

특히나 예전 중세나 근대와 다르게 " 정보" 라는 매체와 공개및 가지고 있는 " 권한 " 이라는 측면 에서 보았을때 많은 부분들이 대중의 양방향 커뮤니티에 거의 모든 부분이 노출 되어 잇다고 볼수 있고 , 기업의 평판은 이러한 소셜 / 모바일 대중의 시각에서 벗어 나기 어렵다 .

마지막 장인 9장은 의미가 새롭다.. 소셜 기업 , 소셜 크라우딩 , 기업등은 변화에 따른 현재의 벽을 깨는 이야기 이다.. 전통적인 방식에서 혁신 이라는 말을 사용 하였다면 , 이제는 디지탈 네이티브 시대인 신인류? 가 보고자 하는 방향으로 기업들의 방향타도 움직여야 할 일이다.. 대응이 늦으면 늦을 수록 도태 되는 시간이 빠를 태이니 말이다...

언제 ,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굳이 특정 장소에 모여서 회의를 하지 않아도 의사결정에 불편함이 없는 쿠탱 베르그 남작이 틀으면 소스라칠 일들이 소셜 공개화되어 있고 지금도 가속화 되어 가고 있다..

소셜 비지니스가 가속화 되면 가장 먼저 변화가 생기는 부분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이책의 말미에 IBM의 신속한 의사결정과

글로벌 조직에서의 탄력성을 애기 했지만 한국에서도 이러한 부분의 가속화로 얻을 수 있는 부분은 기존의 수직적 의사 결정 구조가 무너지고 수평적 의사 결정 구조가 발생 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는 받아 들이기어렵고 모든일에 있어서 사장? 의 결정이 필요한 국/내외 기업의 현실상 제한부분이 있으리라 보지만 ,,, 불과 10여년전 더 정확히 말하면 약 15년전 1995 년도 즈음 인터냇이 막 태동 하던 시기에 누가 감히 온라인으로 은행 계좌를 송금 하고 ? ( 상당히 불안한 일이지 않았을까 ,,직원들의 결재나 도장 , 싸인 이런 절차도 없이 ip 선을 신뢰 해서 내돈을 옴긴 다는 것에 대새서 - 지금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 들이지만 )

그 당시 유수의 회사 CEO 들은 절대 그러한 온라인 뱅킹 시대는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생각 하였다.... 또한 더욱 거슬러 올라가 15 세기 중엽 에는 활자화된 책을 펴내는 공공성의 일도 금기시 된 적도 있더,,, 활자화된 성경 내용등 ,,, 개몽적 지식 전파등 ..

다시 본론 으로 돌아 가지만 ,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 하면서 집단 지성을 믿고 활자화된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은 유물로 사라졌다...위키 디피아는 아직도 발전 중이지만 ... 그렇다면 CEO 의사 결정 없이 집단 함의에 의한 올바른 목표를 가진 개별 자률 조직에서 회사의 방향을 가늠 하고 개발해 나가는 일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즉 목표치만 정확히 나와 준다면 중간

단게 단계의 모든 의사 결정들이 CEO나 기타 바쁜 중역들이 결정 해서 의사 진행 자체를 장해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되겠다....

수평적 분업및 사고의 유연화는 또다른 OPEN 커뮤니티 상호 작용의 중간 결과물이 아닐까 조심스레 진단을 해본다...

2013 / 4/ 30 -- 사월 의 끝자락 봄 기운을 느끼며 쓰다.....책력거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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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볼드 Get Bold - IBM은 어떻게 소셜 비즈니스의 최강자가 되었나
샌디 카터 지음, 최선영 옮김 / 맛있는책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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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비지니스는 이젠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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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의 리더, 대통령 링컨 - 국민과 언론, 민주적 제도를 신앙처럼 존경한
리처드 카워딘 지음, 세계와동북아평화포럼 옮김, 장성민 감수 / 북스타(Bookstar)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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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의 리더 대통령 링컨 ( 1809 .2 ~ 1865.4.15 ) , 16 대 미국 대통령 , 남북 전쟁 당시 대통령직 수행 , 노예제 폐지등 , 일반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그의 일대기 요약 이지만 이책에서는 아래 리처드 카워딘 이라는 옥스퍼드대 역사학부 학자에 의해 그 당시 미국의 정치 , 종교, 문화 , 사회 다방면에 걸치 연구를 통해 그의 리더쉽에 또다른 면모를 찾아 볼 수 있다..

좀더 사회 문화적인 배경등을 살펴 보고하 한다면 그 의다른 저서 , 복음주의 라던가 , 신교도 , 자본 그리고 시장 ( 1970 ~ 1860 ) 등을 읽어 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래는 저자 소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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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리처드 카워딘(Richard Carwardine)

옥스퍼드대학교 역사학부 교수, 영국 학술원 회원인 리처드 카워딘은 이 책의 발간으로 링컨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예인 ‘링컨상’을 수상한 최초의 영국인 학자이다. 그는 미국 초기 공화제와 남북전쟁 기간 중 미국의 정치, 종교, 사회 분야를 중점 연구하고 있으며, 19세기 미국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복음주의 신교의 역할과 링컨 대통령의 리더십에 관한 연구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저서>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저서로는 <남북전쟁 전 미국의 복음주의와 정치>, <남북전쟁과 링컨의 대통령 직 수행에 관한 탐구와 재인식>, <영국과 미국의 대중 복음주의, 1795~1865>, <교회의 일치와 분열>, <신교도, 자본 그리고 시장, 1790~186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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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가장 궁금증을 읽으키는 부분은 한나라의 연방제위에서 어떤 경위로 연방제 폐지논란이 있었고 무슨 일들이 각지역주에 일어나서 남과 북이 대치를 해야만 했을까 라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았다... 이책에서는 좀더 자세한 사회 경제적 부분은 언급이 덜 되어 있지만 사료나 자료를 찾아 보기 위해 web 을 추가로 차아 아래와 같은 노예제 논쟁에 대한 배경과 문화적인 차이 그리고 경제적인 남과 북의 시각 차이에 대한 부분을 이해 할 수가 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면화를 주로 생산 하는 남주에는 많은 수의 노동력이 필요 하다는 것이었고 이미 영국이나 유럽의 산업혁명의 여파를 받은 북부 지역의 경우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 되었기에 기능직공이 많이 필요한것이지 단순 흑인 노예가 많이 필요한 사항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역사적 진실은 인권에 기인한 노예제 해방일 수도 있겠지만 북부 공화당의 지지를 받은 정당 주체의 입장에서는 북부 공업 지역의 정치 / 경제적인 파워를 인정 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미국이 월스트리트의 영향력아래 연방 준비위원회의 달러 제조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대한 군산 경제 복합체의 표면위에 정치는 진행 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국가들이 전부 미국의 잠재적 위험 국가이다 ( 이란을 비롯해서 ... )

그리고 당시 남/ 북부의 문화 .정치 / 경제적인 차이를 이해 하려면 우선 좀더 거술러 올라가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 부터 전개되어온 공업의 발달의 개요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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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산업 혁명의 시초는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몇 개의 혁신과 연결되어 있다.

  • 증기력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개선된 증기 기관은 즉시 광산을 퍼내는 데 이용되었지만 1780년대부터는 동력기로 대체되었다. 이 기술은 수력발전이 존재하지 않았던 작은 규모의 과거 상황으로부터 능률적인 반자동화 공장의 빠른 발전을 가능케 했다.

핵심적인 혁신인 이 세 가지 발견은 산업 혁명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가져 왔다. 다른 발명들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물의 발견은 큰 변화를 일으켰다. 초기의 발명이 없었다면, 직물 산업의 다축 방적기플라잉 셔틀과 코크스를 이용한 선철의 제련과 같은 성과를 내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후에 발명된 역직기리처드 트레비식고압기관 역시 영국의 산업화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증기 기관을 수력발전으로 가동되던 면직 공장과 제철소에 도입함으로써 편리함을 더욱 증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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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 년도의 증기기관의 발명, 이에 따른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수방적이 , 이어서 다축 방적기 , 그리고 면화를 주원료로 하는 면방적기 까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공장화가 진척 되고 있었고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신대륙을 찾아 이주하여 정착한 곳 또한 아메리카 대륙이엇다...

위에서도 언급한 세가지 큰 축 ( 직물 , 증기력 , 제철) 은 미국에서의 도입이후 혁신적인 공업도시로의 변모를 꾀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남북 전쟁 당시 ( 1861 ) 까지도 수맣은 노동력에 의존하는 남부의 경제 상황과 직물기나 기관을 장착한 기계화 영농법을 막 시작한 , 그리고 공장이 돌아 가기 시작한 북부의 경제상황 과는 상반되는 것이 맣았고 이해의 대립도 치열 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남부군은 아마도 미국내의 세력과 더불어 아래 자료에 보듯이 남부의 주요 수출품인 면화의 주 수입영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으로 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아마도 북부 공화당쪽으로 더 기울어진 것은 당시 1860 ~ 1862 년사이 유럽의 곡물 수확 실패는 결정적으로 미국 북부에서 대량 으로 생산되는 옥수수 및 밀등 자동화된 대규모의 곡물이 유럽 ( 영국/ 프랑스 ) 입장에서는 남부의 면화보 다 더 절실히 필요한 상황 이었던 것이다... ( 면화는 영국의 지배령인 인도 동인도 회사를 통한 조달이 가능 하였다.. ) 또한 일시적인 면화 부족은 옷이나 의복의 입는 문제이나 곡물의 부족은 식량의 문제이고 기근이 일어나면 아무리 유능한 통치자라 해도 반란이나 정치적인 위협이 생기는 것을 막기에는 문제일 것이다.. 하여 자연스럽게 북부군에게 중립적인 제스춰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정치 / 경제적 상황도 링컨에겐 어쩌면 유리 하게 돌아 가는 국면 이었던 것이다.. ( 아래 자료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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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와 북부 비교

남부군의 가장 큰 희망은 영국프랑스가 북부군에 대항하여 전쟁에 무력 간섭 하는 것이었다. 링컨과 국무장관 윌리엄 H. 세워드가 주도하던 북부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만약 공식적으로 남부 연방 정부의 존재를 승인하는 국가가 있었다면 전쟁으로 위협했다(아무도 인정하진 않았다). 1861년에, 남부 사람들은 유럽에서 경제 침체가 시작되어 영국이 면화를 얻기 위해 남북 전쟁에 참여 하기를 바랐고, 따라서 자발적으로 남부의 면화 통상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면화 외교는 유럽 대륙이 잉여 면직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반면에 1860년에서 1862년까지의 유럽의 곡물 수확 실패는 북쪽 곡물의 수출을 긴급히 중요하게 만들었다. “옥수수 왕(King Corn)의 힘이 면화 왕(King Cotton)의 힘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이 때문에 미국 곡물은 영국의 무역 수입량의 1/4를 차지했었던 것이 이 시기에 절반을 차지 할 정도까지 늘어났다 . 영국이 일시적으로 면화 부족에 허덕일 때, 이집트인도에서의 증가된 면화 경작으로 부족함을 대체했다. 동시에, 전쟁은 무기 제조상과 제철 직공, 무기를 실어 나르는 영국 선박의 고용 증진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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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 년 4월 15일 부스의 흉탄에 숨지기 전까지도 많은 고뇌에 쌓여 있던 링컨은 분명 뛰어난 협상가이자 어느 한족을 편들어 정치를 그르치는 일없이 인사의 주요 적절한 인선을 잘 활용 한것으로 자료는 파악 한다.. 특히 남부 성향이 강하였던 맥 클레렌 장군을 최고 사령관 위치 까지 기용 하면서도 중립적인 힘의 강약 조절을 하고 상대당의 결집 까지도 모아 가면서 최대 이슈인

연방 분리 독입에 대한 햬결책을 종교적인 딛음으로 까지 승화 시켜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러 낸 점은 강력한 그의 카리스마와도 일치 한다....

링컨은 어쩌면 혁신적 혁명 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는지도 모른 다 그러나 노예 정책에 대한 대립에서 촉발된 전쟁의 진행 중엔 아래와 같이 노예 해방령에 담긴 그의 생각이 피력 된듯이 보인다..

링컨은 나중에 노예제도가 어쩌다보니 전쟁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링컨은 예비적인 노예 해방령을 1862년 9월 22일에 발표했고 최종적인 해방령을 1863년 1월 1일에 발표했다. 링컨은 하지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신념에 대해 말했다.

노예정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이러한 판단과 의견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이 전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고백하건데 그동안 내가 결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를 지배했었던 거 같다.

끝으로 링컨은 이제 영원히 기억될 민주제 시행령의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아이러니 하게도 14대 15대 대총령은 전부 남부 노에제 옹호론자의 출신 대통령이다.. 이러한 그의 변화된 신념의 촉발로 새시대 새로운 정치 세력 그리고 일반시민들의 참정권의 태동이 시작 된 것이 아니었을까 역사적 관점으로 시사하는 부분이 많다고 본다...

아래는 전쟁의 결과 요략 이다.. ( 자료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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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1865년 봄, 남부군이 항복하면서 미국의 노예 제도는 사실상 끝이 났다.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군 소속 지역의 노예들을 해방시킬 것을 선포했고, 이로 인해 남부의 모든 노예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멕시코 접경지대와 남부 지역의 북부군 관할 구역 노예들은 주정부 시행안(state action)1865년 12월 6일 비준된 수정 헌법 제13조로 하여금 해방되었다. 약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1861년부터 1865년 사이에 해방되었다.

북부의 완전한 복구 작업은 재건 시대라고 알려진, 전후 상당히 혼란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103만 명의 사상자(당시 인구의 3%)가 발생했고, 사상자 중 62만 명은 군인이었으며 그 가운데 2/3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남북 전쟁은 미국이 지금껏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의 사망자 수와 맞먹는 수많은 미국인들의 죽음을 초래했다. 전쟁을 유발한 원인과 그 타당성 여부는 물론이고, 남북 전쟁이라는 그 명칭 자체도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소재이다. 1860년대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3~43세 백인 남자 전체의 8%가 전쟁으로 인해 사망했고, 이 수치는 북부 인구의 6%, 남부의 18%나 된다. 약 56,000명의 군인이 남북 전쟁 중 감옥에서 죽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이렇게 많은 이유 중 하나로 돌격 등과 같은 나폴레옹 식 전술의 사용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정밀한 강선의 개발과 미니에 탄환, 그리고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북군에 의해 사용된 ‘스펜서 연발총’이나 시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개틀링 기관총’에 의해, 개활지에 포진해 있던 수많은 병사들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한 전략으로 쓰인 전쟁 참호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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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노예제 논쟁 촉발 등 ..

연방 분리의 원인

[편집] 노예제 논쟁

미국의 노예폐지 운동은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 1775년 첫 반-노예제 모임이 필라델피아에서 만들어졌고,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는 처음으로 《노예해방법》을 1780년에 통과시켰다. 이 후 4개의 다른 북부 주들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으며, 1787년 북서부 영토(지금의 오하이오 주 및 그 주변)에서도 〈북서부 조례〉를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이로 인해 노예제를 폐지한 북부와 노예제를 여전히 으로 인정하는 남부의 두 지역으로 나뉘게 되었다. 물론 북부에서 노예제에 반대한 이유는 북부 사람들이 인도주의자들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공업이 발전한 북부에서는 값싼 흑인 노동자가 더이상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편집] 남부의 자유주 확대에 대한 우려

노예 소유를 허용하는 남부와 금지하는 북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링컨은 당시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들에서 노예제를 철폐하는 법안을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1858년 "분열된 집에 대한 연설"에서 "노예제의 확산을 막고, 국민의 마음 속에 노예제의 궁극적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심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1850년대의 정치적 갈등은 새로 생긴 준주로 노예제를 확대할 지 여부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뤘다. 정부가 수립된 모든 준주(organized territories)는 자유주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남부는 연방에서 분리되고자 노력했다. 북부와 남부 모두 노예제가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 범위가 축소되거나 결국 폐지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세력에 연방 정부의 통제권이 넘어갈 것에 대한 남부의 우려와 노예제 지지자들이 정부에 휘두르는 영향에 대한 북부의 혐오는 결국 1850년 말의 위기 상황을 일으켰다. 노예제의 도덕성, 민주주의의 범위, 자유 노동과 노예제 간의 경제적 이득에 대한 논쟁들은 휘그 당과 "모릅니다 당"(Know-Nothing)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고, 새로운 정당(1848년자유지역당, 1854년공화당, 1860년의 헌법 연합)들이 생겨나게 만들었다. 1860년에 최후로 남은 전국 정당은 민주당이었지만, 민주당 역시 분파들로 나뉘게 되었다.

노예폐지주의자 윌리암 로이드 게리슨이나 중도 공화당 지도자 링컨 등의 북부 정치인들은 토머스 제퍼슨의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선언문 구문을 강조했다. 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이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1845년 미주리 타협선의 연장은 텍사스 병합 결의문의 일부였고, 1850년 타협1860년의 크리튼덴 타협에서는 이 선을 태평양까지 연장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1787년 헌법제정의회에서 있었던 헌법 35조와 아프리카 노예 수입을 20년간 연장하는 데 대한 논쟁을 비롯해 이 시기 거의 모든 지역간 분쟁에는 노예제가 관련돼 있었다. 1793년 엘리 휘트니가 발명한 조면기(cotton gin)로 인해 하루에 가공될 수 있는 솜의 양은 50배로 늘어났고, 이런 생산 방식의 변화로 인해 남부에서는 노예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노예주인 미주리 주를 연방에 편입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 끝에 1820년 미주리 타협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원의 함구율(gag rule)은 1835년부터 1844년 간 노예제를 폐지하는데 대한 청원을 하원에서 논의하는 것을 금지했고, "명백한 운명"론은 노예제를 확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영토를 연방에 포함시키는데 대한 근거가 되었다. 1845년텍사스를 다른 영토와 함께 노예주로 합병한 것은 멕시코 전쟁(1846-1848)을 촉발시켰고, 새 영토에서의 노예제 시행에 대한 갈등은 1850년 타협으로 잠시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1850년 타협의 윌모트 조항은 북부 정치가들이 멕시코로 부터 정복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노력에 따른 것이었다. 헤리엇 비처 스토가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이 인기를 끌면서 북부에서는 1850년 타협의 결과물인 도망노예법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오스텐드 성명(Ostend manifesto, 1854)을 통해 남부는 쿠바를 노예주로 합병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에서는 미주리 협상이 노예제를 금지한 지역에 대한 노예제 폐지 여부를 국민주권에 따라 투표로 결정하도록 했고, 이 법이 통과된 뒤 제2기 정당 구조는 무너졌다. 또, ‘피의 캔자스’ 논란 중 캔자스 주에서의 노예제를 둘러싸고 미주리 주의 노예제 지지자들인 보더 러피안(Border Ruffians)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부정 선거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부정 선거는 친-남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피어스(미국 14대 대통령)와 제임스 뷰캐넌(미국 15대 대통령)이 캔자스를 노예주로 인정하려는 시도를 하게 했다. 뷰케넌은 노예제 시행에 대한 구문을 포함한 캔자스 주 헌법안인 르컴프턴 헌법을 지지했다.

캔자스에서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와카루사 전쟁, 로렌스 약탈 사건, 공화당 상원의원 찰스 섬너에 대한 하원 의원 프레스톤 브룩스의 상원 의회 구타 사건, 파타와토미 대학살(Pottawatomie Massacre), 블랙 잭 전투, 오사와토미 전투(Battle of Osawatomie) 그리고 마래 데 시뉴 대학살(Marais des Cygnes massacre) 등의 폭력적 형태로 나타났다. 그 후 1857년 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은 캔자스를 포함하여 다수가 노예제를 반대하는 지역에서조차 노예제를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노예 반란을 시도했다 실패한 노예폐지주의자 존 브라운1859년 12월 2일 사형대로 끌려가는 모습을 노예 모자가 바라보고 있다

1858년의 링컨-더글라스 논쟁 중 북부 민주당의 지도자였던 스티븐 더글라스는 드레드 스콧 판결이나 국민주권의 개념에 구애받지 않고도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다는 "프리포트 주의"를 주장해 더글라스가 르컴프턴 헌법을 입안하는 데 실패한 것과 더불어 민주당을 남부와 북부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 노예폐지주의자인 존 브라운1859년에 하퍼 페리 무기고를 습격해 노예 반란을 시도하기도 했다. 1860년에 남부 민주당은 새로 합병되는 준주에 노예제를 법으로 인정하자고 요구함으로써 남부와 북부로 나뉘는 지역 간 갈등 구조를 완성시켰다.

통합의 리더 대통령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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