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때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 스페인 10개의 도시, 10개의 사랑 이야기 ㅣ 따빠스 시리즈 1
이진희 외 지음 / SALIDA(살리다) / 2025년 11월
평점 :

이 포스팅은 살리다(SALIDA)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스페인 여행서를 떠올리면 대개 화려한 성당 사진, 지도, 추천 코스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에세이집 『그때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 익숙한 구성을 정면으로 비껴간다. 이 책은 “어디를 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언제, 어떤 순간에 한 도시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가”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감정의 지도에 가까운 책이다.
스페인 전문 서점 ‘스페인책방’이 선보인 출판 레이블 ‘살리다(SALIDA)’의 ‘따빠스 시리즈’ 1권인 이 책은 스페인 10개 도시를 10명의 필자가 나누어 쓴 짧은 에세이 모음이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세비야, 발렌시아, 말라가, 똘레도, 그라나다, 꼬르도바, 빌바오, 산세바스티안까지.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도시들이지만, 이 책은 관광 안내서 대신 그 도시와 관계를 맺어버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특징은 시선의 높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대부분 그 도시에서 일정 기간 이상 머물렀거나, 아예 삶의 터전을 옮긴 사람들이다. 그래서 글의 출발점은 “성가족 성당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가 아니라, “처음 월셋집 계약서를 들고 떨리는 손으로 서명을 하던 날”, “지하철 노선을 아직 다 외우지 못해 번번이 잘못 내리던 첫 몇 주” 같은 장면들이다.
도시를 바라보는 카메라 역시 관광객의 와이드샷이 아니라 생활자의 근접 촬영에 가깝다. 바르셀로나의 유명 건축물 대신 동네 빵집의 아침 풍경이 먼저 등장하고, 말라가의 해변은 ‘인생 샷’의 배경이 아니라 퇴근 후 동네 주민들이 바다에 발을 담그는 일상의 무대로 묘사된다.
스페인에 가본 적 없는 독자에게도 이 지점은 중요한 지점을 건드린다. 실제로 그 거리를 걷지 않았더라도, “낯선 도시에서 첫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 “언어가 서툴러도 단골 가게가 하나 생겼을 때의 안도감” 같은 감정의 결을 통해 도시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스페인은 특정 좌표를 찍어야 하는 여행지가 아니라, 언젠가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감정의 장소로 다가온다.


두 번째 특징은 편집 장치다. 책 속 10편의 글에는 모두 한 번씩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바로 제목이기도 한 “그때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라는 고백이다. 이 문장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책은 독자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독서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게임이 된다. 독자는 필자의 서사를 따라가며 “아, 이 장면이겠구나” 싶은 지점을 마음속에 체크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문장을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 이미 자신의 안에서도 비슷한 감정의 잔상이 일어난 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사랑의 임계점’이 결코 거창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결심의 순간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아주 사소한 일상의 단면이다. 예를 들어, 길을 잘못 들어 낯선 동네에 내려버린 날, 버스 기사와 동네 주민이 함께 길을 알려주던 장면에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혹은, 일과를 마친 뒤 늘 스쳐 지나가던 광장에 처음으로 앉아 해 질 녘 하늘을 올려다본 저녁에, “조금 더 이 도시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불현듯 찾아오기도 한다.
스페인에 가보지 못한 독자라면, 이런 고백을 따라가며 오히려 자신의 도시를 떠올리게 된다. 서울의 어느 골목, 대학 시절 지하철역 앞 노점, 출장으로 처음 가본 지방 도시 등, 각자의 삶 속 어느 지점에 “그때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라는 문장을 붙일 수 있을지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만든다. 이 책이 스페인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은 ‘당신의 도시’를 환기시키는 방식이다.
세 번째 특징은 형식에서 드러난다. ‘따빠스 시리즈’라는 이름처럼, 이 책은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판형에 사진 한 장 없이 온전히 글로만 구성돼 있다. 한 도시당 한 편,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문장의 밀도는 가볍지 않다.
이는 스페인에 아직 가보지 못한 독자에게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 정보와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 책은 출발부터 “정보를 쌓기 위한 책”이 아니라 “감정을 예열하는 책”임을 선언한다. 항공권, 숙소, 교통편 같은 실용 정보는 과감히 비워두고, 대신 언젠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떠올리게 될 기분과 분위기를 미리 마음속에 심어 둔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한 도시씩 읽어도 좋고, 잠들기 전 침대에서 스페인을 한 접시씩 맛보듯 넘겨도 좋다. 독자는 아직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도시의 골목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걷다가,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아직 비행기를 타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나라가 조금 좋아져 버렸구나”라고.


『그때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는 ‘스페인 여행 입문서’라기보다 ‘스페인 감정 입문서’에 가깝다. 특히 스페인에 가본 적 없는 독자에게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추천한다.
첫째, 과잉 정보에 지치지 않고 스페인을 ‘먼저 좋아하게’ 해주는 책이다. 목적지와 동선을 정하기 전에, “저런 도시라면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감정부터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여행은 결국 감정이 끌리는 곳으로 향할 때 가장 오래 남는다.
둘째, 지금 당장 먼 나라로 떠날 수 없는 이들에게 ‘종이 위의 여행’을 제공한다. 경제적 이유든, 시간과 건강의 문제든, 유럽행을 미루고 있는 이들에게 이 얇은 책 한 권은 스페인의 공기와 빛을 간접적으로나마 호흡하게 해주는 작은 통로가 된다.
셋째, 이 책이 다루는 감정은 스페인을 넘어선다. 타지 생활을 해본 사람, 새로운 도시에서 첫 집을 구해 본 사람, 혹은 그냥 낯선 동네를 천천히 걸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명할 수 있는 정서다. 배경은 스페인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도시와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은 묻는다.
“당신에게도, 그런 도시가 있습니까?”라고.
스페인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어도 좋다.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어떤 도시와 사랑에 빠져 있거나, 곧 빠지게 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는 그 사실을 잔잔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상기시켜 주는 책이다.
* 출처 : 박기자의 끌리는 이야기,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