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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정선임 외 지음 / 해냄 / 2025년 3월
평점 :

이 포스팅은 해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좀 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삶에 여유가 있다면 해외로 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다. 여행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몸을 맡기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과 책임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행의 경험은 자신을 재정의하고 내면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학창 시절에 반 아이들의 시와 수필 등을 묶어 학기말에 '문집'을 만들었던 적이 있는데 시, 소설, 수필 등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서 펴내는 '앤솔로지(anthology)'와 닮아 있다.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도 단편소설 네 편을 하나로 묶은 앤솔로지라고 할 수 있는데 정선임, 김봄, 김의경, 최정나 네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펼쳐지는 네 편의 이야기들 속에는 낯설고 어색했던 순간들, 언어가 닿지 않는 순간에도 존재했던 감정의 교류가 담겨 있다. 특히 ‘나와 이방’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낯선 곳에서 마주한 ‘타인의 얼굴’과 ‘경계의 의미’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정선임 작가의 <해저로월>은 포르투갈 리스본이 배경이다. 낯선 도시에서의 경험과 새로운 시선, 익숙함이 무너지는 감각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서양을 품은 리스본에서, 주인공은 거센 바람과 미끄러운 마룻바닥 위에서 낯선 도시와 마주한다. 누군가의 빈방에서 머물며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을 오가며 자신의 정체성과 기억을 더듬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의 단절감과 미묘한 교감을 그렸다.
p.19
스페인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아빠는 짐을 싸고 있던 내게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돌아올 거지?"
고모가 죽었다던 어딘가의 외국이란 곳이 포르투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에야 그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너는'이라는 말이 생략됐을 것이다.
김봄 작가의 <우리에게 적당한 말이 없어>는 인도 벵갈루루가 배경이다. 빛과 색, 냄새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 마주한 환각 같은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한때 아메리칸드림을 꿈꾸었던 주인공이 인도의 벵갈루루를 다시 찾게 되면서, 과거의 이상과 현재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마주하게 된다. 빛과 소리, 냄새가 폭발하듯 넘치는 도시 속에서 낯설고 혼란스러운 감각을 통해 삶의 본질을 되짚고 있다.
p.71
제로 하우스에 모인 작가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온 앨리스, 벵골 시인 알리, 카슈미르 저널리스트 모하마디, 그리고 한국에서 온 나까지 모두 넷이었다. 영국인 베이커와 프랑스인 시몽 부부는 제로 하우스의 매니저였다. 부부는 프랑스 남부에서 살고 있는데, 제로 하우스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열릴 때마다 인도에 와서 각국에서 날아온 작가들과 한 달여를 보내다 돌아간다고 했다.


김의경 작가의 <망고스틴 호스텔>은 태국 방콕이 배경이다. 술과 춤, 뜨거운 열기 속에서 피어난 만남과 감정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학생 시절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가 갑작스레 방콕에서 사망하고, 주인공은 그의 흔적을 따라 방콕을 찾는다. 도시의 무질서한 활기, 불쾌할 정도로 가까운 열기 속에서 친구와 나눈 마지막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한다.
p.136
태국의 길거리 음식은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다영은 여행 가이드북에 나온 가게와 시장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병승은 그런 다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병승에게 주어진 일은 연애할 때 그랬듯이 쇼핑하는 다양의 곁에서 대신 선택해 주는 쇼핑 보조 역할뿐이었다. 다영은 이제 쇼핑을 그만하자는 병승을 졸라서 창고를 개조해 만든 야시장 아시아티크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다영은 첫눈에 마음에 든 라탄 슬리퍼와 라탄 가방을 샀다.
최정나 작가의 <낙영>은 사이판 배경이다. 과거의 비극과 현재의 삶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내면 탐색에 나섰다. 10년 전 실종된 낙원을 찾아 사이판을 찾은 주인공은, 아름답지만 어딘가 허전한 풍경과 마주한다. 과거의 기억과 상실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며, 자아의 실체와 상처, 치유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p.210
"뭘 하는 거야?" 해원이 물었다.
"책갈피를 만들어."
"왜?"
"상처란 이런 거지."
"뭔 일 있어?" 평소와 다른 낙영의 태도에 해원이 물었다.
"사랑이란 이런 거고, 기억이란 이런 거지." 낙영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왜 그래?"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힘"이라고 말했다. 낯선 환경에서 우리는 오직 현재에 집중하게 되며, 이는 정신적인 평온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는 포르투갈, 인도, 태국, 사이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네 곳 모두 내겐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느끼는 불편함, 오해, 호기심, 그리고 연대의 순간들을 각각의 소설들은 정교하게 포착해 낸다.
각기 다른 스타일의 작가들이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추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자기 내면을 새롭게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낯선 곳에서 익숙한 ‘나’를 되찾고 싶었던 이들이나, 반대로 ‘나’를 벗어나고 싶었던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 출처 : 박기자의 끌리는 이야기,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