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못한 1월이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님'이었던 관성은 남아 여전히 뭔가를 한다는 건 더디고 무디다.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고, 주절거림도 없이 보낸 1월.

오랜만에 책 주문을 했다. 오래 비우지 않은 장바구니엔 꾸역꾸역 담긴 책들이 그득했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르자 변심한 애인처럼 삭제되는 책들도 생겼다.

탄핵은 아직도 오리무중이고 잘한다고 응원하는 일들이 잦았지만 결과는 모호하다.

이 와중에 조기대선의 열풍이 불고 요즘 말로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진 것 같다.

나름 호감을 가지고 있거나 관심을 가졌던 이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이 귀를 의심케 한다.

 

문득 오랜 시간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고 있던 참한 사람이 마을 사람들의 돈을 몽땅 챙겨들고 도망갔다는 허망한 기사를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기준은 있어야 할거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할 수 있는 사람.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을 갖고 있는 사람. 사드에 단호한 사람. 식량자급에 대한 플랜이 있는 사람. 이건 농촌의 문제와도 연결될거다. 재벌과의 유착고리를 변명없이 자를 사람. 삼권분립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 다 떠나서 '정치 철학'이란게 있는 사람.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거나 정규직화 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 민주적인 사람. ...

끝도 없이 조건들이 늘어난다. 그만큼 빼앗겼던 것들에 대한 성찰이 생긴것이리라. 촛불의 힘은 아마 거기에 있는것도 같다.

각성. 정치권력이라는 말이 소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실천적 경험같은 것.

 

 

 

 

 

 

 

 

 

 

 

 

 

 

 

 

 

 

 

 

 

 

 

 

 

 

 

 

 

 

 

 

 

 

 

 

 

 

 

 

그리고 뭔가를 해야한다는 조급증을 다스려 줄 몇 권의 책을 더 ..

 

 

 

 

 

 

 

 

 

 

 

 

 

 

 

 

 

아무 것도 아닌 시간을 건너 '아무 것'이 되는 것은 조금 힘들지도 모를일이다. 하지만..아무 것이 '어떤 것'이 되는 건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트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과정일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2월..

입춘이 지났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고 당연하게 말하지만, 그 봄이 반드시 싹이 나고 움이 트는 봄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래 해가 뜨지 않는 봄. 폭염을 준비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쳐버리는 봄일지도 모를일이다.

어쩌면, 올 해 우리가 맞이할 봄은 조금 더 춥고, 조금 더 절룩이며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관적인가?

아무것도 아닌 겨울이 너무 길었던 탓이라고 변명해보자.

 

그래도 봄이 온다는 것이 뭐라도 되고 싶은 봄이 온다는 것이 다행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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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06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순실과 박근혜 때문에 정신 못 차렸는데, 대선 기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더 머리가 복잡해지고 어지러울 것입니다. 그래도 귀찮다고 미래가 달린 투표 권리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힘들어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나타샤 2017-02-06 16:37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
 
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박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사고의 틀이 경직된 것일까.

요즘 들어 읽는 것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읽힌다. 껌 하나를 나누는 일조차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대화하고 조정하는 정치행위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변호사라고 하면 기자라고 하면 어느 한 때 선호하는 직업이었다. 소위 사짜 사윗감 세 손가락에 꼽힐 부류였으며 박식함과 정의로움의 상징이었던 부류였다.

엘리트라고 불리워지는 이들의 철옹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니며 거짓말장이이거나 앵무새로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어갔다. 어째서일까?

사실을 보도해야 할 기자들은 권력의 입이 되어갔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가난한 피고를 변호하는 이는 사라져갔다. 가난한 이를 위한 변론을 열정적으로 펼치는 정의의(?) 변호사는 소설 속에서 읽혔고, 온갖 위협 속에서도 정론을 써내는 기자들은 미디어 밖에서 서성이게 되었다.

정의는 있는자들, 강한 자들의 것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억울함은 '없는 게 죄지' 라는 자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가장 바른 잣대는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때가 탄 채로 불쏘시개로도 쓰지 못할만큼 외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스토리펀딩으로 만나게 된 '파산 변호사'의 이야기는 그래서 놀라웠다.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딸 '김신혜' 한사코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도 결국 무기수가 된 딸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화가 치밀었다. 어째서..법은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 보통의 주부가 읽어내기에도 허술하기만 한 조서와 수사의 과정은 화를 삭이기 어려웠다. 말도 안되게 짜맞추고 조작된 증거와 조서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진행하는 자들과 그 구조에 화가 난 것이다. 협박과 회유와 강압으로 만들어낸 죄인. 무고한 사람이 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것이라는 걸, 짓지 않은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 저지르는 경찰, 검찰의 뻔뻔한 작태. 그 속에 속수무책으로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던 순한 사람들.

사실, 조작과 강압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해방 이후 줄곧 이어져온 사상범들이 그랬고, 반북 이데올로기의 프레임 속에 무고하게 잡혀들어가 옥고를 치른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살아보겠다는, 살려달라는 외침조차 불법이라 했고, 좌익 용공, 외부세력, 반국가행위따위의 낙인을 찍기 일쑤였지 않은가. 얼마 전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돌아가신 백남기농민의 사망사건만 보아도 자신의 잘못보다는 피해자를 깎아내리려하고 가족을 몰아세우며 파렴치한 일을 서슴치 않았던 것을 오롯이 기억한다.

단 한번도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법기관이라 부른다.

'법과 원칙에 따라' 라고 주문처럼 이야기하는 그들의 법과 국민의 법은 사뭇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곳에서. 기껏 조작하고 범인을 특정하고 끝나버린 일을 다시 파헤치며 억울함을 풀어내려 애쓰는 사람. 그런 사람이 생겨나는 게 가능한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무죄주장을 믿고 사건을 다시 파헤치고 누명을 벗겨내는 일.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일. 속된 말로 돈이 되지 않는 일을 기꺼이 수행하는 변호사.

나는 이 사람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았다.


치밀하게 짜여진 조작의 구조가 믿어지지 않았고 그 구조에 맞선 작고 돌맹이 두어개가 전부인 다윗같은 사람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정의는 살아있다'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일게다.


책은 세가지의 재심사건을 이야기한다.삼례 나라 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약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사건.

언뜻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느 날 뉴스에 보도가 되었고 '세상에..'라는 탄식을 쏟아낸 기억이 있는 사건들이었다. 사건은 그 후 자극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간헐적으로 들렸고,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이 그랬다. 소년이 그랬다. 딸이 그랬다. 라는 짧은 결말과 함께 사라졌다.

뉴스를 보며 '그래도 범인이 잡혀서 다행이네'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들은 범인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범인은 커녕, 진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진범이 자신이 저지를 일이라고 저들이 아니라고 눈물을 흘리며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사람들은 억울한 죗값을 치러야했다는 것이다.


비협조와 압박 속에서도 그 어렵다는 재심을 끌어내고 기어이 무죄를 증명해내는 일은 더이상 정의를 지연시킬 수 없다는 신념이라고 멋지게 말하는 것도 좋지만 글을 읽는 내내 나는 연민과 '사람'에의 존중을 읽는다. 장애가 있건, 약자이건, 스스로 무죄를 증명할만큼의 힘이 있건 없건 간에 '무고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어떤 사람도 불의하게 구속당하고 억류될 수 없다는 사람에 대한 존중. 그것이었다고 읽었다.

미드에서 나오는 쿨하고 샤프한 변호사가 아니라 피의자들과 똑같이 빈 손이며 그 태생조차 남루한 변호사.

그 변호사와 기자가 서류를 뒤지고 펀딩으로 힘을 모으며 하나씩 풀어가는 무죄투쟁. 말그대로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기 같이 읽힌다.

너무나 순해서 눈물이 나다 어째서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는지 화도 나다..나였어도 이들처럼 주눅든 채 조작의 제물이 될 수 밖에 없었겠다 싶어지기도 했다.


결국은 관심으로 지원으로 일궈낸 일일지도 몰랐다. 파묻어두려는 거짓을 들춰내고 공론화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모아 그것에 의지하며 풀어낸 정의

이 사건들의 무고함을 믿고 지원해 준 사람들의 힘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정의를 간절히 바라는 때. 그것만큼은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들을 이 무모한 싸움에 밀어넣고 있는지도..


국조특위를 보며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틀어쥔 것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탐욕에 눈 먼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러다보니 조작과 거짓으로 만들어낸 무고는 일도 아니었겠다 싶어졌다.

다 드러난 거짓조차 아니라고 우겨대는 사람들.

그 파렴치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구조.


정의는 특정한 이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가 아니라 모두가 일궈내고 지켜내야 할 당위겠다 싶어진다.

더는 약하고 없어서 사회의 틀에서 내몰린 자라서 감내해야할 고난 쯤으로 불의를 인정해서는 안되겠다.


이들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기로 한다.

숱한 폄훼의 말들이 이어질것이고, 정의가 두려운 자들의 공작이 시작될 것이다.

정의는 늘 그렇게 누더기의 몰골로 시선 밖으로 내몰리곤 했으니까..

정의가 희미해지는 곳에서 '사람'은 얼마나 존중될 수 있으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반문해본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표지에 쓰인 문구를 다시 읽는다. 반복해 읽는다.

정의의 지연을 좌시하지 않는 것. 거기서부터 출발해야겠다.

법이 지배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의 정의가 관통하는 법을 세워야 한다.

법은 지배수단이 아닌 자유와 정의의 수호수단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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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7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 문제나 현상을 정치적으로 보이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치가 대화 주제로 환영을 받지 못해요. 오히려 정치를 주제를 대화를 한다 해도 생각이 앞뒤로 막힌 사람들과 만나면 더 피곤해집니다. ^^;;
 
#혐오_주의 알마 해시태그 1
박권일 외 지음 / 알마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혐오의 담론은 최근 확장되고 있다. 소위 메갈리안이라 이야기되는 이들의 출현은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되었고 불편함과 저돌성이 뒤섞이며 혼란스러웠다.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의미로 단단해지고 그 가운데 '혐오'라는 개념이 분명해졌다.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들, 극혐, 혐오식품, 혹은 혐한, ..주변에 혐오로 표현되는 것들은 널리고 널렸다. 단시 싫어하는 것, 기꺼워하지 않는 것, 인정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을 혐오라고 규정했던 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였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혐오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사회철학의 문제이며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의 갈등과도 연결되어진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런 것들을 정치수단으로 활용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런 분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혐오는 총체적 불안과 불만의 결집체였다.


작은 책은 몇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져있다.

혐오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박권일

순수함에의 의지와 정치혐오-김학준

지금 가장 정치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이다 -허윤

대중문화에서 여성혐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위근우

혐오표현을 법으로 처벌할 수 있을까? -이준일.


혐오가 담론으로 구성되어지는데는 페미니즘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 더이상 틀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그 틀 속에서 요구되는 불합리한 차별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 기폭제가 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혐오범죄라 일컬어지는 사건들의 피해자는 여성들이었고 강요되어진 불합리를 견딘다 할지라도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기 시작하는 순간,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존의 요구가 촉발되었을지도 모른다.

혐오의 대상은 주로 소수자이며 사회적 약자로 대변된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인, 그리고 생존투쟁을 벌이는 사람들. 생존투쟁이라 일컬어지는 가운데는 노동의 문제도 있고, 세월호의 문제도 있고, 가습기피해자의 문제도 있으며 농민도 있다.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은 생존투쟁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것이다.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체제의 문제이고 구조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 열정과 패기를 강요하는 사회. 과잉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사회. 누구나 가르치려 드는 사회. 그 속에서 모순은 풀어지는게 아니라 타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그들과 다름을 주장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담보하려 든다. 갈등을 풀어내는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는 건 민주주의의 중요한 덕목이자 동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 아닌 대상화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혐오'의 틀에 가두고 조롱하거나 가치없음으로 낙인찍는 행위들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이어폰 줄이 엉켜있을 때 엉킨 구조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숨죽여 풀어내는 노력 대신 마구잡이로 잡아다니다 결국 끊어버리고 쓰레기통에 버린 후, 그 이어폰의 단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어폰을 만든 회사를 비판한다. 그따위로 엉켜버리는 상품을 만들어 팔다니 파렴치하다고..

책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드러나는 혐오를 이야기한다.

모든 국민이 눈과 귀를 열고 듣고 보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촛불을 높이 든 촛불집회에 참가하며 잠깐씩 생각했던 것들. 평화와 질서. 우리는 어째서 평화와 질서에 집착(?)하는것인지. 결벽에 가깝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자 애를 쓰는 것인지 가끔, 속된 말로 속에서 천불이 나기도 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 두번째 꼭지는 많은 공감을 하게 했다. 정치혐오. 그리고 순수함에의 의지.

필자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은 " 갈등, 경쟁, 리더십, 조직"이며, "문제는 대중권력의 한계를 감안하면서도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정치체계를 조직하는 방법"이다 (p70)"라고..

갈등과 경쟁에 취약한 우리들은, 참는 것과 견디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은, 그간의 패배의 경험들에 위축된 우리들은 갈등을 회피하려 한 것은 아니겠는가.

갈등을 순수하지 않음으로 규정하고 갈등의 현상을 타자화하고 혐오의 씨앗을 품게 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이것은 분리불안의 역설이지는 않을까? 생각하게도 된다.

공동체에 귀속되어 분리되고 싶지 않은 지향과 순수성 훼손에 대한 두려움의 공존은 분리됨의 불안과 분리되지 않음의 공포를 같이 겪어내는 혼란의 상황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혐오'는 거대담론이 되었다. 단순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구조 안에서 사회체계 안에서 들끓고 있는 갈등의 변양태인 것이다.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레나타 살레츨은 그녀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 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중에서)"

우리의 혐오는 강요된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닐까?

"넌 어느 편인데?" 라는 물음. "성공하는 삶"에 대한 환상.

공동의 삶에 대한 사유가 '혐오'를 해결할 방도가 되기는 할까?


담론이 확장되는 과정을 보며, 자꾸 묻게 된다. 그렇다면? 이 혐오의 담론은 어떻게 수렴되어야 하는가. 진단은 시작되었고 치유는 쉽지 않겠지만, 다름의 인정이 아닌 '혐오'의 해결은 인간성의 회복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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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메로네 - 테일 오브 테일스
잠바티스타 바실레 지음, 정진영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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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명의 여인이 한 사람당 하루에 하나씩 이야기를 한다. 닷새동안..그러니까 50편의 이야기다.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닮았고 익숙하다. 조금 더 정제되고 극적으로 추려져 읽게 되었던 신데렐라, 라푼젤, 장화신은 고양이같은 글의 원형이 여기 있다.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커다란 틀 속에 하나씩 놓인 이야기들이다.

 

여인들의 이야기.

고교시절 우리 반엔 아주 독특한 친구가 있었다. 모든 드라마를 꿰뚫고 있던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어제의 드라마를 재현하곤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수십명의 캐릭터들의 특징을 제대로 집어내는 재주가 있었던 친구. 쉬는 시간은 언제나 순식간에 지나가곤 했다. 수업시간이 되어서도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야기는 얼마나 생생했는지 모른다. 쉬는 시간 종이 치기 오분전부터 시계를 흘깃거리고 친구와 눈짓을 하고 웃음을 빼물고 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친구의 표정과 목소리 몸짓으로 듣고 본 드라마는 세상 재밌는 것이었고 집에 돌아와 티비로 드라마를 보지만 친구의 재연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이야기꾼의 힘. 그런게 있다는 걸 그때 느꼈다.  펜타메로네를 읽으며 이야기꾼의 힘을 느낀다. 대부분이 정의가 승리하고 고생끝에 낙이 있고 악은 응징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랑을 이뤄내는 평이한 이야기지만 평이하지 않다.

 

그날 밤. 다음 날. 조차도 단순한 표현은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

"태양이 빛의 상점을 닫고 어둠에게 빛을 팔기를 거부하는 시간(비둘기 중에서)' 이랄지

"태양이 햇빛을 미끼로 밤의 그림자를 낚아올리는 매일아침(갈리우소 중에서)" 랄지 단 하나도 평범하게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꾼의 사설조는 흥미진진하고 몰입도를 고조시킨다. 은유와 비유로 범벅이 된 이야기가 모호하거나 난해하지 않고 경쾌하고 발랄하다. 잔혹한 장면조차 미간을 찡그리게는 하지만 꼼꼼히 읽게 만든다.

때론 귀여움에 미소를 짓게도 한다. 결코 귀여운 대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요리를 하던 시녀가 용의 심장을 불에 올려놓자 곧 냄비에서 김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시녀가 임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던 가구들까지 임신한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커다란 캐노피 침대는 작은 침대를, 커다란 귀중품 상자는 작은 상자를, 커다란 의자는 작은 의자를, 커다란 탁자는 작은 탁자를, 그리고 요강은 너무 예뻐서 먹고 싶을만큼 앙증맞은 요강을 낳았습니다. (마법의 사슴 중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기 전에는 절대로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책. 그녀들은 실력있는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이야기들. 짧은 이야기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새끼 뱀처럼 유려하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여도 새롭다. 반갑다.

 

옆에 두고 아무데나 펼쳐 읽을 차례다.

다 읽고 나서, 다 아는 이야긴데, 또?

이 이야기꾼이 범상치 않다. 꿈을 꾸듯 장면이 그려지고 손짓발짓 하며 재연할 이야기꾼이 그려진다.

 

<태양이 굽은 허리를 높이 치켜든 늙은 산자락을 더듬고 내려간 시간부터 책을 펴들었다. 개미의 재채기 소리가 이럴까? 참새의 딸꾹질이 이럴까? 금붕어의 고함이 이럴까? 벼룩이 쥐고 있는 작은 보물지도를 탐하는 것이 죄가 되진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작고 작은 벼룩이 숨긴 보물따위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냐고 생각했다. 쌀눈만큼이나 될까? 깨소금만큼은 될까? 어젯밤 뒤척이다 귀에서 굴러떨어진 귀지만큼이나 될까?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한 낮의 눈꼽만큼은 될까? 그런 정도의 보물이라면 세상에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인데 그것을 탐했다고 죄가 될까?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촘촘하게 늘어선 글자들이 모닥불가에 모인 날개미들처럼 날아들기 시작했다. 콧 속으로 파고들어간 녀석 때문에 오그레스(책속의 괴물여자)의 입냄새가 느껴졌지 뭐야. 입 속으로 파고든 녀석 때문에 암곰으로 변한 공주 입 속의 나뭇조각의 맛이 느껴지지 뭐야. 눈 속으로 파고든 녀석들 때문에 정교한 가면처럼 표정을 짓는 이야기꾼의 모습이 그려지지 뭐야. 다음 날 태양이 커튼처럼 드리운 안개를 간지럽히다 완전히 걷어버릴 때까지 정신을 놓고 읽었다. 눈꺼풀이 핫케이크 위의 메이플시럽처럼 흘러내려도 모른 채 읽었다. 까무룩 잠이들어 꿈 속에서조차 열명의 여자와 함께 오래 전부터 들어온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은, 읽히지 않는다. 온전히 들리고 느껴지는 책이다. -소심한 패러디를 해보고 부끄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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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완 2016-12-16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히

cyrus 2016-12-17 09: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는데 기대되는 책입니다. 고전동화를 좋아해요. ^^

나타샤 2016-12-17 10:05   좋아요 2 | URL
제법 분량이 되는데 흠뻑 빠져 읽게 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양이라디오 2017-01-14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글은 본인이 쓰신 글이죠? 대단하십니다. 나타샤님도 이야기꾼의 기질이 있으신거 아닙니까ㅎ?

나타샤 2017-01-14 22:15   좋아요 0 | URL
에구..과찬이십니다. 책의 여운이 남았던것이 문제였나봅니다. ^^
 

 『#혐오_주의









#해시태그 

알마 해시태그 시리즈는 사회를 잇고 모으는 

연결고리입니다. 소셜 키워드를 통해 사회 현상을 읽고 지금 바로 여기, 그리고 미래를 탐구합니다. 

그 첫 번째 키워드는 ‘혐오’입니다.




혐오는 왜 나쁜가?

지금 가장 정치적인 것은 여기에 있다.

 

혐오는 왜 나쁜가? 이것을 생각해 나가다보면 혐오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혐오는 ‘증상(symptom)’이다. 증상을 관찰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선 곤란하다. 우리는 혐오를 사회악으로 지목할 게 아니라 혐오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찾아내야 한다. _박권일,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 중에서 


 

 ‘김치녀’ ‘맘충’이란 단어가 유행하자, 곧 이에 대적할 만한 혐오표현인 ‘개저씨’와 ‘한남충’이 등장했다. 그간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을 ‘미러링’하여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겠다는 ‘메갈리아’라는 인터넷사이트를 두고 남성들은 ‘남성혐오’라고 분노했다. ‘헬조선’이라고 자조하며 사회 자체를 혐오하는 청년들을 향해 장년층은 젊어서 그런 고생도 견디지 못하냐며 혀를 찬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광화문 광장에 매일같이 모여 나라를 망친 장본인들을 향해 촛불을 들고서 정치를 혐오한다.



 

◆ 소개글


‘김치녀’ ‘맘충’이란 단어가 유행하자, 곧 이에 대적할 만한 혐오표현인 ‘개저씨’와 ‘한남충’이 등장했다. 그간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을 ‘미러링’하여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겠다는 ‘메갈리아’라는 인터넷사이트를 두고 남성들은 ‘남성혐오’라고 분노했다. ‘헬조선’이라고 자조하며 사회 자체를 혐오하는 청년들을 향해 장년층은 젊어서 그런 고생도 견디지 못하냐며 혀를 찬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광화문 광장에 매일같이 모여 나라를 망친 장본인들을 향해 촛불을 들고서 정치를 혐오한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혐오’란 감정이 난무한다. 사실 굳이 혐오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는 감정까지 ‘혐오’라는 단어를 빌릴 정도다. 그러나 단순히 이 국가를 ‘혐오사회’라고 단정 짓고 끝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제는 현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혐오의 ‘결’을 들여다보고, 그 ‘혐오’의 감정과 마주할 때다. 알마 해시태그 시리즈의 첫 시작인 《#혐오_주의》는 사회학자 박권일의 혐오의 메커니즘을 찾아보는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를 시작으로,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정치혐오를 ‘촛불집회’라는 코드로 해석해보는 김학준의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 그리고 여성혐오와 메갈리아의 언어를 살펴보는 여성학자 허윤의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와 대중문화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여성혐오를 꼬집는 대중문화기자 위근우의 〈#대중문화에서_여성혐오는_어떻게_작동하는가〉, 마지막으로 이러한 혐오표현을 법적으로 제재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법학자 이준일의 〈#혐오표현을_법으로_처벌할_수_있을까?〉등으로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코드 중 하나인 ‘혐오’의 다양한 결을 파헤쳐본다.   

    


 

#박권일

사회비평가. 학부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문화학을 공부했다. 2000년대 초반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2007년 《88만 원 세대》를 썼다. 참여정부 후반기 국정홍보처에서 일하며 《참여정부 경제 5년》 집필에 참여했다. 《시사IN》 《한겨레21》 〈한겨레〉 등에 수년째 칼럼을 연재했거나 연재하고 있다. 2012년 칼럼집 《소수의견》을 출간했다. 공저서로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등이 있다.

 

#김학준

중학교 때부터 유니텔 활동을 시작으로 평생을 인터넷 죽돌이로 자라며웃음과 혐오의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14년 일베저장소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주)아르스프락시아의 미디어분석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LG트윈스의 열렬한 팬이다.

 

#허윤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0년대 한국소설의 남성 젠더 수행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30년대 여성 장편소설의 모성담론 연구〉 〈1970년대 여성교양의 발현과 전화〉 등의 논문을 썼다. 공저서로 《젠더와 번역》 《페미니즘의 개념들》 등과 역서로 《일탈》 등이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1950∼70년대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남성성과 정동을 살펴본다는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위근우

2007년 엔터테인먼트 웹매거진 〈매거진 t〉의 TV평론가 공모전 당선을 시작으로 TV 비평을 하기 시작, 이듬해 〈매거진t〉 의 입사 제안을 냉큼 받아들여 해당 매체와 그 후신인 〈텐아시아〉에서 대중문화 기자로 일하게 된다. 네이버스포츠 고정 칼럼과 네이버캐스트 웹툰 작가 인터뷰 등 재밌어 보이고 돈 주는 곳에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글을 써왔으며 현재는 웹매거진 〈아이즈〉에서 취재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웹툰의 시대》가, 공저로 《야구 읽어주는 남자》 《웃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등이 있다.

 

#이준일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동대학교와 광운대학교를 거쳐 2003년부터 지금까지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헌법과 인권법을 연구하고 있다. 학교 밖에서는 헌법재판소 헌법연구위원, 국회 입법지원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전문위원 겸 조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13가지 죽음》《감시와 법》 《헌법학강의》 《인권법》 《차별금지법》 《헌법과 사회복지법제》 《섹슈얼리티와 법》 《가족의 탄생》 등이 있고, 역서로 《법의 개념과 효력》 《기본권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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