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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_주의 ㅣ 알마 해시태그 1
박권일 외 지음 / 알마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혐오의 담론은 최근 확장되고 있다. 소위 메갈리안이라 이야기되는 이들의 출현은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되었고 불편함과 저돌성이 뒤섞이며 혼란스러웠다.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의미로 단단해지고 그 가운데 '혐오'라는 개념이 분명해졌다.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들, 극혐, 혐오식품, 혹은 혐한, ..주변에 혐오로 표현되는 것들은 널리고 널렸다. 단시 싫어하는 것, 기꺼워하지 않는 것, 인정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을 혐오라고 규정했던 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였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혐오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사회철학의 문제이며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의 갈등과도 연결되어진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런 것들을 정치수단으로 활용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런 분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혐오는 총체적 불안과 불만의 결집체였다.
작은 책은 몇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져있다.
혐오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박권일
순수함에의 의지와 정치혐오-김학준
지금 가장 정치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이다 -허윤
대중문화에서 여성혐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위근우
혐오표현을 법으로 처벌할 수 있을까? -이준일.
혐오가 담론으로 구성되어지는데는 페미니즘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 더이상 틀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그 틀 속에서 요구되는 불합리한 차별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 기폭제가 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혐오범죄라 일컬어지는 사건들의 피해자는 여성들이었고 강요되어진 불합리를 견딘다 할지라도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기 시작하는 순간,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존의 요구가 촉발되었을지도 모른다.
혐오의 대상은 주로 소수자이며 사회적 약자로 대변된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인, 그리고 생존투쟁을 벌이는 사람들. 생존투쟁이라 일컬어지는 가운데는 노동의 문제도 있고, 세월호의 문제도 있고, 가습기피해자의 문제도 있으며 농민도 있다.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은 생존투쟁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것이다.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체제의 문제이고 구조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 열정과 패기를 강요하는 사회. 과잉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사회. 누구나 가르치려 드는 사회. 그 속에서 모순은 풀어지는게 아니라 타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그들과 다름을 주장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담보하려 든다. 갈등을 풀어내는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는 건 민주주의의 중요한 덕목이자 동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 아닌 대상화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혐오'의 틀에 가두고 조롱하거나 가치없음으로 낙인찍는 행위들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이어폰 줄이 엉켜있을 때 엉킨 구조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숨죽여 풀어내는 노력 대신 마구잡이로 잡아다니다 결국 끊어버리고 쓰레기통에 버린 후, 그 이어폰의 단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어폰을 만든 회사를 비판한다. 그따위로 엉켜버리는 상품을 만들어 팔다니 파렴치하다고..
책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드러나는 혐오를 이야기한다.
모든 국민이 눈과 귀를 열고 듣고 보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촛불을 높이 든 촛불집회에 참가하며 잠깐씩 생각했던 것들. 평화와 질서. 우리는 어째서 평화와 질서에 집착(?)하는것인지. 결벽에 가깝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자 애를 쓰는 것인지 가끔, 속된 말로 속에서 천불이 나기도 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 두번째 꼭지는 많은 공감을 하게 했다. 정치혐오. 그리고 순수함에의 의지.
필자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은 " 갈등, 경쟁, 리더십, 조직"이며, "문제는 대중권력의 한계를 감안하면서도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정치체계를 조직하는 방법"이다 (p70)"라고..
갈등과 경쟁에 취약한 우리들은, 참는 것과 견디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은, 그간의 패배의 경험들에 위축된 우리들은 갈등을 회피하려 한 것은 아니겠는가.
갈등을 순수하지 않음으로 규정하고 갈등의 현상을 타자화하고 혐오의 씨앗을 품게 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이것은 분리불안의 역설이지는 않을까? 생각하게도 된다.
공동체에 귀속되어 분리되고 싶지 않은 지향과 순수성 훼손에 대한 두려움의 공존은 분리됨의 불안과 분리되지 않음의 공포를 같이 겪어내는 혼란의 상황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혐오'는 거대담론이 되었다. 단순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구조 안에서 사회체계 안에서 들끓고 있는 갈등의 변양태인 것이다.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레나타 살레츨은 그녀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 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중에서)"
우리의 혐오는 강요된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닐까?
"넌 어느 편인데?" 라는 물음. "성공하는 삶"에 대한 환상.
공동의 삶에 대한 사유가 '혐오'를 해결할 방도가 되기는 할까?
담론이 확장되는 과정을 보며, 자꾸 묻게 된다. 그렇다면? 이 혐오의 담론은 어떻게 수렴되어야 하는가. 진단은 시작되었고 치유는 쉽지 않겠지만, 다름의 인정이 아닌 '혐오'의 해결은 인간성의 회복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