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문/교양 출판그룹 반비입니다. ^^


이번에 반비에서 책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이안 샌섬의 신간, 『페이퍼 엘레지』가 출간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종이와 책에 애정이 있다고 자부하시는 분이라면

이번 서평단 활동으로 종이사의 한 획을 그어주시기 바랍니다.



***





『페이퍼 엘레지』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책이 사라지는 시대, 

연약한 종이의 질긴 내구성을 탐구하다!  



이 책에서는 아주 장황한 방식으로 종이의 죽음이라는 말이 과장되었음을 보일 참이다. 종이를 잔뜩 머금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종이에 작별을 고한다고 함은 어느 날 글쓰기를 익혔다는 이유로 말하기를 멈춘다는 말과 비슷하다.” 


이 책에서 나는 종이가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비애감과 옛날 종이를 그리워하는 향수의 존재를 인지한다. 예전 종이의 두께감과 묵직함, 젊음의 이상이 담긴 너덜너덜해진 포스터들. 우리의 역사를 대변하는 이런 종잇조각이 점점 낡고 희귀해진다는 것. 한편 무엇보다도 종이의 역설, 종이의 쓰임에 내포된 아이러니, 이중적 의미, 가치, 광활한 범위와 규모를 다룰 참이다.

-본문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자책
김개미 글, 노인경 그림 / 재능출판(재능교육)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김개미

개미가 쓴 사자책. 아주 작고 작은 부지런쟁이 개미가 크고 무시무시한 사자책을 쓴다. 
 작은 개미가 개미보다 작은 코안경을 쓰고 그 가늘기만 한 다리를 꼬고 앉아 가는 팔 다리보다 더 가는 펜을 들고 고민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제목과 함께 보면 그저 사자에 관한 책이구나 싶어진다.
하지만..사자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책에 대한 사자의 이야기다.
무슨 소린지는 보면 안다.

#2 나도 사자를 알고 있다.

 


겁도 없이 사자의 콧털을 잡아당기는 아이. 저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용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아이에겐 필요없는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용기보다 더 큰 작용을 하는 건 언제나 호기심이었다. 목숨걸고 쇠젓가락으로 콘센트를 후비적대는 일도 했었다고 나의 어린 시절을 엄마는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위험을 알기 전, 호기심..
어쩌면 아이들의 책읽기도 그런건지 모르겠다. 호기심으로 먼저 손을 대게 되는것. 그래야 오래도록 친구가 될 수 있을게다.
등떠밀려 하는 일은 어떤 것이든 재미가 없다. 잘 하던 공부도 "공부 좀 하지"라는 말과 함께 김이 빠지며 하기 싫어지니 말이다.


도무지 입이 근질거려서 '책에 관한 사자'라는 부분을 참을 수 없다.
사자는 책의 다른 이름이었나보다. 매일 누군가 찾아주고 깨워주는 그렇게 친구가 되어 종일토록 놀아주는 책.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렝게티의 제왕 사자를 기르고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얼마나 황당하고 짜릿할까?
하긴, 어릴 적 내게도 사자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생이가 있었고, 어린 왕자가 있었고, 마르코가 있었고, 앤도 있었고, 도로시랑 허클베리핀도 있었다.
그 친구들은 먼 나라에 있거나 산속에 있거나 우주 저편에 있었지만 언제든 만날 수 있었고 언제든 찾아낼 수 있었다.
친구들은 언제나 거기 있었고 내가 깨워주었을 때, 책장을 펼치며 "왕자야 노올~자!"를 외칠 때 단 한번의 거절도 없이 놀아주었다.
매일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날은 장미의 가시를 관찰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바오밥나무를 거꾸로 세워보기도 했으며 어느 날은 여우와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내게도 사자가 있었다.


오늘도 재미있었어. 내일 봐 사자야.
책을 덮고 누우면 사자도 잠을 잘까? 아침에 일어나서 깨워야하니까 필시 잠을 잘 것 같지만, 사자는 아마 깨우기 직전에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놀고 난 밤엔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낮에 읽은 책에 나왔던 모든 친구들이 모여 낮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와 놀이에 어두운 밤이 무섭지 않게 했다.
온 방안을 휘저으며 잠을 잔다고 엄마는 잔소리를 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거다.
아침에 일어나면 땀에 폭삭 젖어 있던 머리카락에도 이유가 있었던거다.
사자와 나만 아는 이유.



책의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그려진 그림.
어쩌면 이 그림이 이 책이 말하려는 메세지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책에 그려진 다리와 꼬리와 귀..숨어있지만 누군지 알것만 같은 이 그림이 좋다.

# 3.그러니까

나는 이 책이 왜 좋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표지만 보고 홀딱 반했다. 저 익살스러운 사자의 표정에 반해버린거다.
부시시한 머리가 아닌 매직펌이라도 한 듯 단정한 사자의 갈기와 오징어의 긴 다리 같이 훌쩍 긴 양쪽 한가닥씩의 수염. 마치 말의 고삐처럼..
미출간 상태로 계속 시간을 보내는 알라딘. 단골이기에 기다리다 기다리다 판매를 하고 있는 다른 서점을 기웃댄다.
언젠가 좋지 않은 기억으로 거래를 끊어버렸던 곳인데..결국 다시 그곳에 발걸음을 하고 구매했다.
사실, 이 책은(거의 모든 그림책이 그랬지만)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아 놓는다.
그랬지, 그랬어..라는 말을 무한반복하게 하는 그림책들이 요즘 부쩍 좋아졌다.
책욕심이 과해서 어느 순간 책에 깔려 죽을거라는 악담(?)을 듣곤한다.
실제로 책장위에 쌓아둔 책이 쏟아져 내린 적도 있다. 다 읽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자꾸 사들이냐는 핀잔에도 나는 자꾸 책을 산다.
살 수 없을 때는 얻기도 한다.
묻는다. 왜? 왜 이렇게까지.?

사자책이 답해준다.
초원에 동물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그 친구들 다 만나려면 아직 멀었어. 더 불러들여도 돼.
사자의 말이 맞다.
친구들을 구하러 또 나서보아야겠다.
사자야 고마워!


출판사가 재능교육인것이 좀..마음이 아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제의 중심에 선 경제학.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경제학이 그 가운데 끓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결국은 분배다. 피케티의 분배모델이 궁금하다. 번역에 다소 논란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자본이 두려워하는 자본론의 실체를 볼 필요는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끔 입맛이 없을 때면 식빵 테두리를 모아 마요네즈를 듬뿍 찍어서 먹곤 한다.

때때로 고추냉이를 잼처럼 펴바른 식빵을 우적우적 먹곤 한다.

밥공기에 밥을 얇게 깔고 치즈를 올리고 다시 밥을 깔고 베이컨을 넣고 다시 밥 그 위에 타바스코 소스 그 위에 밥, 제일 위에 누텔라.

 

이런 것을 보고 옆지기는 괴식이라 부른다.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영양학적인 조합이나 소위 궁합이 하나도 안맞는 음식들을 뒤섞어 먹는다.

요즘들어 부쩍 그런 것 같다. 일단 누텔라부터 치워둔다.

 

  이성복님의 산문집이 나왔다. 그동안 발표하지 않았던 글들을..꺼내 놓으셨다고 한다.

  이래저래 소문내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내셨다고도 했다. 출간 기사에 쓰인 내용들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조용한지..오히려 서늘했다.

  부산스럽지 않고 깔끔한, 그래서 말끔하기까지 한 그 산문들이 벌써 어른거린다.

 

 

 

올 해..도정일님의 산문집을 끌어안은 것으로 만족스럽다 했는데..이렇게 또 다른 보석같은 글들이 나와주었다.

 

    다양한 산문집 신간들이 나오고 있지만..이렇게 다섯권의 산문집은 두고두고 좋은 울림이 되겠다.

 

 

 

 

 

 

 

 

 

 

 

 

 

 

 

 

 

 

 

 

 

 

 

 

후마니타스의 최근작들이다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를 담은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이 조용한 외침이 갖는 힘은 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참혹하다는 사실에 암담했다. 그것을 알아야 하는가, 알고 있다면 그 다음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모르고 살겠는가. 모른척 한다면 그 죄책감을 어찌하겠는가.

감시사회..모든 것으로부터 감시가 시작되고 조작이 시작된다. 감시는 있는 그대로 관찰하겠다는 의도일까? 그 모든 정보들을 수집하여 편리한 시나리오를 만들겠다는 것일까?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또한 화제가 될만한 책이다. 이 당찬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고 하니..꼭 읽어볼 생각이다.

 

논란의 중심에 선 몇 권의 책 중에 단연 가장 큰 이슈가 되는것은 피케티일게다.

  

그 내용적인 문제 뿐 아니라 번역에 관한 문제제기도 꽤 되고 있는것 같다.

 

어쨌든 분배의 문제 앞에서 피케티의 논지를 살펴보고 싶어진다.

 

 

 

 

 

 

 

 

 

 

  이응준의 소설. 문장전선의 이응준의 책이다. 그 날선 문장들과 예리한 단어들의 소용돌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과 마음. 살만 악타르가 대중적으로 쓴 일반 교양서라고 한다.

 그의 사유의 깊이와 폭을 만날 좋은 기회다.

 

 

 

 

 

 

 

 

 

그러니까..이것은..연관성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저 닥치는대로 쌓고 먹고 보는 괴식과 다름아니다.

이 책들이 내 속에서 부대끼다 기어코 얹히고 말지..걱정이 앞선다. 그래도..손이 가는 건..습관일까? 아니면 책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일까.

 

때론 호젓하게 걷고 싶기도 하다.

때론 창을 열고 가을 볕과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는 책상에서 다부진 분석을 하고 싶기도 하다.

가을은..

그렇게 들었다 놨다하는 때이다.

그러니..괴식도 괴독도..가능하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까칠한 구도자의 시시비비 방랑기 - 과거의 습(習)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
윤인모 지음 / 판미동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 도를 아십니까?
 
-道를 아십니까?
가끔씩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을 때, 혹은 볕이 좋아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낯선 이들이 찾아와 묻곤 한다.
이 질문은 어찌 대답을 하든 피곤한 상황이 뒤따라 온다.
모른다고 하면, 알아야 한다면서 세상살이가 어떻고, 깨달음이 어떻고, 전생의 업이 어떻고...주절주절 말 그대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들어주어야 한다.
안다고 하면, 니깟게 뭘 알겠느냐 어디 시험 한번 해보자는 투로 선문답 같은 질문을 해대며 '모른다'는 말을 할 때까지 정신적 고문이 이어진다.
이들은 초파리처럼 후르륵 날아들어 불특정 개인의 휴식을 방해한다. 그리고도 떳떳하고 당당하다. 우매한 중생에게 道를 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담, 道라는 것이 그렇게 몇마디의 말과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의 뒤죽박죽 배열로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되며 체득이 되어지는 것인가?
그들은, 스스로를 제자라고도 하고, 동량이라고도 하고, 도인이라고도 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경우)
하지만 자기도 이해 못한 소리를 중언부언 늘어놓는 그들은 그냥" (도)를 빙자한 (깨)방정을 떨어대는 (비)위 좋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어쨌든 "도"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늘 있어왔다. 어떤게 바른 길(道)인가에 대한 의문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어떤 기준과 깨우침으로 살아야할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고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며 잣대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인가.
궁금했다.
수염이 허연 도포 차림의 도사님이 자꾸 떠오르는 방정만 없었다면 꽤 진지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된다.
 
#2.
책의 저자를 소개하는 글이 재밌다.
"필력은 있는데 작가는 아니고, 학식은 있는데 교수도 아니며, 명상에 대해서 뭘 좀 아는데 도인은 아닌"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작가의 이력을 보면 참 많은 수련을 한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멀고 가까운 수행처를 따지지 않고 열심히 수련했구나 싶어진다.
사실, 이 소개 하나에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이 담겨 있다고 보아도 그리 과한 이야기는 아닐 듯도 싶다.
있지만 아니고, 있지만 아니며 알지만 아닌 사람인게다.
보여지고 평가되어지는 것으로 존재의 본질이 규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적 그가 필력이 있고, 학식이 있고, 명상을 하지만, 그가 그 아닌 어떤 것으로 본질적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일것이다.
책의 뒷표지에 써있는 " 더 이상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이 되거나 비범해지려 하지 마라. "는 말이 그냥 폼이 좀 나는 구호가 아니란 말인거다.
이 글은 저잣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구하는 글이라고 한다.
시골 닷새장에 나오는 할머니의 봄나물 채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던 옛친구가 생각났다. 물론 이런 사이비 같은 놈이라는 욕 한바지와 뒤통수 한 대의 댓가를 치렀었다. 그런 이야기일까? 싶었다.
명상을 하며, 수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의 면면이 생각보다 다채롭고 제법 무게감이 있다.

언제적엔가 들어봤던 이름들도 나오고..명상이라는 말과 함께
들어보았음직한 이름들도 제법 있다. 가끔 티비에서 기인? 혹은 도인? 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사람들도 있어보인다.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허상을 버리고 진솔한 본질의 공부를 하고 싶은 저자의 시선이 여기저기 보여진다.
자기를 성찰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며 본질과 마주하는 훈련이란걸 해 본 적 없는 (해 봤다 해도 꾸준히 해 내지 못한) 사람에게는 다소 어려운 단어들과 개념들이 잘 익은 과일나무 밑의 가시덤불처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의미를 찾아가며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적 확보만 가능하다면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결국 자신과 마주하기가 아닐까?
자신과 마주 서서, 아픈 모순을 스스로 확인하고 깨고 고쳐 가는 것.
자신의 본 모습을 정확히 마주하지 못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선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찾는 것에서 그 시작을 둘 수 있겠다.
# 3. ​까칠한 구도의 길.
보통 구도자들의 모습은, 조용하고 온화하며 물아일체적 모습이었다. 티비에서는..
종교적 가르침에 의해 어떤 종교에 귀의하건, 스스로 도를 깨우치기 위해 수행을 하건 말이다.
이렇게 까탈스럽게 "그게 뭐요?"라고 반문하며 닥달하는 구도자는 낯설다. 하지만 어쩌면 구도자라면 그래야하지 않을까?
사상가들도 자신들의 신념과 이데올로기 앞에서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곤 하는데,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기 위한 수행의 길에 바른 배움이 아닌것과 마주 할 때는 분연히 까칠함을 떨어대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싸우기도 하고, 황당한 사건,사람과 만나기도 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들과 그 사건들에서 배우고 가르치고가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본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지금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매우 드물다.
결혼이란 계약서로 맺어지면
선택의 여지나 자유도 없어진다.
사람들은 상대를 바꾸려고 하면서
좌절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잘못된 시발점이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상관할 바도 아니고,
할 수도 없다. "
 
 
책 속에서 만난 말 속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자칫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패배자의 모습이거나 회의주의적 모습이라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쉽게 말해 끕도 안되는데 괜히 이해한다고 설쳐대는건 완벽한 오해와 곡해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본질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 상대를 바꾸겠다는 씨알도 안먹히는 만용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도의 시작점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전투적이고 까칠하게.
 
道를 아십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