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구도자의 시시비비 방랑기 - 과거의 습(習)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
윤인모 지음 / 판미동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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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를 아십니까?
 
-道를 아십니까?
가끔씩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을 때, 혹은 볕이 좋아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낯선 이들이 찾아와 묻곤 한다.
이 질문은 어찌 대답을 하든 피곤한 상황이 뒤따라 온다.
모른다고 하면, 알아야 한다면서 세상살이가 어떻고, 깨달음이 어떻고, 전생의 업이 어떻고...주절주절 말 그대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들어주어야 한다.
안다고 하면, 니깟게 뭘 알겠느냐 어디 시험 한번 해보자는 투로 선문답 같은 질문을 해대며 '모른다'는 말을 할 때까지 정신적 고문이 이어진다.
이들은 초파리처럼 후르륵 날아들어 불특정 개인의 휴식을 방해한다. 그리고도 떳떳하고 당당하다. 우매한 중생에게 道를 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담, 道라는 것이 그렇게 몇마디의 말과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의 뒤죽박죽 배열로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되며 체득이 되어지는 것인가?
그들은, 스스로를 제자라고도 하고, 동량이라고도 하고, 도인이라고도 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경우)
하지만 자기도 이해 못한 소리를 중언부언 늘어놓는 그들은 그냥" (도)를 빙자한 (깨)방정을 떨어대는 (비)위 좋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어쨌든 "도"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늘 있어왔다. 어떤게 바른 길(道)인가에 대한 의문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어떤 기준과 깨우침으로 살아야할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고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며 잣대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인가.
궁금했다.
수염이 허연 도포 차림의 도사님이 자꾸 떠오르는 방정만 없었다면 꽤 진지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된다.
 
#2.
책의 저자를 소개하는 글이 재밌다.
"필력은 있는데 작가는 아니고, 학식은 있는데 교수도 아니며, 명상에 대해서 뭘 좀 아는데 도인은 아닌"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작가의 이력을 보면 참 많은 수련을 한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멀고 가까운 수행처를 따지지 않고 열심히 수련했구나 싶어진다.
사실, 이 소개 하나에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이 담겨 있다고 보아도 그리 과한 이야기는 아닐 듯도 싶다.
있지만 아니고, 있지만 아니며 알지만 아닌 사람인게다.
보여지고 평가되어지는 것으로 존재의 본질이 규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적 그가 필력이 있고, 학식이 있고, 명상을 하지만, 그가 그 아닌 어떤 것으로 본질적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일것이다.
책의 뒷표지에 써있는 " 더 이상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이 되거나 비범해지려 하지 마라. "는 말이 그냥 폼이 좀 나는 구호가 아니란 말인거다.
이 글은 저잣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구하는 글이라고 한다.
시골 닷새장에 나오는 할머니의 봄나물 채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던 옛친구가 생각났다. 물론 이런 사이비 같은 놈이라는 욕 한바지와 뒤통수 한 대의 댓가를 치렀었다. 그런 이야기일까? 싶었다.
명상을 하며, 수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의 면면이 생각보다 다채롭고 제법 무게감이 있다.

언제적엔가 들어봤던 이름들도 나오고..명상이라는 말과 함께
들어보았음직한 이름들도 제법 있다. 가끔 티비에서 기인? 혹은 도인? 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사람들도 있어보인다.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허상을 버리고 진솔한 본질의 공부를 하고 싶은 저자의 시선이 여기저기 보여진다.
자기를 성찰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며 본질과 마주하는 훈련이란걸 해 본 적 없는 (해 봤다 해도 꾸준히 해 내지 못한) 사람에게는 다소 어려운 단어들과 개념들이 잘 익은 과일나무 밑의 가시덤불처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의미를 찾아가며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적 확보만 가능하다면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결국 자신과 마주하기가 아닐까?
자신과 마주 서서, 아픈 모순을 스스로 확인하고 깨고 고쳐 가는 것.
자신의 본 모습을 정확히 마주하지 못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선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찾는 것에서 그 시작을 둘 수 있겠다.
# 3. ​까칠한 구도의 길.
보통 구도자들의 모습은, 조용하고 온화하며 물아일체적 모습이었다. 티비에서는..
종교적 가르침에 의해 어떤 종교에 귀의하건, 스스로 도를 깨우치기 위해 수행을 하건 말이다.
이렇게 까탈스럽게 "그게 뭐요?"라고 반문하며 닥달하는 구도자는 낯설다. 하지만 어쩌면 구도자라면 그래야하지 않을까?
사상가들도 자신들의 신념과 이데올로기 앞에서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곤 하는데,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기 위한 수행의 길에 바른 배움이 아닌것과 마주 할 때는 분연히 까칠함을 떨어대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싸우기도 하고, 황당한 사건,사람과 만나기도 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들과 그 사건들에서 배우고 가르치고가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본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지금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매우 드물다.
결혼이란 계약서로 맺어지면
선택의 여지나 자유도 없어진다.
사람들은 상대를 바꾸려고 하면서
좌절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잘못된 시발점이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상관할 바도 아니고,
할 수도 없다. "
 
 
책 속에서 만난 말 속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자칫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패배자의 모습이거나 회의주의적 모습이라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쉽게 말해 끕도 안되는데 괜히 이해한다고 설쳐대는건 완벽한 오해와 곡해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본질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 상대를 바꾸겠다는 씨알도 안먹히는 만용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도의 시작점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전투적이고 까칠하게.
 
道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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