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 - 꽃 중에 질로 이쁜 꽃은 사람꽃이제
황풍년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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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아이들끼리 서로 놀림을 주고 받을 때, 그 놀림의 끝판왕은 '촌닭 같은게.'였다. 어쩐지 세련은 커녕 중간에도 끼지 못하는 낙오자를 지칭하는 것 같은 '촌닭'이라는 말은 아이들 사이에서 최후의 일격 같은 의미였다. 어지간해서는 꺼내지 않는 말. 그러나 그 말이 소리가 되어 튀어나온 순간 촌닭이라 지칭된 아이의 별명은 무슨무슨 촌닭으로 굳어지곤 했다. 꼬마촌닭, 방구촌닭, 점박이촌닭..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촌'이란 개발이 덜 되고 미련한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종종 인식되었다. 세련되지 못함. 그렇다면 세련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우월하거나 야무지거나 경쟁에서 밀리지 않음 같은 것이었으리라. 남들보다 나은 입성과 입지를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세련된 사람들이라 칭하게 된건 드라마때문일지도 몰랐지만 그 배경엔 간단없는 경쟁과 경제성장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을거다.

잘 입고 잘 먹고 사는 것. 그것이 당면의 과제였던 사람들은 이익과 편리에 집중했고, 보존과 이해에 인색했다. 도시로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 촌스러움은 무기가 될 수 없었고 오히려 마땅히 버려야 할 것으로 이해되었다.

지방에서 전학 온 친구들의 사투리는 신기하기 전에 우스웠다. 불안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나와 우리, 너와 너희를 구분해야했다. 그렇게 조금씩 갈라지며 야박해져왔다.


전라도.

사실 전라도라는 곳에 대해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부터였다. 태백산맥을 읽었고, 광주를 들었으며 고창으로 농활을 갔었다 .전주 출신의 룸메이트가 있었고, 정말 좋아했던 친구가 목포교도소에 있었다.

몇가지의 단절적 이미지로 구성되는 전라도는 투박하고 가난했다. 굴곡진 시간들을 건너며 전라도는 더 뒷쪽에 더 외진 곳에 쪼그려 앉은 작은 아이처럼 취급되었다.

전라도가 주목 받는 시기는 정해져 있었다. 각종 선거의 때. 그 때에만 전라도 사람들은 국민이었고 소중한 민의였다. 증오와 혐오의 씨앗을 뿌리는 자들은 전라디언이라는 모욕적인 언사와 무례한 행동을 일삼을 대상이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그 어느 곳도 이처럼 타박받고 외면당한 곳이 없으리라.

책을 읽으며 이 모든 시간을 꾸역꾸역 삼키며 살아온 이들의 숨결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물렁한 이야기가 아닌 오독오독한 이야기 오래전 읽은 태백산맥에서 눈물과 땀에 절은 목소리로 나누던 그들의 이야기처럼 살폿살폿 다가서는 목소리를 듣는다.


전라도의 힘, 전라도의 맛, 전라도의 맘, 전라도의 멋.

웅숭깊다(형, 1, 생각이나 뜻이 크고 넓다. 2. 사물이 되바라지지 아니하고 깊숙하다)는 말의 질감과 온도를 알 수 있는 글들이다.

할머니들의 입을 타고 이어지는 입말들, 팍팍한 가슴으로 견뎌낸 이야기들, 그것은 전라도 만의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촌골짝에 가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 그 곳에 뿌리 내린 탓에 꽃피우고 열매맺고 씨앗마저 보내고 나서 서서히 다음 세대를 위해 누울 준비가 된 사람들은 웅숭깊었다.

"항꾼에 (함께) 노놔 묵어야 게미지제. 항꾼에 놀아야 재미지제"

이 한마디에 웃음이 났다. 어울려 사는 사람들, 서로의 속내까지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재미없을 수 없다. 숱한 의미를 갖는 '거시기'는 신비로운 암호다. 알아야 이해하는..


지인의 집들이에 초대 받던 날을 기억한다. 새댁이 솜씨가 야무졌다. '맛있겠다'라는 탄성 앞에 새댁은 '아유, 잘 못해요. 친정엄마가 전라도분이시라' 라며 말을 흐렸고 그 순간 일행들의 눈에 스친 신뢰와 기대를 기억한다. 그만큼 손 맛에 대한 공감이 있는 것이다. 전라도의 맛. 이건 마치 시인 백석을 싫어하는 이유를 대보라는 주문만큼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진도의 이야기가 나왔다. '맹골도'. '죽도', 곽도'의 이야기. 맹골도라는 말에 덜컥한다. 그만큼 온 국민들이 벗어나지 못한 트라우마다.

잠깐 책읽기를 멈추었다. 긴 심호흡을 하고서야 다시 그 맛을 떠올려본다. 음식의 맛과 이야기의 맛이 잘 버무려진다. 무던히 손이 갔을 그 음식을 암시랑토 안허게 내어놓는 그 마음이 맛을 부추기는 건 아닐까 하고..


급하게 뛰어가는 시대와 사람들로부터 한 걸음 뒤에 더불어 걸어온 사람들. 그 흔적은 재바르지도 반듯하기만 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자꾸 뒤쳐지는 건 아닌가 조바심을 부릴 법도 한데 전라도는, 전라도 사람들은 항꾼에 사는 법이 재미졌는지도 모른다. 빠르지 않아도 한 방에 뒤엎지 않아도 자신들의 속도로 너끈히 이어갈 삶과 시간을 겸손하게 살아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촌스러운 전라도.

자꾸만 내어주는 손길, 자꾸만 들여다보는 눈길, 천천히 같이 가는 맛을 아는 거기는 촌스럽다. 약삭빠르지도 계산적이지도 못한 사람들과 시간의 이야기가 요즘 말로 찰지다.

사투리와 화보가 가득한 책은 입심 좋은 아주머니의 설명처럼 흥미로웠다. 촌스럽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순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속도와 경쟁과 무관하게, 그에 무관한 댓가를 가슴으로 치르며 함께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참살이의 모습. 도저히 이문이 계산되지 않는 손해보는 삶인데도 합죽하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모습. 그 수더분함 속에 온몸으로 항거하는 반란의 피가 고스란히 보존된 선득선득 심장이 뛰는 모습.


촌스러운 전라도의 이야기를 읽는다. 촌스러움의 미학? 본래의 미. 본래의 사람을 만난다. 아름다운 대상들이 아닌, 아름다움을 만난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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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한글판) - 시극 나비잠
김경주 지음 / 호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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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라는 시집을 만난 것으로 충격과 호기심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글을 이렇게 쓸 수 있지?'

김경주의 작품들을 찾아 읽으며 문단의 자랑이거나 저주라는 그에 대한 평가에 수긍이 가기 시작했다. 김경주의 글을 읽는 건 꿈을 꾸어도 좋다는 허락 같았다. 꿈을 꾼다는 것, 그것은 비로소 절망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라고 한다면 김경주는 천재이거나 절망하게 하는 저주를 내리는 영매일지도 몰랐다.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하고 그의 행보는 입체적이었다. 결국 시극 나비잠이 나온 것이다.

시극.

뭔가 낯설다. 시로 극이 될 수 있다니. 어떤 사람 혹은 사람들의 노래로 만들어진 노래극은 익숙해졌지만 시로 이루어진 극이라니..

이 낯섬의 시작엔 시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이지 않은 은유와 이미지가 가득한 허공의 목소리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시가 사람의 언어이며 사람의 말이라면 그것으로 극이 쓰이고 공연된다 한들 이렇게 생경하거나 놀랍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맘마미아를 보면서, 김광석을 보면서 마이클잭슨 오마주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거나 추억에 잠긴것을 보면 말이다.

나비잠은 시극이다.


버려진 아이 달래, 성을 쌓는 대목수, 대목수의 잃어버린 형제 악공, 제사장, 천문사관, 달래를 기른 노파, 스님, 그외의 다수..

가뭄과 기근 흉흉한 민심을 다잡기 위해 대목수는 사대문을 단단하게 세우고 기우제를 지내려 한다. 단단한 사대문은 죽은 아이들의 머리통이, 죽은 아이들의 머리통 속에서 흐르는 흙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악몽같은 과거를 기억하는 대목수, 바람처럼 노래하는 악공, 잠들지 않은 채 한없이 길어지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아이 달래.

이야기의 축은 이렇게 세 사람을 중심으로 제사장, 천문사관, 스님, 노파가 외벽을 쌓으며 이어진다.

사대문이라..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문. 그 안에 피폐하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어쩌면 불길한 것들은 사대문 밖으로 내치고 불행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현실과 닮았다. 단단한 사대문은 죄없는 목숨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고 있다.

너무나 선명한 꿈이어서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경계에 서성이게 하는 그. 나비잠은 그런 느낌을 같게 한다.

대사들과 지문들과 나레이션은 모두 시다.

시가 걷고, 시가 울고, 시가 말해지며 시가 두려워한다.

네모난 페이지 안에 갇힌 시어들이 공간으로 뛰어나와 바람처럼 불고 흙처럼 쏟아지며 한없이 길어지는 머리카락처럼 온 몸을 휘감는다.


달래.

머루 달래의 달래인줄 알았다. 달래는 달래는 사람이다. 상처를 달래고 어둠을 달래고 눈물을 달래는 달래.

한 쪽 눈으론 밤을 보고 다른 한 쪽 눈으로 낮을 보는 달래.

기우제의 제물이 될 달래.

아이를 키우려고 훔쳐왔으나 역병에 걸린것을 알고 버렸던 그 달래. 사대문 밖 숲에서 시체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드는 노파의 손에 자란 달래.

이토록 기구한 아이가, 이보다 더 서러울 수 없는 아이가 달래다. 그 아이가 상처를 달랜다.

내쳐진 존재에게서 구하게 되는 위로와 치유. 그래서 아프다.


극 속에서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흥미롭다. 인형극의 형태로 또는 전설처럼 이야기 되는 과정. 극 속의 극, 이야기 속의 이야기의 과정은 살짝 흩어지려는 집중력을 다잡게 한다.


나비가 달래를 입에 물고

어디론가 떠 간다

나비가 입에 물고 있던 달래를 떨어뜨린다

나비 날아간다

달래 나비의 메아리를

따라가다

흐느끼듯

뭔가를 중얼거리듯

천천히

느리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숨소리를

다라

성벽에 다가가

귀를 대어 본다


달래 나. 나비. 가

우. 운다

나. 나비. 가

타. 타. 탄다


심장을 잡은 채 푹 쓰러지는 달래

죽어서 땅에 떨어진 나비처럼 늘어져

두 손을 하늘로 펼친 채 잠을 자는 표정이다

모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지나가는 스님이

소녀의 이마를 문질러 주고 있다.


이 대목에서 나비잠과 달래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심장이 아픈 아이. 혀가 참새의 혀만큼 작은 아이. 말을 더듬고 심장의 고통을 품고 사는 아이. 달래.

달래의 역할은 듣는 것이다. 달래는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이유로 의심받고 밀려났지만 결국 사람들의 치유의 잠을 위해 자장가를 부르게 되는 달래인 것이다.


극은 점 잇기 책 같은 느낌이다. 이 점에서 저 점으로 까닭없이 뛰어가다 마지막 점을 잇는 순간 또렷이 보이는 흔적들. 그 흔적들이 보여주는 그림. 이야기.

결국 까닭없는 이음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고 그 순간 느껴지는 복받침.

아무도 달래주지 않는 설움과 상처가 켜켜이 쌓인 내 손으로 쌓은 내 삶의 사대문에 귀를 기울이고 바람을 들리고 빛을 끌어와 오랜만에 아이처럼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김경주.

시극 나비잠.

흥미롭고 개운한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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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은10개 언론사 20여명의 기자들이 재능기부를 통하여 만든 잡지다.

 

  SNS를 하며 제일 좋은 건 후원을 하거나 힘을 보탤 곳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천만원씩, 수억원씩 기부할 깜냥은 안되니(그게 얼만큼인지 가늠도 안된다) 소소하게 내가 조금 덜 편안해도 될 정도,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정도에서 펀딩을 하거나 구독을 하거나 후원을 하게 된다.

 비정규직 특별잡지. 송경동의 꿀잠을 떠올릴 법한 '꿀잠'. 거기에 송경동이 있다.

 백기완 문정현 신부님께서 '두 어른전'이라는 행사도 하셨다.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건립을 위한 행보였다.

 

 날이 더워 깊게 잠들지 못하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물 먹은 솜처럼 고스란히 남은 어제의 피곤을 느끼게 된다. 달게 잠을 자 본 게 언제였나?

아주 어린 시간, 더위에 뛰던 손주년을 그늘진 평상위에 눕히고 살랑살랑 부채질을 해주던 외할미 곁에서의 낮잠이 달았던가?

 

먹고 사는 일에 치여 밥 줄을 쥔 자들에게 끌려다니며 드는 잠은 여전히 고단한 꿈만 꾸게 한다.

비명이, 울음이, 자꾸만 작아지는 목소리가..

 

한 부씩 보내줄 여력이 안된다고 만든이들이 그랬다.

오십부 백부씩이라면 몰라도..그래서 인터넷 서점에 등록했다고.

 

누군가의 다디단 잠. 그것을 나누다보면 내 잠도 달아지지 않을까?

꿀잠을 예약했다.

 

꿀잠을 예약했다..라고 쓰고나니 살짝 설렌다. 텍스트가 아닌 참 꿀잠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내 몫의 잠..내 몫의 꿈.

꿀 권리가 있고 꾸어 마땅한 단꿈.

 

문학잡지 하나를 잠시 내려두는 한이 있어도..이 잡지는 봐야겠다.

 

낯익은 이름 몇개가 반갑다.

 

 

 

 

 

 

 

 

 

 

 

 

 

 

 

 

 

 

 

 

 

 

 

 

 

 

 

 

 

 

 

 

맺히고 엉킨 아픈 속을 슥슥 문질러 줄 수 있는 따순 손이 되면 좋겠다.

꿀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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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유령 - 어른들을 위한 영국의 동화
로버트 헌터 지음, 맹슬기 옮김 / 에디시옹 장물랭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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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표지가 매혹적인 새내기 유령.
친근하고 유연한 그림과 찬찬한 이야기가 좋다. 어쩐지 시린 이야기, 새내기 유령은 다름 아닌 '나'일 수도 '너' 일 수도있다는 느낌에 잠깐 떨렸다.
처음 유령이(사람이, 사회적 사람이) 되고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동료들을 따라가고 관찰하고 그러다 그들을 놓치고 발견하게 되는 첫 시선.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친절한 친구(동료 혹은 인연). 그의 꿈을 듣고, 나의 꿈을 발견하고 가닥을 잡아갈 무렵에 알게 되는 참담한 자신의 임무(가혹한 현실). 누군가를 해치고 만들어지는 정체성과 격려(누군가를 밟고 서야 하는 현실)가 참담했다. 아직 유령이(사회가) 뭔지 모르는 순수가 남은 탓일지도 모른다.
나의 역할을 눈치 챈 가장 소중한 친구는 도망을 가고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해주려 친구를 찾아간다. 그 순간 '나'를 찾아온 유령 동료들..
필사적으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도망을 친다. 친구를 끌어안고 멀리, 더 멀리, 유령들이 찾아올 수 없을만큼 멀리..
높이 더 높이..오직 친구를 구하기 위해..유령인 나와 사람인 친구가 만나게 되는 대기권과 우주..친구를 잃고 나자 유령 동료들이 환호했다..
드디어 임무를 완수했다고..

나의 진심과 가치관이 집단의 목적과 다를 때, 나의 존재성만으로 그렇게 해야한다고 강요 당할 때, 과연 그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어떻든 나의 선의가 타자의 불행을 끌어온다면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 수 있을까?
집중과 선택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때, 무엇에 집중해야할지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모든 선택 앞에서 '새내기'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선택이 최선일 수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지극히 낮은 확률임을 알고도 선택할 수 있을까. 꽤 높은 확률이란걸 알게 되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을까?
공공의 선이랄지, 혹은 존재의 정체성이랄지 하는 카드를 들이밀면서..

어쩌면 살아간다는 일은 언제나 새내기가 되어 지켜내고 싶은 것을 가장 아프게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은 지킬 것을 모두 잃게 되는 것, 그렇게 잃을것이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을 만들지 않게 되는 것..
그리고..그것에 적당한 의미를 부여한 채 빛나는 별이 되었다고 포장하여 기억하는 과정은 아닐까..생각하게 된다.
극단적이며 부정적일지 모르겠지만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다. 이미 그렇게 지내왔고 그렇게 지내고 있으니까..

책을 읽는 내내, 그래봐야 30분도 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파랗게 시리다는 것이 뭔지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체감한다.
행간에 괄호를 묶어 자꾸 끼워넣게 되는 고백. 표지를 제외하고 열네 장.
간단한 책 한권이 간단치 않게 읽혔다.
에디시옹장물랭.
장 물랭 에디션이란 의미일까? 장 물랭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레지스탕스 장 물랭인가?
왜 하필 장 물랭이지?
깊어가는 생각을 피하고 싶어 애꿎은 호기심을 발동시켜본다.

기억 해 두어야겠다.
책이 참..괜찮다. 그림도 파랑파랑하고..
표지 뒷면 바코드 옆에 쓰인 '수익금으로 나무를 심어요' 라는 말이 귀엽다.
책을 만든다고 베어 낸 나무를 다시 심는다고? 나무가 많아지면 새내기 유령 여럿이 부딪히겠는걸?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하던데..어른 보다는 새내기를 위한 고민지침서에 가까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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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웠고 더웠다. 광복절이 뜨거웠던 몇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건국절이라는 망언과 욱일기를 썼다는 아이돌. 프로그램 하차를 요구했고, 그녀는 사과를 했다. 하지만 헌법을 수호해야 하는 이의 헌법을 부정하는 말에 대해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생각했다.

이 조용함의 원인은 뭘까. 두려움인건가? 아니면 아이돌만큼의 영향력도 없는건가?

그렇다면, 그따위 영향력이라면 거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정권이 바뀌고 나면..그녀는 어떻게 그려질까.

 

습관적으로 열어본 SNS에서 "백무현님이 소천하셨습니다"라는 문장을 만났다.

그가 갔다. 바보대통령과 이름이 닮은 그가 말이다.

누가 이 세월을 그려줄까? 백무현이 아니라면 그 누가?

 

 

 

 

 

 

 

 

 

 

 

 

 

 

 

 

 

 

 

 

 

 

 

 

 

         그는 왜 이렇게 서둘렀을까? 고생했다 와서 놀자며 부르는 소리가 있었을까?

그의 만평과 그림들과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요즘 화제라는 만화속에서 튀어나온 사람 이야기. 백무현이 그려넣은 만화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이야기의 절절함과 날선 비판을 또 볼 수 있을까?

 

잘가요..그대.

애썼어요. 좀체로 나아지지 않는 나라사정은 만화보다 더 만화같지만..그래도 가끔 숨쉴 수 있던 그림이야기를 기억할겁니다. 기억할 것이 자꾸 늘어가는게..안타깝지만 기억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생각합니다.

 

편히 쉬어요.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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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10-31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현, 두 도시이야기 보고왔어요..
백무현님의 진심을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