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쓰기전에 먼저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단 집을 한번 둘러보고, 피해자의 신분을 확인한 다음, 이웃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했다.

"꽁꽁 싸맸다고요?"
"검은색 일색이었어요. 바지, 스웨터, 신발, 장갑, 복면 모두 말이에요. 심지어 스웨터와 장갑 사이에도 테이프를 둘렀다니까요.
바지도 테이프로 양말에 단단히 붙여두었고요."
살인과 주거침입 모두 사전에 신중히 계획한 것이 분명했다. 언젠가 머리카락이나 피부 각질에서 채취한 DNA 증거 때문에 덜미를 잡히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 복장을 갖춰 입은 강도들에 대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의 살인 사건에는 늘 몇 사람들의 얼굴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가 대답했다. 이 사건에 얽힌 얼굴은총 다섯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오빠, 남자친구 그리고차갑고 파리하며 무표정한, 생명이 빠져나간 그녀의 얼굴. "그녀의 어머니가 매년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와."


자신의 일이 힘들고 부담이 큰 업무라고 항상 생각하면서도 그는 그런 도전을 즐겨왔다. 가끔 통제권을 상실하거나 전체적인 개요를 그릴 수 없다는 기분을 느낀 적도 있고, 의심이 생기거나 확신을 품을 수 없었던 일 또한 다반사였지만, 그는 항상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일을 처리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는 언제나 자신의 결단력을 옹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순간, 세실리아 사건에서 평소와는 다르게 처리되었을 가능성이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 그로서는 도무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말을 아낀 이유를 깨달았다. 워크맨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자가 감금된 장소와 관련한단서를 확보한 마당에 워크맨에 대한 정보가 누설되면, 이는 납치범에게 경찰이 확보한 단서를 알려주는 셈이었을 테니 말이다. 만약 그 정보가 기사화된다면 범인은 그녀를 억류하고 있는 장소를바꿀 것이고, 혹은 더 나쁜 상황이 초래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언론이 그 단서의 냄새를 맡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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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비스팅은 잘 모르겠다.
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있는 그대로 마음에들었다. 경찰관을 천직으로 여겼기에 다른 삶은 바라지 않았다.
형사로서 마주하는 업무는 그에게 명확한 목적의식을 부여했고,
그의 삶에도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리네는 경찰의 역할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변화시켰다. 그녀가 제시하는 외부인으로서의 관점 덕분에 자신의 고루한의견을 재검토할 수 있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경찰대학생도들 앞에서 강연했을 때 그는 시민들의 안심과 신뢰를 얻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무릇 경찰이라면 품위와 예의를 갖추고 진심 어린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대중의 믿음을 얻어야 한다는내용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비스팅은 리네의 견해가 자신의중심추를 형성하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네가 막 시스템에서 로그아웃하려는 순간, 편집장 요아킴 프로스트가 돌아왔다. 그는 이름 그대로 서릿발 같은 사람으로 통했다. 그가 편집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뉴스 표제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극을 이해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공감 능력의 부재, 그야말로 완벽한 자격증 아닌가.

리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뜻 고상해 보이는 프로스트의 주장은 겉치레에 불과했고, 사실 그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따로있었다. 바로 신문 판매 부수였다. 그녀 아버지의 이름을 선정적인 표제 한가운데 박아 넣거나 기사의 초점을 특정 개인에게 맞추는 짓을 하지 않고도 신문의 진실성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찾을 수있었다. 비난의 초점을 개인이 아닌 경찰 조직에 맞추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판매 부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을 것은 명백했다

그는 경비견이라는 언론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언론의 사명은 정치인들과 직위에 따른 권력을 보유한 사람들, 그리고 공공 기관을 향해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정의를 추구하며 부정과 부당함을 폭로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 그는마치 부당한 언론에 마구 짓밟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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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 사람은 어떤 나쁜 일을 겪었을까요? 나쁜 일을 당한 사람이 아니면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손님이 외쳤다.
"호이 씨, 당신은 너무 사람을 잘 믿어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겁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게 진실입니다!"
호이 씨는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전 진실보다는 사탕을 더 잘 알지도 몰라요."

안은 침묵했다. ‘더 이상 여기 존재하지 않음‘을 연습하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해 보려 했으나 아주 잠깐 동안만 성공했다. 

"피셔 따위는 집어치워!"
아그네스 K가 착각하지 않았다면, 그 말은 다름 아닌 증조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죽기 전에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테니, 틀림없이 훨씬 나쁜 마지막 말을 속삭였을 것이다. 우리 가족 가운데는 아무도 그날 저녁과 뷔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분명 아무도 관심이 없을 터였다. 왜냐하면 모두들 갑자기 끔찍하게 많은 것을 계획하고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증조할아버지가 영원히 세상에서 도망쳐 더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지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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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딸을 용서해야 해요. 아빠를 갖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카수미는 막 잠수하러 가려던 참이었다. 카수미는 소년의 눈동자에조그맣게 맺힌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치 카수미를 더 잘보려고 거기에 새겨 놓은 것 같았다. 

 몇 달 후, 남자들이 만에 닻을 내리고 땅 위로 올라오기 며칠 전에,
켑의 씨앗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정확히 카수미의 이모가 꿈에서보았던, 그들 가운데 누구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꽃, 훗날 열매가, 켑의 열매가 달릴 나무의 꽃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빽 소리를 질렀고, 녀석도 내게 소리를 되돌려 주었다. 몇 초 만에 우리 사이의 공기가 붉게 채색되었다. 나는 고함을 지르며 녀석에게 문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녀석에게 대항하기 위해 고개를 지독하게 늘여 빼야 했는데, 녀석의 숨결이 나를 스치며 어떤 달콤한 향기가 갑작스레 공간을 가득 채웠다. 라일락 꽃 향기를 비롯해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꽃들의 향기였다. 그 냄새는 틀림없이 녀석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지니고 왔을 것이다. 우아한 동시에 무겁고, 유혹적이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냄새였다. 그렇기는 해도 녀석이 고개를 숙일 때에야 겨우 나도 고개를 숙였다. 화난 눈으로 노려보려는 시도는부질없었다. 오로지 우주의 검은색뿐인데 대체 어디를 응시해야 한단말인가.

 그러니 교회는낭비다. 우리 모스크에는 금요일 예배 시간에 언제나 아주 많은 사람이 갔다. 내 생각에는 교회를 나눠 써도 좋을 것 같다.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에 가고 금요일에는 무슬림들이 가는 거다. 교회를 조금만 개축하면된다. 괜찮은 생각 아닌가? 난 다시 한번 곰곰 생각해 보고는 바바에게 묻는다. 하지만 안 되는 이유들이 또 꼭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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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미미의 가장 놀라운 점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갖고 나온 노인의 마음씨라고 말했다.
"미미는 언제나 자신을 가장 나중에 생각해."
엄마가 설명했다.
데이비드는 그런 마음을 왜 노인의 마음씨라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미미가 자신을 가장 나중에 생각한다는 엄마 말은 맞았다. 

원하는 것을 원할 때마다 얻는 것. 데이비드는 미미처럼 노인의 마음씨를 지닌 누군가도 그런 자유를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했다.
오래전에 자유의 땅은 정의의 땅이라고 불렸다. 사람들은 ‘정의‘가무엇인지에 대해 두꺼운 책들을 썼고, 마지막에는 정의란 자유와 같은뜻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아빠는 이렇게 설명했다.
 "네가 구두장이이고, 구두를 수선해서 돈을 번다고 가정해 보자. 다른 곳에 망가진 구두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구두를 수선하러 그곳에 갈 수 있어야 하지. 그게 정의롭지, 안 그래?"
데이비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비드의 방에는 풍성한 모피 외투를 입어서 하얀 북극곰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보아하니 부자의 땅에서 온 것 같았다. 화장실 옆에는 아직 방을 배정받지 못한 작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느긋하게 바닥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데이비드는 남자가 휴식의 땅에서왔으리라 결론지었다. 생각의 땅, 괴로움의 땅, 고집의 땅, 궁핍의 땅,
시간의 땅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자고 먹고 화장실에 갔다. 날마다 날마다….


"공정하지 않아요!"
데이비드는 공무원에게 말했다.
"뭐라고?"
공무원이 물었다. 두 눈이 가늘어지며 친절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여긴 자유의 땅이죠."
데이비드가 말했다.
"나도 안다."
"여기서는 인간적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지요.
다만 가장 중요한 것, 인간 자신만 빼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젊은이?"
"우리는 돈과 재산, 희망과 사랑을 엄마에게 보내도 되는데, 우리 자신은 오면 안 되잖아요. 그건 공정하지 않아요!"
"아, 그래?"
데이비드는 고개를 저었다.
"돈과 재산과 만질 수 없는 것들이 인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이 자유의 땅이라고 할 수 있나요?"
공무원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썰매를 언덕으로 끌고 올라가는데, 회색 구름이 갈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를리요는 그 뒤의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거기 태양이 있었다! 태양은 흐릿하고 작고 아주 멀리 있었다. 아무튼 아주 강렬하게 빛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거기 있었다.
태양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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