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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1. 종이의 이야기
종이의 이야기다. 그 종이의 탄생과 발전과 소멸이라 하기엔 아직도 너무 많은 곳에 퍼져있는 과소평가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종이 비행기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색종이를 오리는 것도 좋아했다. 달력의 뒷면이나 신문지에 크레파스로 황칠을 하는 것도 좋아했던
일이다. 재미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비행기가 좋았던 것이고, 알록달록 색이 좋았던 것이고, 크레파스가 좋았던 것이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꼬마 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깨끗한 면이 있는 종이를 잔뜩 모아주셨고, 철부지 꼬맹이는 정체불명의 그림을 그려댔다. 아무도 조용히
쓰임당하는(?) 종이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런 것이었을까?
인간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로부터 출발한다고 배웠다. 오래된 동굴의 벽화나 너른 들판에 그려진 그림, 왕의 무덤 벽화..그 모든 기록들이
지구 곳곳에 산재해있다. 그곳에서부터 인간의 기원과 삶의 역사를 부지런히들 찾아냈다. 그렇지만, 종이가 없었다면 그 모든 기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고 훼손된것을 복원하느라 우리는 아직도 서로의 역사를 궁금해하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종이의 발명과 전파는 인류가 인류로서의 품격을 지니게 만든 가장 큰 사건인 것이다.
목차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종이의 위대함? 혹은 다변성?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다
1. 종이의 제작 2. 종이와 나무 3.종이와 지도 4.종이와 책 5. 종이와 돈 6. 종이와 광고 7. 종이와 건축 8.
종이와 예술 9. 종이와 장난감 10. 종이와 종이접기 11. 종이와 정치 12. 종이와 영화 그리고 그 밖의 것들.
목차의 12번..그리고 그 밖의 것들..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한 종이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퍼져 있는 종이들의 수고와 업적, 그리고 누명에 가까운 경멸을 우리는 수시로 보고 있지 않은가.
종이가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IT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편지지와의 이별을 예감했고, 종이책과의 결별을 예감했으나, 종이의
활용은 더없이 많아져 버렸다. 어느 곳에서든 누구든 출력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어쨌든 책의 내용들은 너무나 다채롭다. 인류학적 고찰과 발명의 역사, 정치사에 이르기까지 종이가 끼어들었던 모든 틈새에 대한 이야기를
내어놓는다.
아주 친밀한 친구의 비밀을 뒤늦게 전해 듣는 기분? 그런 기분이라면 맞을까?
#2. 에미넴과 종이
힙합 악동 에미넴이 우리 나라에 공연을 왔었다. 음악성보다는 무례함으로 더욱 유명한 가수의 공연. 분출하지 못하는 응어리를 가슴에 담아둔
사람들은 그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무례함은 팬에 대한 감사따윈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모두 다 숙지할 만큼
대단하고 유명했다. 그의 노래 중 airplane 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그의 랩이 시작되기 전 불려지는 사비부분의 서정성은 그의 랩을 극대화
시키기에 적절하다. 팬들은 그의 노래가 시작되고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공중으로 무수히 날아오른 종이비행기..무대 위로도 떨어지고 사람들의 머리
위에도 떨어졌다. 장관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종이에 실려 공간을 가득채운 순간이었다. 그의 노래와 퍼포먼스보다 압도적이었던 종이의 위용!
무례함의 대명사였던 그가 머리 위로 커다란 하트를 만들어보인다. 유례없던 일이다. 물론 모든 것을 떼창으로 화답해준 놀라운 팬심에 그가
감동했을지도 모르겠지만..그의 공연 중 압권은 종이비행기였다.
"비행기" 가 아니라 "종이" 비행기였다는 것.
# 3. 연인과 종이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사람들은 댓글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거나 좀 더 친밀하게는 쪽지를 보내거나 좀 더 진지하게는 이메일을 쓴다.
동영상이 편집되기도 하고, 사진이 들어가기도 하고, 그래픽이 첨가되기도 하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것들을 서로 교환한다.
어느 날, 문득 고지서로 넘쳐나던 우체통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꼭꼭 눌러 쓴 흔적이 역력한 글을 읽으며 울컥해졌다. 종이에서 그 사람의 목소리와 체온이 느껴지는 것이다.
서툴게 그린 그림과 색색으로 덧칠한 시 한 편까지..
나는 그에게 편지를 받았다고 편지 봉투를 사진으로 찍어 전송했다.
그리고 나서 화들짝 놀라 다시 미안하다는 사과의 문자를 보냈다.
그 날 오후 나는 그에게 답장을 썼다. 답장을 쓰면서 온마음이 들어가는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명필이 아니어도 좋을, 솜씨좋은 화공이
아니어서 더더욱 좋을 그런 어눌하고 서툰 편지에 오롯이 마음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우체국까지 한참을 걸어가 옆에 놓인 물풀 대신 침을 발라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편지를 담고 콩콩 거리면서
뛰어가 전할 것도 아닌데 한참 동안 우체통을 쓰다듬었다.
돌아오는 길에 몇가지 단상이 떠올라 주었다. 서툰 글씨로 적어 내 가방에 넣어주었던 어떤 이의 쪽지, 매일처럼 우체통을 살피게 했던
사랑하는 이의 편지, 죽어도 헤어지지 말자던 친구와 함께 쓰던 일기장..
그것들이 아직도 오롯이 남아있는 건 종이 위에 적힌 약속들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간직하고 보관할 수 있던건..추억과 기억과 사랑을 보관하는 종이의 역할은 참으로 지대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그렇게 종이 위에 조금씩 그림을 그려가곤 했다.
#4.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책의 부제일 것이다. "페이퍼 엘레지" 왜 하필 엘레지 일까? 블루스도 발라드도 재즈도 아닌 엘레지여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종이의 쓰임은 여전히 다양하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다양화 다각화 되어질 것이 분명하다.
종이로 집을 짓기도 하고, 옷을 짓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에 따라 종이도 다양하게 변신하고 있다. 젖지 않는 종이, 불타지 않는
종이..기타 등등..
문제는 이 많은 종이들이 나무들의 목숨과 맞바꿈되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대체제들이 개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상당량이
나무들에게서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나무들이 이렇게 소모되어도 좋은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절박해지는 지점이다. 나무들이 지켜내야 할 지구의 생명들이 있으니 말이다.
종이의 발달이 인간의 문명과 문화와 역사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그와 더불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는지도 모를일이다.
숨통을 내어놓고 편리를 맞바꾼 것은 아니었을까?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비밀을 엿본 댓가를 지불하라는 준엄한 요구를 들은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설움에 겨운 엘레지여야 했던 것일까?
소중하고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이대로 이어질 수 만은 없을 수도 있다는 설운 노래인 것 처럼..?
#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종이를 쓸 것이고, 종이와 살아갈 것이다.
종이에 쓸 것이고, 종이에 쓰인 것을 읽으면서 말이다.
대체제의 개발이 소비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종이 비행기를 접어 바다에 날리는 사치스러운(?) 내 놀이를 당분간은 계속할
것 같다.
종이의 문화사.
요즘은 쉽게 쓰는 것이 대세인가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렵지 않게 읽혀지는 것인 좋았다. 종이의 일생(?)을 담은 대하소설을
읽어낸 느낌이다.
문득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문득 노란 종이배도 만들고 싶어졌다.
문득 종이가 애틋해졌다.


겉표지를 벗겨보니 우표의 뒷면같은 표지가 나온다. 편지를 써야겠다.
종이가 종이를 종이에게 종이를 이용해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종이의 시대가 정점에 달한 것이다. (p43)
종이는 모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궁극의 맥거핀이다.
"인쇄공, 디자이너, 비서, 식자공, 평론가, 작가, 사환, 잉크와 제책 장인, 삽화가, 서문 저자, 비평가들의 덕분에 인쇄된 단어가 강렬하고 집요한 희망을 지닐지라도, 종이는 유기적 물건이라서 길가의 소나무처럼 언젠가는 소리 없이, 파멸을 일으키는 붕괴 속에서 바다의 아귀에 잠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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