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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폴링 인 폴. Falling in Paul. 폴에게 빠지다. Fall이 아니었다. 한글로 된 제목을 들으며 상상했던 이야기는 없었다.
오랜 추억을 더듬는다거나, 혹은 애틋하기만 한 연인들의 이야기려니 했던 기대는 무너진다.
표제작인 폴링 인 폴은 교포 청년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이야기다.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일까.
뒷 표지에 쓰인 이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이 관계의 시작점이다.
"도대체" 폴과 나의 모호한 관계에서 바라고 원했던 것이 사랑이었던 것인가에 대한 모호함이다.
"어쩌다가"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시작된 관계의 방향과 운동성에 대한 의심인 것이다.
"폴에게" 미국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나 한국적인(p78) 폴에게
"빠져" 버린 것이다. <한국말도 사랑에 빠지다. 이렇게 말하는 거라면서요. 영어도 falling in love 인데.(p73)>
#2.
사랑이 가능하게 하는, 즉 사랑에 빠지게 하는 싱크홀은 무엇일까? 도대체 어쩌다가 빠져버렸는지 알 수 없는 추락은 무엇이 붕괴되어야 시작되는 것일까?
빠진다는 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단단한 바닥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한 빠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리적으로 말이다. 폴에게 빠진 '나'는 무엇을 붕괴시켜버린 것일까? 폴과 나 사이에 있어야 했던 무엇을 부쉈던 것일까.
백수린의 글들이 차곡차곡 꼬리를 물고 나온다. 아홉개의 글이 뿜어내는 향은 매캐하다. 잊고 있던 것들을 깨우기 좋은 그래서 눈물을 뚝뚝 흘려도 적당한 변명을 제공할 만큼 친절하다.
서로의 언어로 서로를 설명하며 다가선 만큼 되돌아 걷는 글들이 아프다. 어째서 나의 언어와 너의 언어는 이렇게 달라야 하는지..내가 기억하는 의미와 평가되는 서로 다른 말들의 오해는 얼마나 날카로운 상처를 내는지 자꾸만 입술을 축이게 된다. 저절로 앙다물어지는 입술. 말이 말을 삼키게 하는 글을 읽다 놓쳐버린다. 다시 한 글자씩 손끝으로 그 모양을 잡아가며 읽어본다.
해체되어도 살아나는 표독스런 생명력을 어떻게 감당해 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감자의 실종)
망가뜨리는 것보다 좋은 건 묶어버리는 거야. 동질감을 갖고 있던 사람에게 어느날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은 질투로 발화된다. 내게 없는 그것이 왜 안나에게만 있는 것인지. 어쩌면 처음부터 내 몫이었을지도 모를 것들에 끼어든 존재를 좋아할 수는 없다. 추론은 상상과 추측과 집착으로 점점 더 견고해지고 단단한 이론이 된다. 단단해 진 논리는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는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공범이 있다면 더더욱 힘이 나지 않겠는가. 겨우 셋이 한 지붕을 이고 살면서도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본다. 서로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믿고 의심한다. 자전거 탓이라고 핑계를 대보지만..그래서 자전거를 망가뜨려버리려 하지만..쉽지 않다.
내것이 될 수 없다면 망가뜨려버리겠다는 치기는 차라리 묶어두는 것으로 가닥을 잡는다.
깨버릴 수 없는 것들은 때때로 묶어버리면 되겠다. 거기서 한 발자욱도 나오지 못하게 말이다.
가끔 무언가 용서를 하고 잊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 내용을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고 다만 어딘가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묶어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전거 도둑)
모든 이야기들은 관계의 이야기다. 뻔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파장을 일으킨다는 건 신선하다.
작가의 색이 있다. 황정은에게 기대하는 색, 김사과에게 기대하는 색, 기준영에게 기대하는 색..그런 모종의 틀이 있다.
작가의 창의성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독창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떤 질감 같은..황정은의 날것같지만 곰삭은 묘한 이야기. 김사과의 입체적이야기..기준영의 디테일한 숨결, 이런 것들은 이 젊은 작가들의 '결'이다.
#3.
백수린의 결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린"이라는 말 때문일지 나는 가지런한 잉어의 비늘들을 떠올린다.
그래, 가지런하게 놓여진 질서 정연한 이야기의 씨앗을 잘 품어 내놓은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나의 말과 너의 말이 얽히는 지점을 잡아내어 서로의 말을 찾아준다.
가지런한 이야기여야 가능하다. 얽혀버린 관계와 말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잡다한 장치들과 과한 치장을 내려놓는다.
"나는 말을 마쳤다. 오랜만에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나는 천천히 관찰했다. 내 말이 가 닿았는지 부인은 다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아들었을리가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p191)
"당신이 귀를 닫고 소란한 침묵 속으로 숨어들 때까지도 아무런 기미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 온전히 다 내탓인 것만 같았다. 기억 속에서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하는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뻐끔거리는 입 모양만 보일 뿐 당신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조차 텅 비어 있었다."(p235)
말들은 늘 길을 잃는다. 처음 의도한 방향을 찾아 제대로 가서 꽂히는 일이 거의 없다. 대충 비슷한 곳에 떨어져 내려는 것만 해도 안도할 만큼, 그렇게 말들은 방향을 잡지 못한다. 혀과 입술이 만들어 준 소리가 되는 순간 말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내 의지와 무관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위험하다면 차라리 입을 닫아버려야 하는가?
백수린의 글은 그런 것을 그대로 놓아두라고 한다. 굳이 파헤치지 말고 길을 잃은 말들의 처음을 찾아주라고, 그 처음에 가려던 곳의 좌표가 놓여있을거라고 말한다.
상대의 입술을 떠난 말의 길을 내 뜻대로 조종하는 일도 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이 낯설고 무례함 없이 단호한 글들이 좋았다.
백수린의 결은 차분하게 누운 빛나는 비늘이다. 그 곁에 따라 누워 이야기가 되어주지 못해도, 이야기에 반사되는 영롱한 다른 빛을 감상할 수 있다면 참 멋진 일이겠다 싶어졌다.
깊이 감추지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지도 않고 적당히 꺼내어 조용히 빛나는 이야기들이 여기 있었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사람들은..설렌다고도 했고, 아리다고도 했다.
나는 사뭇 덤덤하게 읽어낸다. 이입이 된건지,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던건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렇게 신선하고 가지런한 신인작가가 있다는 것에 한껏 기대가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이야기의 폭이 넓었으면 좋았을까?
조금 더 깊이 찔러도 좋을뻔 했어.
조금 더 절망적이었어도 괜찮았을거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이제 갓 기지개를 켠, 작가라는 사실이 아쉬움을 대체할 기대를 그 자리에 놓아둔다.
백수린의 결로 빛나게 될 다음 작품들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