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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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곡과 규명으로 얼룩진 현대사를 가장 세심하게 살펴보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흐름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중심에 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어진 역사. 역사란 그렇게 봐야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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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가 끝난 뒤
함정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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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김소진의 기일에 함정임을 마저 읽었다.

너무 일찍 떠나보낸 김소진을 11월이면 김현식과 유재하를 기억하듯, 4월의 명치께에서 더듬게 된다.

김지원,김채원 자매의 글들이 같은 DNA에서 다르게 발현된 것들이라면, 김소진과 함정임의 글은 전혀 다른 DNA에서 만들어내는 변주이자 합주일 것이다.

 

소설 쓰기란 추모의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세상 어느 한 곳 어느 하나

 

불러보고 싶은 이름들이 있다. -작가의 말

표지를 넘기고 제일 처음 만난 작가의 말이 저릿하게 다가앉는 이유가 이것이었을까?

 

기억의 고고학 - 내 멕시코 삼촌

저녁식사가 끝난 뒤

그는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떤 여름

오후의 기별

구두의 기원

밤의 관조

꽃 핀 언덕.

 

여덟개의 글들이 저마다 다른 색으로 다른 톤으로 걸어오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유난히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던 작품들..떠나버리거나 떠나는 중이거나 떠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스민 볕이 산란하듯 조금씩 내려앉는다.

춘아 이모와 멕시코 삼촌, 빨간 아코디언을 두고 더듬는 기억과 존재의 의미, 떠난것에 대한 그리움은 화석처럼 남은 기억만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진행중인 있던 것들의 떠남.

서로 다른 추모의 방식으로 저녁 식탁을 만든 사람들,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는 남자 무일, 가장 행복한 순간을 앞두고 떠난 남자의 자욱을 찾아 나선 그 길..

 

모든 이야기의 공간은 세계적이라 할 만큼 다양하다. 이렇게 많은 지역들을 순례하며 온몸으로 부딪고 숨쉬며 써낸 글들이라니..

 

상실과 추모.

두 단어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낯선 것들을 끌어들여 그 속에서 낯익은 상실을 찾아내게 하는 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잃을 수는 있으나 잊을 수는 없는 이야기들이, 단호하게 잊었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파고드는 그리움의 잔해를 헤쳐가는 이야기가 조용한 스펙타클이라는 모순적 상황을 끌어오게 한다. 결국 잊었다는 선언은 할 수 없다.

추모한다는 것은 그리움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더 이상의 상실이 아닌 건강한 변양태로 작용하게 된다.

발목을 꺾는 그리움이 기대어 쉴 어깨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기억을 지우고, 기록을 지우는 것으로 1차적 상실의 마침표를 찍지만(어떤 여름, 구두의 기원)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재확인 되며 (기억의 고고학) 저마다의 방식으로 추모되어질 것이다.(저녁 식사가 끝난 뒤, 밤의 관조)

 

수없이 떠나고 또 떠나는 '노마드'의 삶을 살아내는 작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함정임의 소설은 어쩌면 세계와의 부단한 만남을 통해 우리에게 모든 것의 중심에 상실이 있다는 치명적인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이야기가 펼쳐내는 노마드적 상상력은 그 자리에서 부동하는 상실의 흔적에 대항하는 삶의 몸짓이며 불가항력의 침묵을 파고드는 수다한 소리의 습격일 것이다. -p206 이소연의 해설 중

 

저항하지 않는 저항.

떠남으로써 지켜내는 추모의 형식을 존중하고 싶어진다.

김소진을 잃은 아쉬움을 함정임에게 비할까마는, 그의 부재가 아니었다면 훌륭한 이중주를 오래 들었겠구나 싶어진다.

 

책을 덮은 이후로도 자꾸만 입속에서 웅얼거리는..인디안 인형처럼..워워워워워~~

어느 낯선 지역 인디언들 사이, 원주민인양 끼어 앉아 이야기를 고를 그녀의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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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히스테리를 겪고 있다.

슬슬 시작되었던 불만과 불안은 세월호 사건으로 증폭되며 가시화되고 있다.

다른 어떤 말로도 해명도 변명도 안되는 것이 바로 세월호다. 다양한 페러디와 다양한 목소리들의 나오고 있지만..

분명한 건.

"무능한 정부"다.

1주기 집회를 보면서 경악했다.

국민들을 시민들을 상처입은 사람들을 그리 막 대할 수 있다는 것에 말이다.

 

싸움을 하다보면 그런 일이 있다.

뭔가 꿀리는 놈이, 즉 잘못한 놈이 명분을 찾기 위해서 하는 비겁하고 치졸한 짓 중 하나가 자극하는 것이다.

때릴테면 때려라 하는 식으로 이죽대며 화를 돋구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한 대 맞고 나면..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팩트는 이것이다. 내가 맞았다. 폭력은 안된다'하는 식으로 썰을 풀고 다니는거다.

그러니 그런 얕은 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평정심을 가져야하겠으나..

이게 평정심이 갖아지는 일이냔 말이다.

이 상황에 평벙심을 가질 수 있다면..그건 분명히 사이코패스다.

즐비하게 늘어선 경찰차들이 시민들과 유족을 분리시키고 최루액을 쏘아대고, 경찰이 실신했다고 소리치고, 언론은 슬쩍 비추고 맞았네~소리만 하고 있다.

 

광주때도, 용산때도, 한진때도, 얼마전 쌍차때도..언론은 썩어가는 입술과 냄새나는 혀를 놀리는데 급급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1인 미디어가 되어 알리기 시작했고,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당하고만 있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게 어떤 이의 히스테리에서 시작된것이라면..

정치를 자국민의 이익과 자국의 안보와 자국의 복지에 그 뿌리를 두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고 개인의 만족을 위해 하고 있다면..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아침에 딸아이와 통화를 했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응..엄마..왜? 무슨 일 있어?"라고 되묻는 목소리가 고마워서 한참 대답을 못했다.

이 아이가 없다면, 이 아이를 빼앗겨버린다면 어떨 것인가..

문득 생각조차도 하지 말자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잠시 생각이 스쳐간 것임에도 손이 떨이고 입술이 떨리고..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간신히 "아니, 그냥 전화 받아줘서 고마워"라는 쌩뚱맞은 답변을 했다.

이내 눈치를 챈 딸아이가 "세월호때문에 그러지? 나도 어디 안갈께. 엄마도 어디 가지마!"라고 어미 마음을 헤아린다.

 

자..상상만으로도 목이 메이는 상황을 수백의 어미들이, 아비와 형제와 이웃들이 당했다.

그들이 이렇게 점잖은 건, 그것이 혹시나 놓친 아이들에게 해가 될까 걱정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성적인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미쳐돌아갔어도 골백번은 미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이들이라서 말이다.

딸아이를 화장장에 보내는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차라리 울으라고 속에 쌓지 말고 울어버리라고 다그치는 지인의 말도 귓등으로 들어넘기며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 마음엔 혹여 울고 있는 어미때문에 가슴아파할 딸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참혹함을 만나는 나날이 지겹다고, 그만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하고 싶다.

그만해야 한다.

진실을 규명하면 된다. 그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온 국민을 히스테리 상태로 몰아넣으면서도 유유자적하는 것이 호연지기인가?

 

이 와중에..스포츠 스타와 여자 아이돌의 열애기사가 실검 1,2위를 차지했다.

젠장..제대로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는 날이다.

 

  

 

 

  지젝을 아무리 읽어도 똘똘해지지 않는다. 나는 그냥 짐승인가보다.

 히스테릭 애니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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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시몬느 베이유가 떠올랐다.

지난 달엔 로쟈 룩셈부르그를 떠올렸었다.

까맣고 긴 코트에 담뱃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로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냥 떠올렸다는 것이다. 어떤 강렬한 신념같은 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장악되고 압도 당하고 싶었는지도 모를일이다. 판단은 했는데 확신이 없는..그런..애매함이 싫었나보다.

 

며칠 전 읽었던 단편 때문일까?

시몬느 베이유라고 부르던 이름을 '시몬 베유'라고 적어둔 책에서 열어서는 안되는 뜨겁게 달구어진 뚜껑을 생각없이 잡은 것처럼 모골이 송연해졌다.

젊은 시간에 한번 쯤은 그녀에게 압도 된 싯점이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누구라도..

 

 

 

 

 

 

 

 

 

 

 

 

 

 

 

 

 

존 레논과 자니스 죠플린을 합성해 놓은 것같은 외모..(내 생각일 뿐..)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그 뜨거움을 다시 만져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제발..긴장감 있게 살아보자고.

조금은 더 진지하거나 치열해도 괜찮지 않냐고..자신을 윽박지르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옛 애인이 떠올라 눈물로 고해성사를 하며 한번만 다시 사랑해달라고 애걸하는 모습같이 찌질하게 보이겠지만 말이다.

내 젊은 시간을 장악했던 그 녀가..문득 떠올라 지워지지 않는다.

책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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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그랬으면 좋았겠지만) 말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혹은 말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말해지기 위해서는 말한 것이 '있어야'하고 '있는' 것을 '안다'고 해서 다 말해지는 것은 아니다. 있고 있는 것을 앎에도 어떤 것은 말해 질 수 없거나 말하지 않기로 결정됨으로써 말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말해지지 않은 것들은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제든 말해질 수 있는 상태로 웅크리고 있다. 그것들은 말해지지 않음으로써 '있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p195)

 

창작과비평 2015년 봄호.

이승우 "신의 말을 듣다" 중에서..

 

 

미로처럼 꼬인 말들임에도 적당히 눙치는 기색 없이 단단하다.

이렇게 단단한 문장을 뿜어내는 작가는 전생에 아라크네였을까?

 

잘 직조된 글을 만나는 건, 잘 만든 수공예품을 만난 것처럼 미소짓게 된다.

따라해봐야지 마음은 먹지만..절대로 닮지도 않은 어떤 것을 만드는데 그칠지라도 한 번쯤은 시도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라크네의 거미줄에 미끼로 매달리게 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다양한 계간지들을 만나는 건 늘 설레인다. 외박나온 애인을 만나는 것 처럼..

 

 

 

 

 

 

 

 

 

 

 

 

 

 

 

 

내가 보는 건 이게 전부지만..애인을 늘려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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