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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그녀
부다데바 보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1. 사리 속의 그녀들..
파란 사리(sari)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살짝 돌린 옆 얼굴.
표지를 한동안 들여다 보았다. 이제는 그 앞
모습보다 아련한 옆모습으로 기억될 사랑의 이야기인가?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차역. 기차를 기다리는 네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지기엔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추운 겨울의 대합실.
네 남자의 그녀들이 소환되기 시작한다. 그
아픈 이야기들 속 그녀들을 떠올리는 순간, 남자들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던 시간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계급의 문제, 관계의 문제,
시간의 문제..사랑의 시작은 명확한 이유가 없듯, 그 끝도 명확하진 않다.
다만, 그것이 이유였으리라 명분을 실어주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마칸랄,가간 바란,아바니,비카시..인도적인, 너무나도 인도적인(인도에서 대중적인 이름인지 알 수
없으나..) 이름을 가진 남자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이름이 거론 될 때마다 인도의
문화와 삶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출처: 인도여성의 전통의상, 사리에 담긴 비밀|작성자 우쓰라>
파란 사리의 여인이 눈에 밟혔다. 어쩌면 떠나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지도 모를 그녀들이
말이다.
자꾸만 내 시선을 끌어당기는 파란 사리의 그녀들 때문에 사실, 사내들의 애닲은 사연은 싱겁기까지 했다.
사나이 순정을 들먹인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놓지 않은 그 가운데는 '부다데바 보스'라는 작가의 힘이 있었다. 노래하듯,
시를 읊듯 이어지는 부드러운 인도의 소나타같은 글은 시선을 잡아두기 충분했다.
물론, 딴생각에 빠지게도 했지만 말이다.
#2. 딴생각 1.
내 인생의 그녀.
자꾸만 그녀들이 궁금해지며..나는 문득 시 하나를 떠올렸다.
<물레 감는 그레첸*> - 박은정 /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중에서
밤을 감아요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시간들을 엮어 국적을
만들어요 기시감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국적은 발자국이 없
어도 통행이 가능한 나라, 어지러운 예감들이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나라
이름도 땅도 사라진 현명한 나라에서 당신의 타로카드는
광대, 절제, 심판, 물레는 하얀 목덜미를 침묵의 알리바이로
만들고, 가닥의 암호들로 물레를 돌리면 세상은 거미줄 아
래로 구름은 새들의 부리 속으로
시력을 잃은 밤처럼 서로의 몸을 핥아요 당신은 눈만 남은
밀랍입형, 마지막 카드를 버릴 때 우리의 행방은 운명의 수
레바퀴, 은둔자, 달의 몰락, 일생을 짜던 물레는 멈추고 당
신의 국적은 만삭의 죽음도 헐거워지는 곳
오늘은 몇 광년의 겨울이 연명되는 노래, 실타래는 끊어
질 운명처럼 흘러내리고 우리는 수행할 수 없는 작전의 비
밀요원, 당신이라는 오명을 푸는 암호는 총부리를 물고 웃
는 그레첸 - 완벽한 거울의 표정으로.
* 괴테의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만든 슈베르트 가곡.
운명으로 닥치는 사랑을 거부할 수 없듯, 떠나는 사랑에게도 최선을 다해 이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냉정할까?
평생 물레를 감으면서도 "sein Kuss(그의 키스)"라고 외치는
그레첸의 그 열정과 사랑을 그 극한의 그리움을 곱씹게 된다.
#3. 딴생각 2 -그리고 밑줄.
내 인생의 그녀..
혹시나, 살을 에는 어느 겨울 날, 어찌할 수 없이 모여 앉은 기차 대합실에서.."멀지 않은 그 때,
그녀를 만났어요. 제 인생의 그녀.."라고 운을 떼는 어느 자유로운 남자의 입술에 내 이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의 인생의 그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생의 그"는 누구일까를 생각해 본다. 고즈넉한 어느 밤에 그 이야기를 들려줄 어떤 이가 있어도
좋겠다. 열차 대합실 같은..그런 곳에서 우연히 마주칠 그런..
"아직 날이 어스름해서 젊은 부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작가는 알았다. 잠든 동안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잠든 동안에도 두 사람은 서로가 곁에 있어
충만하다는 것을.(P173)"
-결혼을 하건 안하건, 곁에 있어 충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일까?
"그녀의 손이 스탠드에 닿자 순간 다른 세상으로 들어선 것만 같았습니다. 검푸른 달빛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제 방은 더이상 제 방이 아니었죠. 그녀의 파란색 사리가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고,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눈에선 빛이 나고 입술은
달빛으로 물들었어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기다란 팔로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저를 꼭
껴안았죠.(P72)"
-사랑에 달떠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작은 숨소리까지 또렷하게 기억되는 풍경.
사랑하는 이와 같이 있는 그 시간은 상대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갯수마저도 또렷할지도 모른다. 얼버무릴 수 없는 순간이..내겐
있었나?
# 4. 별책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