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여행
크리스토퍼 듀드니 지음, 연진희 외 옮김 / 예원미디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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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까지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 온 내게 밤이 주는 의미는 그다지 크지 않다. 잠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오후 10시가 지날 무렵이면 슬슬 졸음이 오고, 깨어있으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스르르 감기는 눈을 억제할 수 없다. 때론 재밌는 책에 빠져 밤을 지샐 때도 있고,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칠 때도 있지만, 나를 둘러싼 밤의 대부분의 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만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절반의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잔다. 밤은 낮을 준비하기 위한 신체적 충전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 하지만 인생의 절반을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력하게 지나가게 하기엔 아쉬운 점이 많다. 작가 듀드니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매일 무의식적으로 넘기는 밤의 세계를 여러 방면으로 소개한다. 해가 서서히 질 무렵인 오후 6시부터 해가 뜨기 시작하는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시간 단위로 펼쳐지는 밤의 무대는 우리가 미쳐 인식하지 못했던 아름답고 신비한 또 다른 세계였다. 
 

이 책은 일몰에서부터 오로라, 극광, 별 달 등 단순히 밤을 묘사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넘어서 신화, 역사, 과학, 의학, 문화, 사회, 심리학 등 밤에 대한 폭넓은 분야를 모두 아우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신화와 과학적으로 분석한 밤의 기원, 각종 야행성 동물과 곤충들, 바닷속의 발광생물들, 밤에 어린이들을 잠들게 하기 위한 아동문학들, 불야성, 나이트클럽의 환상적인 밤문화, 세계 각국의 밤축제, 생득적 체내 시계, 꿈 등의 인체의 밤에 대한 원초적 감각, 흡혈귀, 늑대인간 등 밤의 불청객(?), 밤하늘에 대한 신화화 과학, 어둠을 찬미한 음악과 미술 ....등등 펼쳐진 이야기를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우아~'라고 절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흥미있고 광범위하다. 하지만 이런 감탄사는 단순히 백과사전적 지식을 습득하였다는 쾌감에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밤에 대한 지식의 나열을 넘어서 작가의 사색과 경험 그리고 나름의 철학을 담고 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작가는 친근하고 서정적으로 그리고 때론 시처럼 감미롭게 들려준다. 때문에 작가가 일몰의 풍경을 묘사할 때, 별을 이야기할 때, 야상곡과 미술 작품을 이야기할 때, 나의 어렴풋한 기억을 끄집어 떠올릴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눈 아래 펼쳐진 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분홍빛 일몰, 학생시절 운동장에 누워 바라보던 밤하늘, 늦은 밤 도서관 앞 벤츠에 앉아 듣던 풀벌레 소리, 남산 아래에서 내려다 보던 서울의 야경, 친구와 싸돌아다니던 북적대는 밤거리, 낯선 바닷가에서 새벽녘 술취해 미친듯이 소리지르며 밤하늘을 향해 터트렸던 폭죽......
 

또 밤이면 더욱 특별해지는 것들도 있다. 밤에 더 맛있는 라면맛, 자기 전에 들이키는 캔맥주, 밤에 들어야 더 감미로운 피아노 음악, 밤에 불끄고 봐야 더 실감나는 일애니, 야근시간에 해야 더 잘풀리는 업무....무심코 내 기억 속에 큰 의미 없이 지나칠 뻔 했던 기억들이 시처럼 하나둘씩 떠올랐다.

물론 밤의 이미지가 이렇게 낭만적이고 즐거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밤에 일하는 사람들, 수면장애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어둠을 틈타 행해지는 악행과 범죄들도 많다. 또, 작가는 빛공해, 환경 오염 등 진정한 밤의 의미를 훼손하는 현대의 과학의 양면성을 아쉽게 토로하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밤이 주는 여러가지 의미와 다양한 지식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한한 시공간의 한 지점 이곳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과 누구에게든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중요한 것은 그 시공간 속에서 어떤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의 차이에 따라 삶의 색깔과 질이 달라질 수 있다. 작가는 밤을 이야기하며,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제시해 준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잃어버렸던(?) 내 인생의 반이 갑자기 새로와졌다거나, 밤이 갑자기 특별하게 느껴진다 하는 것은 지나친 감정의 증폭(?)일 것이다. 하지만 무심코 흘려들었던 한밤중의 풀벌레 소리와  무심코 바라보던 내방 창문의 달빛이 조금은 더 친숙해질 것 같긴 하다. 또 내가 잠을 자고 있는 순간에도 세상은 활동하고, 계속해서 창조되고 있으며, 그런 밤을 보내고 오는 내일은 오늘과는 분명히 다른 하루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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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3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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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시리즈 마지막 권까지 드디어 다 읽었다. 장장 4개월이 넘게 걸렸다..ㅋ 1권을 읽은 후 2권을 집어들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대개 시리즈물을 이렇게 오래 끌면 내 성격상 금새 때려치기 쉽상인데, 이 책만큼은 끈질기게 손을 놓지 않아 이렇게 끝을 본다. 내심 뿌듯한 마음에 사설이 좀 길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만해도 세권을 다 읽으면 미학에 '미'자는 알 수 있겠지란 기대감으로 읽었었는데, 사실 책 세권을 다 읽은 지금도 '미학'이 모호할 뿐이다. 이 책이 미학과 예술의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서적인 책이라곤 하지만, 워낙 내용도 방대하고, 수많은 철학자들의 미학 이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내겐 너무 숨이 가빴다. 미학에 대한 어떤 체계적인 정리를 기대했던 나의 머릿속은 오히러 더 복잡해지고 모호해졌다. 하지만 '미학'이란 학문 자체가 이런 모호성을 띠고 있는 것 같기에 내 느낌에 크게 좌절하지는 않는다. 또한 오랫동안 음악과 미술을 조금씩이지만 즐겨왔기에 내 자신이 예술에 대해 그리 문외한은 아닐꺼라는 자부심도 있다.

이 세권의 책으로 내가 얻은 것이 있다면, 예술이 즐겁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자체 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았다. 예술이 현상의 재현이든, 아니든 또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의 철학적 논쟁들은 내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현재 내가 그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아무리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도 내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으면 나는 예술을 즐길 수가 없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난 예술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현대 추상 작품들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럼 3권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본다. 1,2권 때도 그랬지만, 이 책을 정리하기란 내용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내가 인상깊게 본 몇가지 작품 정도만 간단히 뽑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3권은 피라네시를 중심으로 탈근대 미학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 1720~1778)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판화가로 고대 그리스를 예술의 전범으로 삼던 시절에 고대 로마 유적들을 동판에 담아 로마 건축의 위대함을 알게 해준 사람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지어질 수 없는 상상의 건물의 작품은 예술적 '모던'을 예감하였고, 당대는 물론이고 현대 저자와 예술가들의 상상력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진중권씨는 18세기 피라네시의 예술사조를 탈근대 미학과 연결지어 '근대적 인식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라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또한 보르헤스의 발언과 문학을 인용하여 피라네시의 그림을 설명하고, 탈근대 미학의 여러 가지 논점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 낸다. 어떻게 보면 피라네시보다 보르헤스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 같다. 또한 3권에서는 1,2권의 플라톤 대신 새로운 인물 디오게네스가 등장하여 내게 큰 웃음을 주었다.

그럼 근대적 인식 세계와 예술을 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몇가지 그림을 소개해 본다. 

사회가 변화하고 근대화됨에 따라 인간의 지각(知覺)도 변화하고, 변화된 지각은 예술의 지평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사물의 본질과 대상은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존재하지 않는다. 모네는 세계의 동일성을 물그림자 같은 환영들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했고, 말레비치는 캔버스 위에서 대상들의 재현을 사라지게 했다.<모네, 수련>
반면 말레비치는 화면에서 가시적인 대상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비대칭적 세계' 즉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예술을 표현했다. <검은 사각형, 말레비치> <절대주의, 말레비치>
근대 예술이 추상적인 이유는 인간들의 관계가 추상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또 세상이 추해지면 예술 또한 추하게 변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의 시대는 지났다. 근대 예술은 사회를 재현하지 않고도 그 사회의 고통을 미메시스한다. <키스, 피카소>
미를 포기하고 의식적으로 숭고(崇高)의 효과를 표현한다. 과거의 예술이 유한한 대상의 미를 재현했다면 현대, 예술은 무한한 대상의 숭고를 현시하려 한다.<하나 성, 뉴먼>
시각과 청각으로 아름다운 예술만을 추구하던 것이 현대로 오면서 지각에서 감각으로, 시각에서 촉각으로, 기관없는 신체...에서 공감각까지 이르게 된다. 베이컨의 회화는 지각이 아니라 감각을 표현한다. 가시적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를 가시화한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의 습작, 베이컨>
근대 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했다. 거기서 이성을 빼면? 감각이 남는다. 감각의 주체로서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다. 짐승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진화의 순서를 거스르는 퇴행이 아니라 '창조적이며 동시적인 역행'이다. <헨리에테 모라에스의 초상을 위한 습작, 베이컨>
근대 예술에는 '우연'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그리하여 화가 자신도 그림을 시작하는 순간에 그 작품이 마지막에 어떤 형태로 실현될 지 예측할 수 없다. 또한 몬드리안의 추상과 같은 '필연'의 예술도 있다. <숲, 에른스트>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인물의 고전 예술에 익숙해진 내 눈은 이런 작품들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저것도 작품이냐? 저것도 예술이야?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위에 소개한 작품들은 비교적 그림같은 작품들이다. 물감을 뿌리고, 캔버스를 찢고, 몸에 페인트를 칠하고, 피아노를 부수고, 죽은 동물을 포르말린에 집어넣고, 사용한 생리대를 말려 전시하고, 에이즈 환자가 몸에 상처를 내 피를 튀기고.... 2백년 전 헤겔은 '예술의 종언'을 얘기했다고 한다. 글쎄...현대 예술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나 또한 모르겠다. 과거엔 예술과 현실이 엄격이 구별되었다지만 현대는 두 세계의 구별이 없어졌다 한다. 그래서 화장실 변기통이 그대로 작품으로 전시될 수 있는 시대다. 미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다 보니 어느 새 가치의 황홀경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예술의 본질을 따져나가다 보니 '현대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으로 다시 예술의 의미를 묻는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다. 게다가 현실세계의 가치, 실제와 가상 모든 것이 더 헷갈리게 되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것저것 골치아프게 따지지말고 예술을 즐기자는 것이 내 생각이자,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 책 세권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이다. 예술이 무엇이든간에 예술이 짜증나지 않게 몸으로 그리고 감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지식과 안목만 얻어오면 된다. 어디서?? 일단 젤 쉬운게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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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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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침대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의 제목이 좀 그렇다.;; <살인본능><잘린 머리에게 물어봐><피로 물든 방><교수대 위의 까치>..이다.  사실 지금 읽고 있거나 최근에 읽었던 책들로 책 제목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았는데, 우연히 내 방에 들어온 동생이 "뭔 책 제목들이 이래? 그렇자나도 가위 잘 눌리는 애가 이런 책들 옆에 쌓아 두고 자면 잠자리가 편안하디?" 라며 물어온다. 그 중 단연 압권(?)은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일 것이다. (물론 제목과 책 내용은 별개다.)

사실 나의 동물적 본능(?)으로 하여금 '잘린 머리'라는 자극적인 제목에 이끌려 책을 골라왔던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잔인한 것들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래간만에 뭔가 뇌수에 확 ~ 꽂히는 재미 위주의 추리물을 한번 읽고 싶었을 뿐이다. 다행이 이 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꽤 두꺼운 분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몰입해서 읽었다. 

일단 '잘린 머리'라는 것이 단번에 생각나는 사람의 머리가 아님을 알려 둔다. 석고상의 머리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라이프캐스팅'이라고 살아 있는 몸에 직접 석고를 부어 만든 것이다. 이쯤 되니 잘린 머리가 사람이 아닌 석고상의 머리라 해서 긴장감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실제 인간의 머리보다 더 기분 나쁘고 묘한 혐오감마저 느껴진다. 또 책의 매 챕터 앞부분에는 석고상을 제작함에 있어 인간의 눈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과정임을 보여준다. 특히 사람의 동공을 직접 석고를 떠서 나타내기 힘들기에 눈을 감고 있는 모습만 표현할 수 밖에 없단다. 요 부분은 후에 있을 사건의 중요한 복선이다.

이 책의 줄거리를 초간단히 소개하면... 
라이프캐스팅으로 작품을 만드는 한  조각가가 자신의 아내를 소재로 한 모녀상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이따른 연작의 실패로 조용히 칩거에 들어간다. 자신이 암으로 죽음이 임박하다는 사실은 안 조각가는 유일한 혈육인 딸을 소재로 작품을 완성하고 사망한다. 하지만 작품이 공개되기 직전 석고상의 머리가 깨끗히 잘려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추리작가이자 탐정인 노리트키 린타로(작가와 동명이다.)가 이 사건을 의뢰받고 수사에 들어간다. 하지만 석고상의 주인공인 딸이 실종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석고상의 머리를 자른 이유는 딸에 대한 살인 예고인 것일까?

이 책의 묘미는 우선 소재의 접근이 인간이 아닌 석고상이란 점에서 참신(?)하다. 그런점에서 더욱 잔혹했다. 또 인간적으로 평범한 주인공 린타로 또한 어설퍼서 오히려 호감이 갔다. 만능탐정이 나와 술술 사건을 해결하는 것만큼 식상한 추리물도 없다. 또 무엇보다 짜임새 있는 구성이 좋다. 줄거리를 너무 허접하게 써서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몰입도가 꽤 뛰어나다. (추리물의 리뷰는 너무 자세히 쓰면 안 된다. 리뷰는 이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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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3-20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하게 쓰셔도 되는데...스포일러 표시만 하면 읽는건 가려읽어도 되잖아요^^;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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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 학생 시절의 미술 시간이 떠오른다. 시대별로 미술 사조를 외우고, 누가 어떤 작품을 그렸는지 연결지어 외우고, 작품 속에 구도와 시점, 그리고 그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까지 모두 책에 쓰여진 대로 달달 외워야만 했다. 그렇게 해야 미술시험 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미술사조나 시대는 외워서 알아야 한다 처도 미술에 대한 해석마저 외워야 했던 사실이 좀 깝깝하게 느껴진다. 그 작품을 그린 화가가 아닌 이상, 그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미술 작품에 대한 절대적 해석이 존재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것은 스투디움(studium)이라 하고,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개별적'인 해석을 푼크툼(punctum)'이라 한다. 진중권님은 이 책을 통해 미술의 푼크툼을 강조하고 있었다. 작품을 보며 스스로 물음을 제기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여러 화가들의 12작품을 통한 진중권님의 푼크툼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럼 이 책에 나와 있는 작품 중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를 살펴 보자.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난 그다지 이 작품에 흥미를 못느꼈다. 교수대 위에 올라가 있는 까치가 눈에 띄긴 했지만, 그냥 그렇고 그런(?) 작품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교수대의 모양이 3차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 또 춤을 추는 사람들, 똥누는 사람 등 오밀조밀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이 작품이 뭘 말하려는 것인지 금새 와닿지 않는다. 솔직히 그 시대 네덜란드의 관습과 시대상을 알지 못하고 이 작품을 자세히 이해한다는 것은 좀 무리다. 또 까치에서 오는 관습과 속담도 다양하다. 또 그림을 그릴 당시 화가 피터스 브뤼헐의 상태도 알아야 한다. 이 그림을 통해 진중권님은 화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부터 관습, 정치 사회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각도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렇 듯 어떤 작품에 대한 절대적 해석은 없다. 해석에 대한 견해도 다양하지만, 어떤 작품은 일부러 작가가 제제를 모호하게 숨겨 작품의 진정한 의도를 살짝 감추거나 다른 것으로 오해하게끔 유도하기도 한다. 또 원래 의도와 다르게 표현되어 다른 뜻으로 완성된 작품도 있다. 그런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름대로 해석해보는 것은 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결국 다양한 푼크툼들이 모여 하나의 스투디움을 형성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스투디움이 아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푼크툼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난 단순한 미술작품을 넘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스투디움' 정서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창조적 사고의 결여라는 말로 대신 표현하여도 좋을 것 같다. 고정된 형식과 틀을 정해놓고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교육과 사회적 패턴들... 그런 획일적 사고의 끝은 결국 무력감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해놓은 대로 생각없이 따라가야 하는 것들에 대해선 어떤 의욕도 흥미도 일으키기 어려울 것 같다. 특히 이런 미술이나 음악, 문학 등에 대한 '스투디움' 행태는 이 분야에 쉽게 친숙하지 못하고 거부감 마저 들게 할 것 같다. 미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즐기려면, 그 작품이 나 자신의 감성을 자극해야 하고, 내 자신이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어설픈 해석과 감상일지라도, 내 자신의 '푼크툼'이라면 그 자체로 나만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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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대지의 꿈 - 장 지글러,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를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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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난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우린 여전히 일제 치하에 대한 치욕을 잊지 못한다. 시대가 많이 변하고 세계화 속에서 사회도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까지도 일본에 대한 껄끄러운 감정은 가시지 않았고, 가끔씩 걸고 넘어오는 우리 영토에 대한 일본의 도발에 치를 떤다. 꼭 국제 분쟁만이 아니더라도 일본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하다. 스포츠 경기에서도 일본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관념은 상대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짙다. 이 모든 것이 과거의 불편한 역사에서 기억된 상처 때문일 것이다. 

세계화 속에서 인도주의를 내세워 유엔의 이름으로 지구촌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오늘날, 남반구 국가들은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다. 왜 그럴까?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서양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는 그들로 하여금 서양에 대해 배타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과거 서구 열강의 오랜 식민지 지배에서 억압당하고 비참한 삶을 이어왔던 남반구 국가들이 과거의 뼈아픈 기억으로 인해 봉착한 오늘날의 세계 정세를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는 남반구 사람들이 격었던 지난 3세기 동안 노예무역과 식민점령에서 오는 수탈과 학살의 역사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조명되어 있다. 그들의 제국주의 역사가 끝났다고 서구 열강의 지배 세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세계화란 이름으로 서양 자본이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을 비롯, 다국적 민간 기업들로 구성된 용병들을 이끌고 신자유주의 이념을 무기삼아 강제적으로 침투해들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남반구 국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빈곤과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들의 서양에 대한 증오는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남반구 국가들의 서양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는 오늘날 서양세력의 이중적 입장으로 더욱 깊어진다. 서양은 군비 축소, 인권, 핵무기 확산 방지, 세계적인 차원의 사회 정의 분야에서 끊임없이 이중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양은 자기네 편의에 맞게 '인도주의'라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경제이득을 챙기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글러는 서양을 정신분열증에 걸렸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그들의 이중성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2007년 세네갈을 방문한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의 강연은 그 '정신분열증'을 실감케 할 정도였다. 참회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식민 지배자들 가운 데는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라는 말을 시작으로 그의 연설은 갖은 기만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반구의 증오와 상처의 역사, 그리고 서양대국의 이중성... 이 모든 것들은 분명 세계를 진정으로 화합하고 인류의 화합과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일까?

지글러가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권'과 '인류애'이다. 옳은 정의를 직시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인간 한사람 한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지글러는 2006년 처음으로 원주민 출신 대통령을 탄생시킨 볼리비아의 예를 들며 혁명과 연대로 새로운 희망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볼리비아 그들도 불행한 역사와 안타까운 빈곤의 현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현실에 자포자기하기보다 좀더 현실적이고 발전적인 투쟁을 선택했다. 민족 정체성을 찾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희망의 꿈을 놓지 않은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과거의 역사도 떠올려봤다. 대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굴욕이 어떤 것인지, 또 그 때문에 생성된 상대 나라에 대한 증오가 어떤 감정이겠는지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글을 늘여놓지 않아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이 많다. 또 미국을 포함한 경제 대국이 우리나라에 정치 경제적으로 교묘하게 압박해 오는 여러가지 상황들을 겪었기에 서구 열강의 이중성이나 태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 기억의 미로에 갇혀있어서는 진정한 발전을 이뤄갈 수 없다. 또한 현실을 그냥 두고 보는 것도 그다지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안목과 투쟁하려는 노력이다. 그런 지성의 눈을 가진 개인개인들이 늘어갈 때 국가는 발전할 수 밖에 없다. 지글러가 강조하는 것도 결국 개인개인의 힘이다.

물론 현실은 생각처럼 그다지 녹록치 않고, 지글러가 말하는 그 노력과 투쟁이라는 것이 막연할 뿐, 구체적으로 확 ~ 다가오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나라의 입장이 과거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데에서 이젠 다른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로 바뀌었다는 것이 모든 것이 더욱 막연해지는 큰 이유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은 세계 경제의 흐름과 국제 정세, 그리고 그 가운데 소외받고 방치되는 극빈 국가들에 대해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빈곤으로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 지구상에 우린 그들과도 공존하고 있다. 지구는 하나, 세계화..이런 말에만 익숙해져 있지,  정작 우리가 국제 변화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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