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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평점 :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은 조금 신경을 써서 읽어야 하는 그다지 편하지 않은 것들이었던 반면, 이 책은 비교적 가볍고 재미있게 읽었다. 하루키식 환상 문학(?)이라고 해두자. 유령, 녹색의 짐승, 얼음 인간 등 다소 공포영화나 괴기영화 속에 나올 법한 소재들이 등장한다. 얼핏 읽을 때는 모두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이 들리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와 전혀 무관한 다른 나라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인간 내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본성 같은 것들을 끄집어 내어 정말 재미있게 잘 구현하였다. 모두 혼자가 된 사람들의 고독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공포"이다.
7가지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렉싱턴의 유령>은 하루키의 자전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으로, 재즈 레코드 콜랙션의 소유자인 어떤 사람의 집을 며칠간 봐주게 되었을 때, 밤새 유령이 나타나났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실제로 유령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공포 때문에 직접 내려가서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래층에서 들리는 여러가지 소음들로 인해 주인공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믿게 된다.
<녹색의 짐승>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녹색괴물에게 공포를 느낀 한 여인이 생각만으로 그 괴물을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는 내용이다. 여인이 마음 속으로 상상하는 생각이 실제로 녹색괴물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꼭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짧은 내용이었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게 한 작품이다.
<침묵>은 학창시절 지독한 따돌림을 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지메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나게 한다.
"내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아오키 같은 인간이 내세우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맛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으로 행동하는 무리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무의미한 행동히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상터를 입힐 수도 있다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무리들이지요.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p.93>
<얼음 사나이>는 말그대로 얼음사나이와 결혼한 한 여자가 그에 매력을 느껴 결혼하지만 남극으로 떠난 여행에서 영영 고립되고 만다는 내용이다. 평범한 한 인간이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인간에게 조금씩 조금씩 지배당하게 되어 결국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이야기다.
"지금 내게는 마음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내 온기는 아주 멀리 사라져 버렸다. 때때로 나는 내가 지녔던 그 온기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다. 나는 이제 정말 외톨이다. 이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고독한, 차디찬 곳에 남겨진 것이다." <p.120>
<토니다키타니>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와이의 헌옷파는 가게에서 우연히 발견한 "TONY TAKITANI"라고 쓰여진 티셔츠의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하는데, 토니라는 이름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주인공이다. 순탄할 것 같은 인생에 아버지와 아내가 차례로 죽는다. 단순히 참을 수 없어서 마구 사들였다는 아내의 수많은 옷과 구두를 처분하고, 아버지의 유품은 레코트 마저 처분하면서, 또다시 외톨이가 된다는 이야기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이다.
<일곱번째 남자>는 어릴 때 태풍이 몰고 온 파도 속에서 친구를 잃고 30년 동안이나 그 공포에 쫓겨 살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공포는 마음만 먹었으면 구할 수 있었던 친구를 파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뒷걸음질 친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자책에서 온 것으로, 그때문에 젊은 시절을 악몽과 비탄 속에서 보내게 된다. 우연히 어린 시절 죽은 친구가 그린 그림을 꺼내보며 자신을 평생 따라다녔던 공포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로 무서운 건, 공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 공포는 확실히 인생의 내부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서 때로는 우리의 존재를 압도해 버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 공포를 향해서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무엇인가에 주어버리게 됩니다. 그건 바로 파도였습니다." <p.200>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장님 버드나무 꽃가루를 묻힌 파리가 여자를 잠재운다는 내용으로, 앞의 여섯가지 이야기와는 조금 성향이 다른 이야기이다. 하루키가 예전에 썼던 작품을 짧게 개작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