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지혜 동문선 현대신서 14
알렝 핑켈크로트 지음, 권유현 옮김 / 동문선 / 1998년 7월
평점 :
절판


 요즘 알랭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라는 책을 읽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정말 좋은 입문서다. 이런 좋은 입문서를 왜 진작에 알지 못했을까?
대학원에서 레비나스와 바흐친 세미나를 할 때 레비나스를 좀처럼 이해, 공감할 수 없었다. 위협적인 타자 앞에서 어떻게 윤리를 우선시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공감이 되기 시작했다. 가끔씩 <Totality and Infinity>를 한 쪽씩 읽어 보면, 공감이 되는 부분이 생겼다. 나이를 먹다보니 이해의 폭이 넓어지긴 하더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레비나스의 새로움은 정치의 세기에 도덕을 말한 점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도덕의 주소를 '이동'시킨 점에 있다. 선을 종국 목표(유토피아의 천국에, 역사가 완결한 빛나는 미래)에 위치시킨 것이 아니라, 시작(타인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태고적의 경험)에 위치시킨 점에 있다. 대타적 존재의 원래 의미는 투쟁이 아닌 윤리이다. 타인과의 대면은 우리에게 책임감을 느끼에 할 뿐 투쟁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나와 대결하기에 앞서서, 얼굴은 나를 부른다. 마치 자기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윤리적 관계는 여러가지 자유의 출현에 선행한다. 또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동인이 되는 전쟁에 선행한다."(레비나스) 이 말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세상이 모두 평화로웠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윤리적 폭력"이 의식의 충돌이나 적대관계보다 선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선은 나를 사로잡고, 내 동의 없이 내게 부과된다. 내가 선을 선택하기 이전에, 그것이 나를 선택하였다. 나는 그것에 복종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도망갈 수는 없다. 악이라고 해서 부끄러움을 지울 수 없고, 타자의 얼굴에 대해서 느끼는 구속을 단절하거나 거절할 수도 없다. "악은 바로 죄이다. 본의 아니게 책임을 회피한 것에 대해서 져야 할 책임이다. 악은 선의 옆이나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하지 않고, 다음 자리에, 선보다 한결 낮은 곳에 위치한다."(레비나스)<사랑의 지혜, 31쪽)

아무도 읽지 않을 긴 인용문을 옮겼다. 나는 너무 좋다. 레비나스를 너무 잘 정리한 문단이다.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는 책임을 지라는 윤리적 명령("윤리적 폭력")을 받는다. 그것이 시작이다. 타자가 어떤 나쁜 놈일지라도 나는 윤리적 명령 앞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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