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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이고 짐승이 아니다. A는 A이지, ~A일 수 없다. A와 ~A의 경계는 명확하다. 그런데 인간(A)은 짐승(~A)을 먹는다. 그 짐승은 인간(의 몸)이 된다(A=~A). 그리고 인간도 죽으면 짐승이 속해 있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A와 ~A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앞의 것이 비대칭성의 사고이고, 뒤의 것이 신화적 사고, 대칭성의 사고이다.
신화에서는 먹고 죽는 시간의 흐름마저도 동시적인 것으로 압축시켜버리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A=~A가 더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그런 현상이 인간의 꿈에서 나타나고, 무의식이라 프로이트가 불렀던 영역에서 나타난다. 무의식이라 불리는 그 영역에 A=~A의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그런 대칭성의 사고가 비대칭성의 사고보다 더 원초적인데, 비대칭성의 사고가 대칭성의 사고를 억압하는 그 지점에서 유일신론이 발생했고, 국가가 발생했고, 자본주의가 발생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오늘날의 사회가 '비대칭성의 사고'로 움직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대칭성의 사고'를 회복해야 하고 두 가지 사고들을 잘 접목시켜야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그는 '불교'(종교가 아니라, 사상으로서의 불교)가 바로 그런 사고의 예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 나와 그,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화엄사상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불교가 대칭성의 사고와 비대칭성의 사고의 결합인지 아직 이해가 안 된다.
신이치의 책들을 읽으며 얻었던 유익.
1. 요즘 한국사회의 지성인들은 불교와 들뢰즈를 많이 공부하는 것 같다. 그들이 불교와 들뢰즈를 공부하면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 조금 이해가 된다. 엄격한 경계선을 긋고 넘어가기를 금하는 형식논리, 금기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단순히 그것은 자본주의 극복의 문제가 아니라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영역에 숨겨진 또다른 논리를 발견해 내고자 하는 인류사적 문제였다.
2. 이 사람의 책을 읽으며, 함석헌 선생님의 '들사람얼'이라는 글이 생각났다. 중국 역사 국가(비대칭적 사고의 산물)의 형성기에 국가를 거부하고 산 속에 들어가 자신의 삶을 살았던 들사람(대칭적 사고). 국가(21세기 현재는 자본)가 온 땅을 점령해서 더이상의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시대에, 틈새를 찾거나 만들어내어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들사람을 가르쳤던 함 선생님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었구나 라고 이해가 좀 되었다. 단순히 민주화만 외친 분이 아니라, 진짜로 시대를 깊이 읽어내신 분이었다.
신이치에 대한 평가
그는 자연 상태(수렵, 유목)의 인간 집단을 이상화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칭성의 사고를 하는 인간은 공동체적 인간이다. 단지 권력이 국가처럼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전체적인 조화를 꾀하는 규율을 갖춘 공동체일 뿐이다. 완전 외따로 떨어진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그런 공동체와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비교하고 있다.
이와 달리 자연 상태를 무법천지(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로 규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의 페르소나>라는 책을 쓴 케밀 파야라는 사람은 그렇게 보는 사람 중 하나이다. 문화는 그런 무법천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다. 문화의 틈새 속에서 폭력, 불법, 음란 등은 끊임없이 솟아난다.
오늘날의 사회를 문제적 사회로 볼 것인가, 아니면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 정도는 되는 사회로 볼 것인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일까, 부정적인 것일까, 양면성을 다 갖춘 것일까?
*제 페북에 올린 글을 다시 여기에 올렸습니다. 제 글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