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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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림을 통한 부활을 믿는지?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제대로된 작품을 통해서는 죽음조차 넘어설 수 있다고. 바로 그 점이 오랜 시간을 거쳐 예술 작품이 살아남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일지 모른다. 단순히 캔버스와 물감만으로 이루어진 이차원적 세계. 그러나 화가의 혼을 통해 캔버스 위에는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다. <스페흐트와 아들>(문학동네.2009)은 그 예술적 위대함을 표현한 책이다.

 

주인공은 초상화로 유명한 화가 펠릭스. 어느 날 그에게 스페흐트란 남자가 찾아와 제안한다. '내 죽은 아들을 그려'달라고. 살아있는 사람만 그리는 걸 원칙으로 했으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한 펠릭스는 영상과 사진을 통해 스페흐트의 아들 싱어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완성된 작품은 역대의 걸작. 그와 부인은 그림 속에서 추억속의 인물을 떠올리고, 새로 태어날 아이를 찾아낸다. 그러나 과거의 연인이자 기자인 민커로부터 스페흐트와 싱어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고, 결국 작품은 한낱 불 앞에 재로 변하고 마는데.

 

책은 여러가지 실험적 요소들을 더해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부가시킨다. 스토리상의 주인공은 분명 펠릭스이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는 그가 아니다. 그렇다면? 처음 화방에서 펠릭스란 남자에게 팔려가는 순간부터, 주문을 받고 고뇌하며 결국 최고의 작품을 그리고 끝내 불태우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건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다. 이 장치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좀 더 모호하고 미스터리하게 읽도록 유도한다. 그렇다. 이 책의 묘미는 어디로 도착할지 모르는 결말. 마지막 한 장을 읽을 때까지 독자들은 아리송한 작가의 메시지에 어리둥절해야한다.

 

이 책을 읽는 또 한 가지 묘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들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부정(父情)으로 캔버스에 그 모습을 담으려는 스페흐트, 그 때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하고 주변의 잣대에 흔들리는 범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펠릭스, 재빠르게 순간의 이슈를 포착해내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은 민커.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한 이야기 속에 자연스레 녹여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진실이다. 단 하나의 진실과 수많은 왜곡된 사실. 주인공 펠릭스는 그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자신의 작품을 한낱 재로 날려버린다. 그렇게 또 다른 주인공 캔버스는 삶을 마감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실체가 사라진 캔버스는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 스페흐트의 '다시 싱어를 그려'달라는 한 마디로 인해. 이가 바로 죽음조차 넘어선 예술의 부활성 아닐까. 비록 원래 캔버스의 몸체는 사라졌지만 그 영혼만은 다시 재생산되어 살아남게 되리란 걸 독자들도, 캔버스도, 펠릭스도, 스페흐트도 믿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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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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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이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이 된다. 가능한 명제일까? 겉으로 보기엔 오류가 있는 문장이다. 한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스파이를 생각해볼까? 실제 소속은 원 국가로 되어있으나 외양적인 삶은 스파이로 살아가는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 이게 바로 동시에 두 사람으로 살아가는 가장 적절한 예가 아닐까. 그런 경우 그는 어떤 존재로서 정의되는 게 맞는걸까. 원래 소속으로서? 아니면 스파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마더나이트>(문학동네.2009)를 이끌어가는 화자 하워드 W. 캠벨 2세가 그러한 딜레마에 빠져있다. 겉으로 드러난 캠벨은 나치 전범이다. 나치에 열광하며 그들의 사상을 전파한 방송인이다. 직접 총칼을 들고 싸우지도,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을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에게 캠벨이란 이름은 그보다 더한 나치로 기억된다. 요컨대 사악한 개자식.

 

그런데 그가 고백하기를 자신은 스파이란다. 미국의 은밀한 명을 받은. 방송 중에 위에서 내려온 지령을 방송 실수 등으로 전달했다고 주장한다. 이쯤되면 이 책이 도대체 무슨 책인지 알법하다. 바로 캠벨이 밝히는 '나는 사실 스파이였습니다'의 고백록이다. 의문이 생긴다. 스파이라면 전후에 그 사실을 증명받고 원래의 삶으로 복귀하면 그만인데 그는 왜 도망치고 숨어다니는걸까.

 

알고보니 그에게는 스파이로서의 활동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다. 유일하게 캠벨의 임무를 아는 사람은 그가 '푸른 대모의 요정'이라고 부르는  '프랭크 위르타넨' 대령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유령같이. 캠벨은 스스로 미국인이고, 나치가 아님을 알지만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를 나치라고 인식하는 상황. 과연 그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걸까.

 

한 사람의 본질, 그리고 가면. 그 이중성의 오묘한 관계를 커트 보네거트는 명쾌하게 표현한다. 유일하게 그의 본질을 아는 대령과 캠벨의 대화 중엔 이런 말이 오간다.

["그것도 당신의 실체였소." "그건 내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누구였든,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사악한 개자식 중 한명이었지." "내가 나치였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그렇소. 믿을 만한 역사가라면 당신을 나치가 아닌 무엇으로 분류하겠소?"] p.244-245

구분은 필요없다. 이런 캠벨도, 저런 캠벨도 모두 그 자신인거다. 생각해보면 당연한거다. 어떤 모습으로든 그 시간을 살아낸 건 캠벨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책의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나치, 존재의 이중성, 전쟁과 인종에 대한 양극의 시각. 그러나 책이 전하는 느낌은 오히려 가볍다. 그 안에 사람들이 쉬이 넘길 수 없는 날카로움은 존재하지만 읽는 이까지 가라앉게하는 무거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게 바로 커트 보네거트의 블랙유머 폭탄이란거군!' 하고 느꼈다. 설명이 필요없다. 일단 한 번 만나보면 다시 빠져들 세계. 그게 보네거트의 매력이 아닐까.

 

내 말에 믿음이 안 가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악에 대해 한 멋들어진 문장 하나를 소개하며 마쳐야겠다. 작가라면 이 정도 재치와 통찰 정도는 겸비해줘야지. 정말 읽을 맛 나게 하는 글쟁이다.

[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그건 적을 무조건 증오하고,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신과 함께 적을 증오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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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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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소, 나는 여기가 좋소. 여기가 생에 찌든 곳이어도 좋고, 세상이 나를 홀대해도 좋소. 나 갈 곳 여기 한 군데이니, 나를 예서 떼내려하지 마오. 나는 예서 이리 살라우. 혹시 아우. 별볼일 없는 이 곳에도 뭔가 싹이 틀지.'

한창훈이라면 이리 말하지 않을까. 바다 사나이라는 그가 풀어내는 자신의 동네 이야기(바다 이야기)는 쓸쓸하고 비참하다. 바다는 예전처럼 우리에게 살가움만을 주는 곳이 아니다. 살기는 힘들고, 일거리는 떠나보내고, 그러다보니 식솔도 떠난다. 그러나 떠나는 자가 있으면 들어오는 자도 있는 법. 바다 한가운데 섬 동네에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도, 사랑도 있다. 그러니 그라면 이러겠다. 나, 그냥 예서 살라우.

 

한창훈은 '바다와 섬의 작가'라 불린다. 그 동안 꾸준히 낮은 곳의 사람들을 그려냈다는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고집을 부린다. 그의 소설엔 명품도, 커다란 집도, 그 흔한 문화생활 한번 접할 길 없다. 고요하고 때론 심술맞은 바다, 사람들을 묶어놓는 섬, 작은 동네 하나면 충분하다. 더해 구수한 사투리 몇 마디 보탤 인물 서너명이면 준비 작업은 끝이다.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뻔하디 뻔한 삶의 이야기가 녹아나온다.

 

어쩜 이리도 궁상맞을까 싶게 바다와 섬 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빚더미에 올라, 마지막 남은 배까지 팔며. 그럼에도 자기 자식들은 뭍으로 보내겠다고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그렇게들 살아간다. 때론 그 고단한 일상에 뭍사람들의 죽음이란 흔치않은 소동도 더해져가며. 바다에 묻혀 큰 소리 한 번 안내고 굽실대며 살아간다. 그래서 한창훈의 소설은 유쾌하지 않다. 삶의 이야기니 묵직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러나 한 편씩 이야기를 읽고 책을 덮을 즈음이면 미소가 번진다. 그리 힘들게 살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미래를 향한 의지와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때론 과거의 행복한 기억이 오늘, 내일을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한 동네에 함께하는것만으로 삶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도 있고, 타인의 죽음을 통해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젊음이 있다. 요즘은 농어촌에서 젊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오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곳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바다, 섬은 시대에 뒤떨어진 벌판이 아닌, 삶을 위한 장소다. 도시에서처럼 사랑도, 일에 대한 열정도 살아 숨쉬는 삶의 현장!

 

이 책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장면도 그 젊음이다. '아버지와 아들'에 나오는 아들은 뭍에 나갔다가 결국 내 터전은 여기요, 라며 섬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씩씩하게 아버지의 일을 돕는다. 섬은 아들이 꿈을 키워갈 베이스진지다. '올 라인 네코'에서는 마음을 닫은 한 여자 미정이 사랑에 빠진다. 빨리 빚 갚고 뭍으로 나가야겠다는 미정을 붙든 건 단순하게 밀어붙인 섬사내 용철. 도시에서처럼 이리재고 저리재기 없이 사랑에 빠진 순수한 남녀의 모습이 바다의 모습처럼 자연스럽다. 그들은 이 섬에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갈거다.

 

첫날 밤, 용철이 미정에게 던진 한 마디가 파문이 되어 울린다. '올라인네코'. 배타는 사람이면, 섬 사람이면 알 법한 이 단어. 미정을 속박하던 모든 걸 마법처럼 풀어냈듯이 나에게도 일상으로부터의 자유를 건네주길. 아무래도 오늘부터 '올라인네코' 전도사가 되야겠다. 아, 도대체 '올라인네코'가 뭐냐고? 답은 책에서. 힌트는, all line let go!

 

바다든 섬이든 산골짜기든 도시든. 어디에서나 사람 사는 모습은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딴 곳으로의 꿈을 꾸기 대신 한창훈과 같이 말해보련다. '나는 여기가 좋다'. 내뱉고 나니 정말로 내가 발디딘 여기가 좋아지는 기분이다. 그러니 오늘도 살아가자 오늘을. 마법같은 주문 '올라인네코'를 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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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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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를 할까, B를 할까. 살면서 수도없이 마주치는 선택의 순간. 나는 종종 동전을 던진다. 앞면이 나오면 A,  뒷면이 나오면 B다. 왜 갑자기 동전던지기냐고? <Q&A>의 주인공이 요 동전 던지기를 통해 행운을 거머쥐기 때문이다. 자신이 갖고 있던 10달러를 탈탈 털어 본 점. 미신이라며 툴툴거리는 그에게 점을 봐준 할아버지는 동전 하나를 건넨다. 행운의 동전이라면서. 우리의 주인공이 위기에 처할때마다 혹은 결정을 내려야할 때마다 행운의 동전은 말 그대로 행운을 업어온다. 그러나 정말 동전이 가져다준 행운일까?

 

책의 주인공은 인도 어느 슬럼가에 사는 일자무식 웨이터 람 모하마드 토머스. 18년 인생 어디도 바람 잘 날 없던 그에게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다. 무려 십억루피 상금을 받는 퀴즈쇼의 주인공이 된 것! 꿈같은 미래가 펼쳐져야 할 판에 람은 십억루피 대신 경찰소로 끌려간다. 막막한 람 앞에 한 여자 변호사가 나타나 돕기를 자청한다.

 

기한은 하룻밤. 그 안에 람은 변호사에게 자신이 13문제를 스스로 풀었음을 증명해보여야 한다. 솔직하게! 천일야화 속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보다 풍성한, 마법같은 일화가 펼쳐진다. 과연 람 모하마드 토머스는 어떻게 난공불락의 13가지 퀴즈를 다 맞추고 희대의 우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조금 긴, 그러나 점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람의 삶 속으로 빠져볼 시간이다.

 

이야기는 람의 이야기와, 퀴즈쇼가 번갈아 등장하며 진행된다. 13개의 퀴즈 문제는 결코 쉽지 않다. 공부 좀 한 사람이라도 13개를 완벽히 맞추기 힘든 문제들. 그런데 어떻게? 비밀은 다양한 삶의 경험 속에 숨어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고, 하는 일마다 꼬인다. 그러나 인생이란 배가 좌초될때마다 람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내일이면 불구가 될 위기에서 벗어나 도망치고, 좋아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범죄(!)도 마지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따뜻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람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그의 튼튼한 몸뚱아리 하나, 살고자 하는 의지는 이 세상 으뜸이었다. 결과는? 두말하면 잔소리. 해피엔딩일게 뻔하지 않나.

 

뒤죽박죽된 람의 이야기를 다 읽어갈즈음, 마지막에 앗! 소리 한 번 내질러주고 한숨을 휴, 내쉰다. (마지막 나름 반전에 앗! 모두가 행복했습니다의 결말을 보고 안도의 휴, 한번) 문득 읽어온 페이지를 보고는 '아니, 이 긴 걸 언제 다 읽었지!' 란 생각이 절로 든다. 재밌는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올때의 그런 아쉬움이랄까.

 

이 책은 '행운'에 대한 이야기다. 보통도 아닌 초특급 행운. 그러나 거져 온 행운이 아니다. 람은 삶 속에서 행운의 비용을 지불했기에 돌려받았을 뿐이다. 운이란 거저 오는거라며 사과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날리는 한 마디. '바라고, 믿고, 꿈꾸고, 노력해라. 그리고 세상과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사랑해라.' 행운은, 그리고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지금 당신 옆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그걸 거머쥐는 건 이제 당신몫이다.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하지만 '중요한 건 마음먹기' 라는 진리를 유쾌하게 꼬집어주는 책이다.

 

사람 삶이 새옹지마라던가. 우리 일상이 소설처럼 지독하게 나쁜 일 후에 끝내주게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까짓것 한번 믿어볼란다. 삶이 나를 배신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야겠단 다짐을 한다. 결국 모든 행운은 삶에서부터 오는 걸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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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시티 - 딘 쿤츠 장편소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8
딘 R. 쿤츠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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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쪽지를 경찰에 가져가지 않아서 경찰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사랑스런 금발머리 여선생을 살해하겠다. 이걸 경찰에 가져간다면, 여선생 대신 자선활동을 하는 할망구를 살해할 것이다. ... 선택은 네 몫이다.'

어느 평범한 날, 당신이 이런 쪽지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황당한 장난이라 치부하고 넘겨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다 쪽지를 들고 경찰서로 향할까? 소설에서나 있을법한 이 일이 주인공인 '평범한 바텐더 빌리'에게 일어난다.

 

평범한 작은 도시 선술집의 바텐더 빌리, 그가 이 황당한 살인게임에 초대된 주인공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음의 게임에 선택을 내려야 하는 입장. 처음에 그는 한낱 장난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다음날 들려온 소식은 금발머리 여선생의 죽음. 그와 함께 도착한 두 번째 쪽지. 의도치 않게 죽음의 동업자가 된 빌리는 친구를 잃고, 자신도 공격을 받는다. 소설 속 이야기는 현실이 되었다.

 

왜? 라는 질문은 소용없다. 제목인 '속도'가 아쉽지 않게 딘 쿤츠는 독자들을 몰아세운다. 단순한 추리 스릴러의 플롯을 따르면서도 숨쉴틈없이 몰아치는 에피소드들은 한 장을 마무리하기 무섭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를 독촉한다. 일분 일초가 아깝다. 살아남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빌리의 모습은 안쓰럽다. 독자들은 끝을 위해 빌리를 따라갈 뿐이다.

 

정체 불명의 괴물을 상대하면서 빌리는 자신을 용의자로 만들려 하는 상대의 의도를 깨닫는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시체를 숨기고, 계획을 짜는 빌리. 서너번의 고비를 넘기며 드디어 괴물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그 비밀이 전혀 깨달을 수 없는 깜짝놀랄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빈틈없는 구성은 책의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마지막은? 500여페이지의 혈투가 무색할만큼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희망과 행복이 있는 일상으로. 정말 황당무개한 소설이구만하고 넘겨버리려다 문득 생각한다. 이 일상의 여유로움을 만끽하지 못하던 빌리에게 일련의 고통스런 '공연'이 깨우침의 시간이 된 건 아닐까하고. 물론 사건을 주도한 괴물이 그런 걸 염두에 뒀을리는 만무하지만 말이다.

 

어떤 소설은 그 재미에 빠져드는 것만으로 책을 읽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케하곤 한다. 그렇다면 딘 쿤츠의 <벨로시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속도감에 몸을 맡긴 채 그저 즐기기. 이 책을 대하는 단 하나의 규칙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책이 주는 공포의 매력을 만끽하고 싶다면... 추적추적 비오는 날 으슥한 구석자리를 찾아보심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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