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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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처음의 그 자리다. 남은 시간들 흩어지는데, 나여, 또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작가의 말 중에서)

시간은 흐른다. 사람은 두 종류다. 시간처럼 흐르며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자리잡는 사람, 다른 이들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정작 자신은 아무곳으로도 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 <공무도하>(2009.문학동네)는 강을 건너 떠나지 못하고 이 곳에 남은 사람의 눈으로 본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은 야멸차게도 빠르게 흘러간다. 도태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은 급류에 휩쓸릴 걸 알면서도 강을 건너고야 만다. 그 옛날 백수광부가 하릴없이 강을 건너간 것처럼. 물론 목적과 방법을 알고 무사히 건너 새로운 삶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저 시대에, 다른 사람들의 등쌀에 못 이겨 자신의 거점을 떠나게 된다. 의도치 않은 이동들은 잠시 이슈가 되어 한낱 몇 줄 기사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그러나 그 뿐, 얼마의 시간은 이내 사건을 지운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마음 한 켠에 묻어둔 사내가 있다. 기자로서 그들의 삶을 뒤쫓았던 문정수다.

 

해망, 개발이 되면서 과거가 지워져가는 한 바닷가 도시에서 문정수는 이런 저런 인연들을 취재한다. 개에게 물려 죽은 아이를 찾지 않는 어미, 포크레인에 깔려 죽은 딸의 위로금을 받지 못하는 아비, 과거 미군 부대의 흔적인 고철을 바다에서 건져내며 살아가는 베트남여자와 이방인 남자, 현장에서 금품을 훔치고 지병으로 퇴직한 소방관. 과거와 현재가 뒤얽히며 사람의 인연도 얽힌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얻고, 누군가는 죽음을 향해 간다. 한 도시 속에서 온갖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미화되지 않은 생 날것 그대로의 모습들이.

 

그런 사람들을 취재하며 밤을 새우는 날이면 문정수는 온갖 세상의 냄새를 몸에 붙이고 한 여자를 찾는다. 출판사에서 편집, 번역 일을 하는 노목희는 세상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문정수가 털어내는, 차마 글로 표현되지 못한 세상의 뒷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그랬구나, 그래야하는게 옳다며 맞장구칠 뿐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여자 앞에서 하루치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뒤에야 문정수는 잠이 든다. 그런 식으로 자신 안에 뿌리 내린 기억의 그림자들을 씻어낸다.

 

<공무도하> 속 세계는 우리의 현실이지만 낯설다. 어디 한 구석에서라도 생의 아름다움을 찾고 싶지만, 장철수의 말대로 세상살이는 '던적스러'울 뿐이다. 그건 강을 건넌 해망의 여러 사람들도, 혹은 건너지 못한 여러 사람들도 매한가지였다. 돈이 있는 놈은 결국 잘 먹고 잘 살 것이고, 돈 없는 놈은 그저 찌부러져 살아갈 것이다. 문정수는 여전히 없는 놈들의 같잖은 사건이나 뒤쫓아다니며 하루 밤을 또 넘길 것이다.

 

이 소설은 해망이란 한 도시를 과거에서 미래까지 짚어가며 그 속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단지 해망의 일 뿐만이 아니란 사실을. 해망은 그 곳이 어디든 지금 당신이 발 붙인 그 자리이고,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 당신, 그리고 바로 지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시간은 열려있다. 과거로도 미래로도. 우리가 어떻게 발버둥치고 도망가든, 흐른다. 그 속에서 사람이란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라 있는대로 혹은 없는대로 삶은 이어진다. 그러니 예서 같이 살자고 말한다. 피하지 않고 마주치는 생이 비록 남루하고, 치사하더라도 같이 살자는 그 말이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크고 따뜻한 위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을 이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괜찮아, 그러는 게 가장 좋았던 거야.'라는 끄덕임을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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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전철
아리카와 히로 지음, 윤성원 옮김 / 이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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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 문이 열린다. 자리가 없다. 적당한 곳에 서서 앞에 앉은 사람은 어디에서쯤 내릴까 생각해본다. 옆자리 두 여학생이 수다를 떤다. 나도 모르게 귀기울여 듣다가 웃을뻔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흠칫,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저기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군인이 보인다. 바른 청년일세, 하면서 힐끗 바라본다.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의 전철에서의 일상. 보통은 입 다물고 허공 쳐다보다 내리는 그 시간을 반짝이도록 예쁘게 그려낸 책이 있다. <사랑, 전철>(이레.2009)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조금 더 행복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어느 전철 역, 호감을 갖고 있던 여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우왓, 말까지 건다. 몇 정거장을 재밌게 이야기하고 아쉽게 헤어지던 차에 여자가 말한다. "다음에 만나면 같이 마셔요." 혼자만의 호감이 아닌 걸 아는 순간 남자의 발걸음은 절로 플랫폼을 향해 나간다. 사랑, 시작될까?

 

그 모습을 보던 여자 쇼코. 5년의 사랑을 뒤로 하고 딴 여자와 결혼한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장에 가서 통렬한 복수를 하고 온 참이다. 신부보다 아름답게 흰 드레스를 차려 입은 그녀를 보고 한 꼬마가 외친다. "앗, 신부다!" 눈물이 흐르는 그녀에게 아이의 할머니가 다가와 가만가만 인생충고를 해준다.

 

할머니의 조언을 받고 작은 동네에 내린 쇼코는 사소한 행복들과 마주하며 마음을 푼다. 한편 같은 지하철에 타고 있던 폭력 남자친구와 한판 한 미사. 자신만 두고 경마장에 가버린 남자친구를 따라가야하나 플랫폼에 주저하고 있을 때 노부인이 한 마디 날린다. "형편없는 남자네요." 그 말에 자신을 돌아본 미사는 헤어짐을 결심한다. 무사히 헤어질까?

 

전철에서 처음 만난 두 젊은 남녀. 같은 대학의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 것만으로 두 사람의 공감대는 바로 결성.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 어쩌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우연을 인연으로 바꿔버린다. 귀엽긴!

 

그냥 지나쳐갔을법한 사람들이 말 한마디를 통해 마치 오래 알고지내던 사람인냥 친해지기도 하고,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미소짓기도 한다. 때론 의도해서, 때론 정말 우연처럼 다가오는 인연들. 마치 전철이 같은 구간을 맴맴 돌듯이 사람들도 돌고 돌고 돈다. A는 B와, B는 다시 C와, C는 다시 A와. 이런 식으로 순환되는 마법같은 인연의 소중함. 단지 이건 소설이니까 그럴 뿐이잖아? 라고 한다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현실에선 이 정도로 빈번하고 자연스럽게 우연이 필연이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사실 예쁜 만남보단 지하철 시끄러운 아줌마 부대처럼 나쁜 만남이 더 많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단지 그건 몽상일 뿐이야, 라고 넘겨짚기에 이 책은 참 예쁘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써주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예쁘고, 어떻게 보면 순진할 정도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난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에 팍팍해졌다고 해도 분명 지금 우리가 사는 곳 어딘가에는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 거라고 난 믿는다. 작은 전철역 초등학생 아이들의 못난 그림을 붙여주고 설명까지 덧붙여주는 직원이, 생전 처음보는 낯선 사람의 고통 때문에 낯선 역에서 내려 보살펴주는 친절함이, 굳센척하느라 이를 꽉 물은 아이에게 수건 한 장 건네주며 멋지다고 말해줄 수 있는 젊은 아가씨가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매일 타는 지하철이 새롭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도 그 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인생이 너무 고달프게 느껴질 때 한 마디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전철은 그저 기계로 만들어진, 사람을 수송하는 공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이 닫힐 때쯤 뒤어올라타는 승객들을 한두 사람 받아들이는 넉넉함을 보여주'(p.136)는 전철은 사실 굉장히 따뜻한 곳일수도 있지 않을까? 내일 전철에서는 사람들을 바라보느라 잠들 틈도, 책 읽을 틈도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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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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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세 분류로 나눌 수 있다. 물음표가 가득한 책, 온점으로 채워진 책, 느낌표를 남발하게 하는 책. 첫 번째 부류가 해석을 요하는 가령 시같은 작품이라면, 두번째는 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대부분의 책이다. 세 번째는 인상적인 책들이다. 주관적으로 공감이 가는 책이거나 작가의 말빨이 세거나 재밌는 책이 여기에 속하겠다. 제멋대로 방식을 가진 아줌마의 이야기 <고등어를 금하노라>(푸른숲.2009)는 일단 아줌마의 말빨이 재밌고, 그러면서 가끔 무릎치며 공감도 하게되는 책이다. 당연히 세 번째 느낌표 남발 부류 되시겠다.

 

일단 가족 소개를 하자면, 비록 몸은 독일에 있지만 전형적인 한국 아줌마 파워 지니신 엄마(바로 이 책의 지은이!). 독일인 엔지니어로 할 말 똑부러지게 하는, 그러나 본인은 유순한 줄 아는 때론 매력있고 때론 밉상인 남편. 알아서 잘 큰 아들. 이 집안의 깜찍한 반항아 딸. 이렇게 네 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간다.

 

#1 자식은 이렇게 키워라?!

이 부부, 자식 사랑 끔찍하다. 극성 한국아줌마의 끔찍한 자식 사랑? 거기서도 과외에 따라다니며 간섭하나 싶겠지만 오우, 노우! 이들의 사랑은 함께 놀아주기 + 알아서 크도록 격려하기로 표현된다. 이들의 모토는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돈이 아니라 부모의 시간이'(p.85)다. 더불어 그들이 생각하는 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 또한 아이들이 '부모의 도움 없이 잘 사는 것'(p.94).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이래서 애들이 제대로 크겠어? 생각하겠지만 그 완벽한 결과물(?)이 아들과 딸로서 증명되니 우리나라의 극성 부모들, 한 수 배워보심이 어떨까?

 

#2 가족은 최고

이들 가족의 화목도는 부럽다. 드라마에서 보는 꾸며진 가족의 화목함이 아닌, 자기 할 일들 알아서 하면서 필요할 때 뭉치고, 기대치 않은 순간 가족이란 이런거구나!를 느끼게 하는 진짜배기다. 조금 못미더워도 믿어주고, 어느 순간 짜증나도 사랑으로 덮어주는 그런. 이들 가족처럼 살아간다면 집이란 정말 따뜻하고,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그런 장소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들도 나름의 고충이야 있겠지만 말이다.

 

#3 이렇게 사랑하며 늙어가고 싶다

젊은 시절, 가장 아름다운 때의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빛이 나고 아름답다. 그러나 사랑이 결혼이란 이름에 묻히면? 사랑의 달콤함은 날아간 채 생활의 고달픔이 그 자리를 채운다. 배우자에겐 짜증과 늘어난 나잇살만이 남는다. 그러나 이 부부는 그 세월을 현명하게 이겨낸다. 늦깍이로 함께 춤을 배우면서 몸을 맞대고 아침엔 늘어난 뱃살을 쓰다듬으며 킥킥거린다. 나이가 들어도 열정을 잃지않고, 나이에 맞는 방식으로 사랑을 지켜가는 이들처럼 늙고 사랑하고 싶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4 내가 아닌 우리를 생각하기

이 가족의 식탁에는 고등어가 금지다. 왜냐? 육지 한 가운데서 바다 생선을 먹는 건 자연환경에 해악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 아니 자기들이 안 먹는다고 뭐 세상이 갑자기 좋아지겠어? 싶기도 하지만, 그런 사소한 실천들이 모이고 모여 지구를 살리는 일에 기여하는 법. 그래서 이들은 물 받아놓고 목욕도 안하고, 샤워도 후딱 끝내버린다. 엽기적일 정도로 대단한 가족이다. 그러나 그 마음, 갸륵하지 않은가!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이 책에 쓰인 일들은 별거 아니다. 사실 간단히 한 마디로 요약도 가능하다. 독일에 사는 한 한국인 아줌마의 일기! 그녀는 굳이 자기가 하는 대로 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럼 왜 그렇게 구구절절이 자기 얘기를 써놓으셨수? 라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한다. '나 같은 보통 사람도 내 인생과 지구의 주인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걸 다른 보통 사람들과 더불어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면 나는, 너는, 우리는 허세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편안하고 가볍게 실천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p.281) 그렇다. 별거 없는 인생, 그러나 그 한 사람마다가 모두 주인이라는 걸, 그러니 그 속에서 사소하게 행복해하며 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는건지도.

 

때론 엽기적이고 유쾌하고 행복한 가족 이야기를 읽으며 잠시나마 함께 기분 좋아지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책, <고등어를 금하노라>. 날씨 추운 겨울 몸을 녹여줄 책으로 일독을 권하는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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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렌 하우스호퍼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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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했다. '지금까지의 독서 경험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책' 이라고 소설가 에바 뎀스키가 말했다. 그런가, 이 책이 그리 아름다운가. 고개를 갸웃한다. <벽>(문학동네.2009)의 첫인상은 아름다움: 화려함, 예쁨, 우아함. 그 어느 느낌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새 내 입은 아름답다, 고 읊조리고 있었다.

 

어느 날 벽이 생겼다. 한 여자만이 살아남았다. 룩스(개)와 소와 고양이가 가족이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이 온통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자는 살아간다. 소의 젖을 짜고, 풀을 베고, 농사를 짓고, 집을 고치고. 이전까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법한 일들을 척척 해나가며 이 년이란 시간을 보낸다. <벽>은 그 기록이다.

 

_ 난 인간으로 살고싶어

여자는 두려워한다. 먹고 살 일이 걱정되어서, 혹은 혼자 남은 외로움에?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두려움. 그건 언제까지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면서 기어 다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 같다. 동물이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동물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동물 이하로 전락한다. 나는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최근에 와서는 결국 동물 이하로 전락하고 말 것이 가장 두려웠고, 그러한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p.54]

미래에 대한 삶의 기약조차 없는 상태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갈망이 생길 수 있을까? 적어도 그럴 수 있다면 세상에 혼자 남아도 그 곳이 지옥은 아닐 것이란 사실을 <벽>은 보여준다. 낯선 상황에서도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여자의 모습은 숭고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_ 그럼에도 난 살아갈거야

<벽>은 불친절한 책이다. 왜 어느날 갑자기 세계가 죽어버렸는지, 벽이 생겼는지.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여자 또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녀라고 한 순간에 난 괜찮아,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거야, 라고 다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름의 괴로움을 겪어가며 여자는 다짐한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더이상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심장이 서서히 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받아들이기로 결심만 했을 뿐인데도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p.171]

남은 건 적응 뿐. 도시의 부인이 시골의 아낙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무섭도록 질긴 삶에 대한 집착. 여자는 병을 이겨내고, 아픔을 치유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간다. 강인한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_ 사랑과 고독 사이

여자가 살아갈 수 있던 건 스스로의 의지 덕분만은 아니었다. 우연히 함께 지내게 된 룩스(개), 소, 고양이들은 그녀를 외로움에서 구해줬다. 돌봐야 할 존재가 있기에 죽지 않고 자신을 다독일 수 있던 것. 대상이 사람에서 동물로 옮겨왔을 뿐,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소설은 남은 종이가 없는 순간 끝이 난다. 그러나 그녀에게 소와 고양이가 남아있는 한 계속 살아가리라고 독자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스로도 그렇게 이야기했으니.

[이 산속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살아 있는 한 나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히여 정말로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되는 날, 나는 삶을 멈출 것이다. p.210]

우리가 보기에 벽 이편의 세상은 쓸쓸하고 절박해보이지만, 어쩌면 사랑할 존재가 있는 그 세상이 여자에겐 천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와 동물들이 만들어내는 편안한 분위기가 화려함과는 다른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어느 날 벽이 문득 생겼듯, 이야기도 불현듯 끝나버린다. 앞으로 어찌 되리란 한 마디 말도 없이. 언젠가는 여자도 죽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시간과 함께. 그러나 적어도 독자들의 머리와 마음 속에선 낯선 아름다움을 밝히며 살아가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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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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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교양인을 위한 런던 여행서다. 교양인? 요새는 책도 교양이 있어야 읽나? 워워... 진정하시라. 여기서 잠깐 정혜윤식 교양인의 정의를 내려야할 듯 싶다. 교양인이라 함은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서 고흐가 미쳐서 고갱의 귀를 잘랐다고 아들에게 설명하는 아빠의 모습이고,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서 고딕이 뭐요?라고 묻는 아저씨의 모습이다. 이들의 공통점을 눈치챘으려나? 바로 알고자 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이야기꾼의 모습. 다시 말해 이 책, <런던을 속삭여 줄게>는 런던이 궁금한, 런던에 대해 이야기 좀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란 말씀.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정혜윤, 이 사람부터 좀 짚고 넘어가야겠다. 책을 너무 좋아하는 그녀, 우리에겐 프로듀서로 더 잘 알려진 그녀, 이미 책에 대한 책을 두 권이나 써낸 그녀. 하나 더하자면 천상 이야기꾼. 넉살스레 적당한 곳에 적절한 글귀 끼워넣는 재주로 매번 자신을 시샘하게 만드는 여자다. 그런 여자가 쓴 런던 여행기라니. 읽고 나면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눈 둘 곳을 못 찾을 것 같아 애써 피하는 중이었는데... 결국 또 만났다. 정혜윤 표 책을.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지나 대영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을 거친다. 수많은 볼거리에 지칠 때쯤이면 한 숨 놓으면서 사람 구경 좀 하라고 트라팔가르 광장에 데려다놓고 이어 런던탑과 그리니치 천문대까지. 숨쉴틈 없는 빡빡한 일정이 우리를 기다린다. 물론! 원한다면 중간에 쉬어가도 좋고, 여기 별로야 싶으면 뛰어 넘어가도 좋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아마 헥헥거리며 온 런던 한 바퀴를 다 돈 후에야 아픈 다리 주무르며 휴, 한숨을 내쉴거라고 예상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실제로 피곤한 건 다리보다는 눈과 머리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혜윤을 따라 가는 런던 여행. 이거 만만치않다. 그저 현재의 장소들이나 휘적 따라다녀볼까 했더니 저 멀리 몇 백년전까지 기어올라간다. 소년 시절의 뉴튼부터 영국의 영웅 넬슨 제독에,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다윈 할아버지도 만난다. 하긴 그 정도면 양반이지. 역대 영국 왕이며 피의 여인들까지 만나뵈려니 이쯤되면 몸이 절로 조아려질판이다. 그래서 불만? 절~대 아니다. 사실 우리야 고맙지... 가만히 한 자리 앉아서 멋진 시인들이며 화가들의 예술세계까지 공으로 만나는 걸.

 

거침없는 지식의 향연은 역시 정혜윤 책만의 맛깔스러움이다. 거기에 훔쳐내고 싶은 그녀의 말빨이 더해진다. 로이드 존스의 <미스터 핍>에 등장하는 다니엘 할머니를 따라 한 이 말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런던을 알고 싶니? 런던 대신 파란색을 말해줄게." 나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 줄수 있다면 정말 최고일텐데! (그래서 정혜윤이 런던 대신 파란색을 말해줬는지는... 음,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아마 정혜윤도 아직 그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저러나 여행이란 시작하면 끝나게 마련.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이어지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정혜윤의 런던 여행기도 어느 새 마침표를 찍는다. 아쉽지만 독자들도 마침표를 찍는 수 밖에... 일리가 없지. 정혜윤은 부탁한다. 이 책을 더 두껍게 만들어달라고, 모든 독자들에게 말이다. '여행과 인생에는 치명적인 공통점이 있다. 계속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이 여행서는 언제나 첫번째 여행서이다.' 뒷이야기는?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몫이다. 런던에 다녀왔건 앞으로 갈거건, 평생 가지 않을거건 아~무런 상관없다. 그냥 맘에 드는 이야기에 조금 살 붙이기.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런던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재미난 이야기로 번져나갈 것이다. 자, 이제 너의 이야기를 속삭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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