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를렌 하우스호퍼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답다 했다. '지금까지의 독서 경험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책' 이라고 소설가 에바 뎀스키가 말했다. 그런가, 이 책이 그리 아름다운가. 고개를 갸웃한다. <벽>(문학동네.2009)의 첫인상은 아름다움: 화려함, 예쁨, 우아함. 그 어느 느낌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새 내 입은 아름답다, 고 읊조리고 있었다.

 

어느 날 벽이 생겼다. 한 여자만이 살아남았다. 룩스(개)와 소와 고양이가 가족이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이 온통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자는 살아간다. 소의 젖을 짜고, 풀을 베고, 농사를 짓고, 집을 고치고. 이전까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법한 일들을 척척 해나가며 이 년이란 시간을 보낸다. <벽>은 그 기록이다.

 

_ 난 인간으로 살고싶어

여자는 두려워한다. 먹고 살 일이 걱정되어서, 혹은 혼자 남은 외로움에?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두려움. 그건 언제까지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면서 기어 다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 같다. 동물이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동물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동물 이하로 전락한다. 나는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최근에 와서는 결국 동물 이하로 전락하고 말 것이 가장 두려웠고, 그러한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p.54]

미래에 대한 삶의 기약조차 없는 상태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갈망이 생길 수 있을까? 적어도 그럴 수 있다면 세상에 혼자 남아도 그 곳이 지옥은 아닐 것이란 사실을 <벽>은 보여준다. 낯선 상황에서도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여자의 모습은 숭고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_ 그럼에도 난 살아갈거야

<벽>은 불친절한 책이다. 왜 어느날 갑자기 세계가 죽어버렸는지, 벽이 생겼는지.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여자 또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녀라고 한 순간에 난 괜찮아,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거야, 라고 다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름의 괴로움을 겪어가며 여자는 다짐한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더이상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심장이 서서히 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받아들이기로 결심만 했을 뿐인데도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p.171]

남은 건 적응 뿐. 도시의 부인이 시골의 아낙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무섭도록 질긴 삶에 대한 집착. 여자는 병을 이겨내고, 아픔을 치유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간다. 강인한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_ 사랑과 고독 사이

여자가 살아갈 수 있던 건 스스로의 의지 덕분만은 아니었다. 우연히 함께 지내게 된 룩스(개), 소, 고양이들은 그녀를 외로움에서 구해줬다. 돌봐야 할 존재가 있기에 죽지 않고 자신을 다독일 수 있던 것. 대상이 사람에서 동물로 옮겨왔을 뿐,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소설은 남은 종이가 없는 순간 끝이 난다. 그러나 그녀에게 소와 고양이가 남아있는 한 계속 살아가리라고 독자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스로도 그렇게 이야기했으니.

[이 산속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살아 있는 한 나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히여 정말로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되는 날, 나는 삶을 멈출 것이다. p.210]

우리가 보기에 벽 이편의 세상은 쓸쓸하고 절박해보이지만, 어쩌면 사랑할 존재가 있는 그 세상이 여자에겐 천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와 동물들이 만들어내는 편안한 분위기가 화려함과는 다른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어느 날 벽이 문득 생겼듯, 이야기도 불현듯 끝나버린다. 앞으로 어찌 되리란 한 마디 말도 없이. 언젠가는 여자도 죽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시간과 함께. 그러나 적어도 독자들의 머리와 마음 속에선 낯선 아름다움을 밝히며 살아가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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