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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전철
아리카와 히로 지음, 윤성원 옮김 / 이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전철 문이 열린다. 자리가 없다. 적당한 곳에 서서 앞에 앉은 사람은 어디에서쯤 내릴까 생각해본다. 옆자리 두 여학생이 수다를 떤다. 나도 모르게 귀기울여 듣다가 웃을뻔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흠칫,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저기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군인이 보인다. 바른 청년일세, 하면서 힐끗 바라본다.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의 전철에서의 일상. 보통은 입 다물고 허공 쳐다보다 내리는 그 시간을 반짝이도록 예쁘게 그려낸 책이 있다. <사랑, 전철>(이레.2009)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조금 더 행복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어느 전철 역, 호감을 갖고 있던 여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우왓, 말까지 건다. 몇 정거장을 재밌게 이야기하고 아쉽게 헤어지던 차에 여자가 말한다. "다음에 만나면 같이 마셔요." 혼자만의 호감이 아닌 걸 아는 순간 남자의 발걸음은 절로 플랫폼을 향해 나간다. 사랑, 시작될까?
그 모습을 보던 여자 쇼코. 5년의 사랑을 뒤로 하고 딴 여자와 결혼한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장에 가서 통렬한 복수를 하고 온 참이다. 신부보다 아름답게 흰 드레스를 차려 입은 그녀를 보고 한 꼬마가 외친다. "앗, 신부다!" 눈물이 흐르는 그녀에게 아이의 할머니가 다가와 가만가만 인생충고를 해준다.
할머니의 조언을 받고 작은 동네에 내린 쇼코는 사소한 행복들과 마주하며 마음을 푼다. 한편 같은 지하철에 타고 있던 폭력 남자친구와 한판 한 미사. 자신만 두고 경마장에 가버린 남자친구를 따라가야하나 플랫폼에 주저하고 있을 때 노부인이 한 마디 날린다. "형편없는 남자네요." 그 말에 자신을 돌아본 미사는 헤어짐을 결심한다. 무사히 헤어질까?
전철에서 처음 만난 두 젊은 남녀. 같은 대학의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 것만으로 두 사람의 공감대는 바로 결성.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 어쩌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우연을 인연으로 바꿔버린다. 귀엽긴!
그냥 지나쳐갔을법한 사람들이 말 한마디를 통해 마치 오래 알고지내던 사람인냥 친해지기도 하고,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미소짓기도 한다. 때론 의도해서, 때론 정말 우연처럼 다가오는 인연들. 마치 전철이 같은 구간을 맴맴 돌듯이 사람들도 돌고 돌고 돈다. A는 B와, B는 다시 C와, C는 다시 A와. 이런 식으로 순환되는 마법같은 인연의 소중함. 단지 이건 소설이니까 그럴 뿐이잖아? 라고 한다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현실에선 이 정도로 빈번하고 자연스럽게 우연이 필연이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사실 예쁜 만남보단 지하철 시끄러운 아줌마 부대처럼 나쁜 만남이 더 많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단지 그건 몽상일 뿐이야, 라고 넘겨짚기에 이 책은 참 예쁘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써주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예쁘고, 어떻게 보면 순진할 정도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난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에 팍팍해졌다고 해도 분명 지금 우리가 사는 곳 어딘가에는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 거라고 난 믿는다. 작은 전철역 초등학생 아이들의 못난 그림을 붙여주고 설명까지 덧붙여주는 직원이, 생전 처음보는 낯선 사람의 고통 때문에 낯선 역에서 내려 보살펴주는 친절함이, 굳센척하느라 이를 꽉 물은 아이에게 수건 한 장 건네주며 멋지다고 말해줄 수 있는 젊은 아가씨가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매일 타는 지하철이 새롭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도 그 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인생이 너무 고달프게 느껴질 때 한 마디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전철은 그저 기계로 만들어진, 사람을 수송하는 공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이 닫힐 때쯤 뒤어올라타는 승객들을 한두 사람 받아들이는 넉넉함을 보여주'(p.136)는 전철은 사실 굉장히 따뜻한 곳일수도 있지 않을까? 내일 전철에서는 사람들을 바라보느라 잠들 틈도, 책 읽을 틈도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