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월요일 - 참을 수 없는 속마음으로 가득한 본심 작렬 워킹 걸 스토리
시바타 요시키 지음, 박수현 옮김 / 바우하우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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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좋다 이거야. 근데 시중에 널린 수많은 20대 후반, 30대 초반을 겨냥한 소설들은 좀 동떨어져 있지 않아? 누가 저렇게 다 멋지고, 뽀대나게 사냔말이야!"

 

재미도 있고, 환상도 무럭무럭 키워주는 일명 칙릿소설. 읽을 때는 마냥 푹 빠져 읽어도, 읽고나면 남는 이 찜찜함은 결국 지금의 우리와 다른 모습이라는데서 오는 게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딱 '우리'네 일상같은 이야기가 있으니.. 시바타 요시키의 <참을 수 없는 월요일>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그리고 주말로 나눠진 책은 요일별로 특징을 꼭 집어 평범하면서도 톡톡튀는 일상을 소개한다. 자칭 못생기고 절벽가슴에 별볼일없는 주인공 '네네'를 만나보실까?

 

일단 주인공부터가 현실이다. 쭉빵 미녀도, 센스있는 옷걸이도, 능력자도 아니다. 평범한 경리부 사원. 이름은 특이하고, 낙하산 직원이란 강박에도 좀 사로잡혀있고, 초미니 모형 만드는 오타쿠적인 취미까지. 그런 그녀의 일상은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고 들여다본다.

 

월요일에는 경비 떼어먹으려는 사원과 한바탕, 화요일은 왠일로 머리도 하고 '남자꼬시기용 속옷세트'도 충동구매, 수요일엔 졸지에 가정있는 남자와 바람핀 여자가 되어 수사에 착수한다. 사실 이쯤되면 결코 일상적이진 않은데... 읽다보니 이 사람 은근 웃기기도 하고, 왠지 호감도 간다. 목요일엔 회사내의 어쩔 수 없는 이지메 사건에 울적해하며 달디 단 케익을 입 속에 마구 넣어버리고, 금요일엔 한바탕 싸운 편집부 사원과 운 좋게 길거리에서 만나 화해한다. 주말엔? 아, 직접 읽어보시길. 여기까지 오면 도저히 일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사건이!

 

'네네'의 일상을 읽는 건 마치 한 편의 미니 드라마를 보는 듯 재미있다. 아무 생각없이, 부담없이 집어들어 읽기 딱 좋을 정도랄까. 한 손에 도넛 들고 얌얌하면서 적당히 쿡쿡거리며. 그런데 읽다보면 사이사이 생각지도 못한 보물들이 숨겨져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인연에 대한 한 마디. 젊은 날 사랑에 대한 충고 등등.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가령 이런 문장.

 

"그냥 우연인거지, 전부. 하지만 그 우연이 잔뜩 겹쳐져서 우리들은 서로 알게되고, 싸움도 하고, 술 마시러도 가고, 좋아하게도 되고, 미워하기도 하는거지. 만일 사소하지만 하나라도 달라졌더라면 결코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를 사람들끼리 우연이라는 불가사의한 힘 덕택에 만나게 디어서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 서로 바꾸어가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인연이란 건, 참 신비하다고 생각해."

 

사람을 만나는 것 뿐일까. 우리네 일상이란 것도 결국엔 수많은 우연이 겹쳐져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순간 수많은 선택 중 하나를 함으로써 다음 일이 일어나고, 또 다음 일이. 하나라도 달라졌다면 그 결과는 수만가지 다른 갈래로도 갈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순간이 만들어내는 지금은 얼마나 소중한지. 그 시간을 함께하는 누군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소설이 가볍다느니, 도대체 전하려는 게 뭐냐느니 그런 말도 많이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게 일본문학의 매력이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가득차서, 즐겁게 읽다보면 어느 새 지금의 순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점. 나도 예전처럼 일본 문학의 애독자는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만나는 소설들은 나를 일상의 행복에 젖게 만든다. 그리고는? 다시 화이팅! 일상으로 돌아가기.

 

우리 모두 참을 수 없는 월요일을 원망하며 한 주를 시작하지만, 때론 비밀스럽게, 외롭게, 달달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면 주말은 돌아오게 마련.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지 말고 오늘도 행복하기를, '네네'와 나는 기운차게 외치련다. 아자! 어쩌피 살아야 할 매일이라면 당신도 기운내서 외치기를.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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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마나님
다비드 아비께르 지음, 김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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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독특함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일단 소설은 아니고, 그렇다고 에세이냐고 물으신다면 그 것도 갸우뚱. 불우한 일상(?)을 희극화하려는 한 가련한 남자의 일상사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자. 그렇게 말하고보니 표지의 웃는지 뭔지 모를 표정으로 발레라도 추는 듯한 남자의 모습이 딱 책 속 '나'의 모습이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스친다.

 

그렇다. 이 책은 현대 생활에서 여자들에게 치여 설 자리를 잃어가는 불쌍하고 한편으론 찌질한(!) 남자들을 대변하는 '나'의 고백기이다. 그러나 읽다보면 정말 그들은 찌질한가라고 묻고싶어진다. 보이는거야 어쨌든 나름 삶을 즐기는 모습이라니, 그 것도 괜찮다면 괜찮은 삶이 아닐까? (그러니까 나름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건 책 속에서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은근 폭소탄 문장들 덕분이다. 사실 이런 일상적인 프랑스식 유머에 전혀 길들여있지 않기에 그렇게 많이 웃기진 않았지만. 왜 그런거, 나는 웃기지 않는데 왠지 분위기상 이쯤에서 웃어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책 읽는 내내 받았다.

 

가벼우면서 가볍지 않음, 유쾌하면서 또 알고보면 웃으면 안될 것 같은 내용, 뭐라 딱 꼬집어 말 할 수 없는 그런 책이었다. (그래서 너도 좋았냐? 고 물으신다면 글쎄, 내 취향은 아니었어. 정도로 대답해줄 수 있겠다.)

 

그러고보니 여태껏 책에 대한 내용 언급조차 안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주인공은 '나'로, 일단 직업은 있지만 돈을 더 많이 버는 아내 대신 집에서 두 딸내미를 키우고 있고, 그 '아내'는 덜 떨어진 '나'보다 더 세련되고 똑부러지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고. 내용은 그저 일상적인 각종 에피소드들.

 

누군가는 분명 이 책을 읽으면서 거창하게 남녀간의 관계, 현대사회에 와서 남성의 지위 뭐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 (뭘 했냐고 물으신다면야 좀 특이한 책이니, 만나보실라우? 라고 제안한 정도까지의 일이라고 말해두자.) 작가도 '휴머니즘의 이야기와 사랑의 이야기'로 봐달라는데 뭘.

 

어쩌피 세상 사 좋고 나쁘고는 상대적인 것 아니겠나란 생각을 하며, 그 변화에 쿨하게 대처하는 작가의 유연함에 박수를 보내며 이쯤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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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애무
에릭 포토리노 지음, 이상해 옮김 / 아르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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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시 프랑스 소설! 이란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책, <붉은 애무>를 만났다. 다소 생뚱맞게 시작한 이야기는 점점 주제를 부각시키고, 독자가 나름대로 수긍하려는 순간 어퍼치컷을 날린다. 이게 결말이라고! 라면서. 다음에는 예상하고 읽어야지 하면서도 매번 프랑스 소설을 만날 때마다 책을 마친 후에는 벙찐 상태로 허공을 바라본다. 아!

 

아니, 무슨 소리를 혼자 지껄이고 있는거야? 라고 묻는다면 아직 결말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라고 대답한 후 다시 한 숨 고르고. 일단 심상찮은 저 제목 <붉은 애무>는 일단 각자 상상하고. 나름, 아니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소설을 이끌어나가는데 있어서가 아니라 결말에 있어서.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주인공 펠릭스는 어느 밤 한 고객의 전화를 받는다. 임대주택에 불이 났다는 주인장,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살던 한 모자가 불과 함께 실종되었다는 사실이다. 펠릭스는 이 사실에 집착한다. 과연 그녀와 그 아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에 대해. 읽다보니 그 답이 조금은 나오는 듯도 하다. 얼마 전 사랑스런 외동아들 콜랭이 죽은 것이다. 동정과 연민의 시선, 말이 쏟아지는 걸 참을 수 없는 펠릭스는 결국 회사에 휴가를 낸다.

 

아들과의 기억과 현재의 삶이 오가는 가운데 이야기는 진행된다. 아들이란 선물을 남겨두고 떠난 그녀, 마리. 이제 둘만 남겨진 부자지간은 그들만의 삶을 구축해나간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모든 사랑을 주려는 아버지 펠릭스. 그는 왜 그렇게 아들을 향한 '사랑'에 집착하는 것일까.

 

펠릭스의 과거로 돌아가보니 그에겐 단 한순간도 '아버지'란 존재가 없었다. 받지 못했기에 제대로 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사랑. 결국 모든 걸 한 없이 주려는 모습에 콜랭의 선생님 몽테이 양은 말한다. "마레스코 씨, 목소리와 몸짓을 통해 전해지는 그 과도한 애정도 긍정적이진 않아요. 제 말 믿으세요, 아버지가 아들을 꼭 껴안고 속삭이는 '아이고, 내 새끼' 는 아이를 벼랑 끝으로 내몰 수도 있어요."

 

과도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본다. 아, 엄마를 찾는 아들에게 펠릭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까지를 도맡는다. 평소에 싫어하던 가녀린 팔목과 왜소한 발목, 가발을 쓰면 마리와 똑 닮아지는 모습. 그렇다, 그는 콜랭의 '엄마' 가 되었다.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행복하다 믿는 부자지간. 그러나 그 행복은 어느 일요일 오전 갑작스레 찾아온 마리로 인해 산산이 깨져버린다.

 

꾸며진 엄마가 아닌 진짜 엄마에게 가버린 아들, 그런 아들을 보며 질투를 느끼는 아빠. 마지막 변신을 한 그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하는걸까.

 

이 책을 읽기 전 뒷표지에 나온 문구를 보며 (아버지는 어머니가 될 수 있는가) 아버지나 어머니는 사회적인 규칙일 뿐,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오랜 시간 지속된 통념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나보다. 걷잡을 수 없는 광기? 부모의 모습에 무슨 광기가... 라고 반문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펠릭스의 광기는 광기를 넘어선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엄마로의 전환은 건너면 안되는 강이었던 것이다.

 

이미 정해져버린 사고의 단단함에 몸서리쳐진다. 한 인간의 사랑으로 덮을 수 없는 무섭도록 견고한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틀. 그럼에도 사랑으로 모든 걸 덮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저 수많은 글과 영상과 생각들에 한 표를 던지는 나는 너무 순진한걸까, 긍정적인걸까. 판단은 다음 독자인 당신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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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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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왜 읽어야 하나,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도대체 무엇을 읽어야 하나. 책을 읽어야 할, 읽고 있는,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책에 대해 하는 질문이 이런 것들이 아닐까. 정답이 있을 수도 있겠다. 가령 책은 정보를 얻기 위해, 교양을 쌓기 위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 등의 이유로 읽을 수 있다. 어떻게? 시중에 나온 수많은 책에 의하면 대세는 느리게 읽기다. 무엇을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는 인문서를 읽어라, 고전을 읽어라 뭐 그런 말들.

 

그러나.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이런 말들에 정말 동의하냐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건. 때로 위의 이유들이 맞아떨어질 때도 있겠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책'이란 읽고 싶어 읽는 것이고, 이후의 목적이야 어찌됐건 그 바탕은 항상 '무상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요컨대 '책'에 있어 읽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면 그만이란 얘기다.

 

그렇다고 책에 있어 '무상성'만을 주장하는건 아니다. 단지 동물적 욕구가 없는 행동에 다른 이유를 붙인다한들 그 마음과 행동에 진정함이 깃들 수 있을까란 의문을 제기한 것 뿐이다. 왜 이렇게 재미없는 서두가 길어졌느냐 하면,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던 한 권의 작은 책 <소설처럼>(2004.문학과지성사)을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다.

 

근래 나오는 수많은 독서 관련 책들이 여러 방법론과 이유를 그럴싸하게 대고 있지만, 이 책은 근본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한다. 어린 시절 글자와 이야기에 빠졌던 즐거움으로. 즉 소설을 '소설처럼' 읽으라고 요구한다. 아니, 요구랄 것까지도 없다. 그저 툭툭 던져대는 이야기들만으로 저자는 우리를 과거로 던져놓는다. 단 한 순간이라도 '책' (혹은 활자)의 즐거움을 만끽했던 경이로운 시간으로.

 

책은 4개의 목차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연금술사의 탄생' 에서는 아이가 이야기를 듣고, 글자를 깨우치고, 직접 책의 세계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가 이야기의 세계에 입성하는 것을 연금술에 비유하다니, 로맨틱한 사람이다!). 책을 읽다 문득 생각에 빠진다. 지금은 당연하게 책을 읽고 있는 나도 그 놀라운 시작의 시간이 있었을텐데! 마치 처음부터 잘 읽었다는 듯이 전혀 기억에 남지 않은 그 순간이 아쉬울뿐이다.

 

두번째 '책을 읽어야 한다' 에서는 시대(범람하는 영상 매체) 탓만을 하며 '책 만세!'만을 부르짖는 현실을 꼬집는다. 바로 여기서 오랜 시간 중등교사로 일하며 느껴온 그의 독서 교육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는데, 그 방법이란 '책 읽어주기'다. 서너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책을 읽어준다고? 어쩌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우리에게 있어 독서란 혼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동적인 행위로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책 읽어주기'란 '독서=어렵다'의 공식에서 벗어나 책과 화해하게 하는 가장 유용하고 색다른 방법이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세 번째 '읽을거리를 주어라' 에서는 읽어주기 방법을 통해 독서 세계에 입문한 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입시란 벽 앞에서 좌초된 아이들. 그러나 선생님이 읽어주는 파트리크 쥐스킨스의 '향수'를 들으며 그들은 독서의 세계에 빠진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듣기'만 했을 뿐인데.

 

마지막, 드디어 ~읽을 권리, ~않을 권리, 즉 책에 대해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여러 권리가 나온 '무엇을 어떻게 읽든......' 이다. 10가지의 욕구가 나오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건너뛰며 읽을 권리' 와 '소리내서 읽을 권리'였다. 모르면, 다음이 궁금하면 건너 뛸 수도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 5학년때인지 6학년때인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고 독후감을 쓴 적이 있었다. 당시로서 쉽지 않은 3권짜리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건 나름 지루하고 어려웠던 '~백과사전' 부분은 죄다 빼놓고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때부터 책에 대한 권리를 만끽하고 있던 셈이다.

 

'소리내서 읽을 권리' 또한 나를 중학교 시절 국어 시간으로 데려다 놓았다. 국어 책 내용을 돌아가며 읽고, 틀리면 다음사람으로 넘어가는 규칙이었다. 조금이라도 많이 읽으려고 틀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던 내가 떠올라 웃고만다. 그깟 읽기에 집착하던 중학생의 모습이라니. 요즘도 가끔 소리내서 책을 읽는다. (여전히 틀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건 속으로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말이 내 입에서 튀어 나오자마자 나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존재가 되는 것 같았거든요." (220p) 활자 스스로 공간을 떠다니며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느낌이다.

 

마지막 한 장. 잠시 멈춘다. 책을 마치는 아쉬움이 이렇게 몸서리치게 느껴진 적이 내 생애 몇 번이나 있었을까. 책에 글자 하나 안 적는 내가 "이 책이 나에게 오게된 건, 아, 운명이란 이럴 때 쓰는 단어일지도." 라는 같지도 않은 문장을 속표지에 적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권해준 이웃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우리 모두 생각해볼 일이다. 과연 나는 소설을 '소설처럼' 읽고 있는지. 책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일 수 있다. 그저 읽고 싶은 욕구에 몸을 맡기고 책에 대한 다양한 권리를 내세우며, 내 맘대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책에 푹 빠진 사람, 책과는 왠수진 사람, 책에 대해서 온갖 이유가 필요한 사람 모두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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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9-01-0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굼실이님, 땡스~^^
서평 보니 너무 괜찮은 것 같아서 저도 읽고 선물도 하려구요. :)

굼실이 2009-01-1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 서평 읽고 책에 관심가지셨다니 기쁜걸요:)
 
 전출처 : 굼실이 > 굼실굼실 굼실이입니다^^

 

• 나는 이런 사람이예요!
매일 읽고 싶고, 쓰고 싶어하는 못말리는 청춘. 어느 날 일어났을 때 책벌레로의 변신을 꿈꾼다.


• 내 인생 최고의 책 5권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책입니다. 처음 책과 만났던 기쁨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이 책은, 때론 추억  에 잠기도록, 때론 진짜 책의 세계에 풍덩 빠지도록, 무엇보다 원하는 대로 책을 읽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음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네요.

 

 

여자의 근본에 대해 탐구한 전경린 작가의 초기작입니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부인, 누구의 며느리로만 인식되는 우리 시대 여성의 모습을 늑대의 이미지로 재현해낸 짧고도 굵은 메시지가 인상적이었어요. 역시 여성에 대해 잘 표현하는 작가의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함께 수록된 삽화도 책과 이미지가 잘 맞는 듯 싶어요.

 

 

스무 살에 읽은 <스무 살>은 어쩜 그렇게 깊이도 파고들던지. 스스로의 내면에 침착하는 스무 살의 고뇌가 잘 드러난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스무 살이 지나면 스물 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는 문구가 참 인상적이었던 책입니다.

 

 

너무 식상한가요? 그래도 가장 오랜 시간 아껴온 책을 꼽으라면 단연 <어린왕자>가 아닐까 싶어요. 어렸을 때 처음 만났을 땐 삽화가 예뻐서, 이야기가 신비로워서 좋아했던게, 지금은 그 의미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좋아하게 된 책입니다. 관계맺음, 친구에 대해 여전히 오랜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죠.

 

 

고등학교 때, 그녀의 소설이 막 번역되어 서점에 깔릴 때 처음 만났던 작품입니다. 우리의 정서로는 쉬이 이해가 갈 것 같지 않은 소재와 주인공임에도 그녀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는 그 모든 걸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어줬죠. 여전히 이 소설을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같네요.

 

 

 

1기 알라딘 서평단으로 함께 하게 되어 반가워요! 3개월간 즐겁고 알찬 시간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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