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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한 여자가 말한다. ‘글 밖에서 지금 나는 가슴이 쓰라리다’고. 그 여자는 또 말한다. ‘이 순간, 나는 글을 쓰는 게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녀 곁으로 한 소녀가 오버랩된다.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는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소녀는 아프다. 글을 쓰는 여자도 고통에 몸부림친다. 애써 피하려한다. 그러나 결국 끄집어낸다. 오랜 시간을 몸 안에 상처로 박혀있던 기억을. 막 끄집어 올려낸 생생한 과거의 이야기와 글쓰기에 대한 처절한 고민이 뒤섞인다. 읽는 이를 어느 장소로 데려간다. 지금은 없을 기억의 공간, <외딴방>(문학동네.1995)으로.
이제 열여섯이 된 소녀는 학교에 가기 위해 공장에도 다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엄마 품을 떠나, 고향을 떠나 서울에 던져진다.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 소녀는 아둥바둥 살아간다. 작은 마음 안에는 언젠가 글을 쓰겠단 결심이 자리잡고 있다.
힘겨운 시대 속에서, 참 아프게 살아온 어린 소녀는 결국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간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품고 있던 꿈대로 글을 쓰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글 속에 유일하게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있다. 열여섯에서 열여덟. 분명히 존재했지만 글로 펼쳐나올 수 없던 시간.
이제 그녀는 힘겹게 그 기억을 끄집어낸다. 옹기종기 모여자던 외딴방을. 마냥 즐겁기엔 많은 걸 알고, 또 몰랐던 여고시절의 학우들을. 그리고 3년의 기억을 송두리째 걸어잠그게 했던 장본인, 희재 언니를.
이 책은 소설도, 자저선도 아니다. 아마 작가 말대로 그 어디쯤 중간의 이야기일거다. 그러나 아프도록 처절한 진실이 곳곳에 박여있다. 작가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그래서 몰아쳐 읽을 수 없다. 왠지, 함께 힘들어하지 않으면 여린 소녀가 내 앞에 앉아 그대로 울음을 터트려버릴 것만 같아서.
오랜 꿈이었던 글쓰기를 업으로 삼으며 작가가 되었으나 이제야 간신히 봉인된 곳을 건드릴 수 있던 여자. 그는 완벽하지 않은 글을 쓰며 끊임없이 고민한다. 나는 왜 쓰는가, 어떻게 써야하는가, 잘 쓰고 있는건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낸다.
그러나 글을 쓰는 현재에도 그녀는 여전히 절망스럽다. 글로는 그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백지 위에 옮겨놓을 수 없기에. 자신이 하고자 했던, 해오고 있는 문학의 한계 앞에서 고개를 숙여버린다. 그 고백은 솔직해서 더 아릿하다.
[나는 끊임없이 어떤 순간들을 언어로 채집해서 한 장의 사진처럼 가둬놓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으로선 도저히 가까이 가볼 수 없는 삶이 언어 바깥에서 흐르고 있음을 절망스럽게 느끼곤 한다.] p.67
질서정연하지 않은 기억 속에서 흔들리다 결국 손을 든다.
[설마 삶을 영화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삶이 직선으로 줄거리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p.167
이야기는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 시간에서 저 시간으로 맴돈다. 독자 따위 절대 배려하지 않는다. ‘삶이 직선으로 줄거리를 가질 수’없다면 그걸 옮기는 문학 또한 갈 길 모르고 헤매는 게 맞을지 모른다. 다시 만들어내는 영화와 달리 글쓰기는 생을 글자로 옮겨오는 행위일 뿐이니.
그럼에도 그녀는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의 소녀를 500여 페이지 책 속에 살려놓았다. 함께 죽은 척 스러져있던 그 시간의 사람들도. 외딴방을 현재에 되살려놓은 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앞서 이 책이 독자 따위 절대 배려치 않는다고 썼었다. 그런 책이 어떻게 오랜 시간, 많은 칭찬의 말을 들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때론 존재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 하는 책도 있게 마련이다. <외딴방>이 살려낸 건 작가 본인, 이야기 속의 인물들만이 아니다. 바로 그 시대, 우리의 모습을 살려낸거다. 어쩌면 현재 속에서 잊혀져 버렸을지 모를.
그러니 지금까지 모인 수많은 추천에 하나의 추천을 더해본다. 우리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도, 글 쓰는 행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지난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또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