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나비 중학 9-가 - 2010 완전 신판
꿈을담는틀 편집부 지음 / 꿈을담는틀(학습)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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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깔끔하네요.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습니다. 난이도도 골고루 잘 분포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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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21C 반주용 찬송가 중(中)
아가페출판사 편집부 엮음 / 아가페출판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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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정도의 크기가 보기에 괜찮을 것 같아 구매했는 데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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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기독교
베리 칼렌 지음, 배덕만 옮김 / 대장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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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기독교

베리 칼렌 지음 배덕만 옮김


이 책은 먼저 신자들의 전통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 전통의 신학적 핵심 과 제자도에 대한 설명과 그 전통이 현대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적고 있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영적인 체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의 삶, 그리고 자발적으로 예수님처럼 복음전도를 감당하는 신앙공동체 양성이다. 특히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상적 삶과 실천을 통해 복종, 양육, 협조와 봉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제도권 안에서 안주하는 교회를 비판한다.


이들은 먼저 주님과 함께 변두리에 머물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시대의 중심 문화속으로 들어갈 때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을 놓치고 현상유지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세상과 타협한 교회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없게 된다. ‘지나치게 상업화된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를 일종의 올바른 사상정도로 보는 합리주의를 신자들의 교회 전통들은 반대한다. 순례의 백성, 살아 있는 믿음을 위해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본질을 상실한 기존의 기독교 안에서 생존 하려고 몸부림친다. 그들은 급진적 선택, 곧 예수의 길, 십자가의 길 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삶 가운데 반드시 성령의 힘을 덧입어야 함을 말한다. “오소서, 성령님. 새롭게 오셔서 당신의 생명을 통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사, 당신의 뜻대로 되게 하소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다시 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준비하며 또한 이 땅에서 그러한 삶을 실제로 살려고 노력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 고난과 위험을 기꺼이 감당하게 된다.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초대 교회를 통해서 그 이상을 발견한다. 시간과 역사의 단절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종말론적 성찰과 성경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성경 말씀은 성령에 의해 생기를 얻을 때, 오늘날에도 초대 교회와 같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게 된다. 이들의 표현처럼 교회가 시대와 권력에 타협할 때 교회는 정말 죽는다. 다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에 따른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에 영에 의해 변화 되어야 한다. 이럴 때 교회는 초대 교회가 된다.


루터와 캘빈이 교회의 개별 성도들의 삶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강조했다면 아나뱁티스트들은 삶의 전 영역에서 신자가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성을 맺는데 중점을 둔다. 이들은 참된 교회의 모습을 이처럼 그리스도를 닮은 참된 증인들의 모임으로 보았다. 참된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신실한 교제 가운데 말씀이 올바로 수용되고 구체화하는 곳으로 보았다. 이들은 사색보다는 실천을 ‘합리주의적 신학’을 지양하고 관계중심의 실존주의적 성서신학을 추구한다. 오직 성서만을 권위의 원천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조직 신학보다 성서신학을 선호한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가 누구며 그가 육신에 거하고 있을 때 어떤 일을 했고 무엇을 가르쳤는지에 의해 정의한다. 예수는 모든 신학적 사고의 규범이며 핵심적 맥락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교정했고 그 결과 하나님과 의롭게 된 신자간의 연대 가능성 및 책임을 다시 허용했다. 이제 믿음을 통한 은총에 의해 새롭게 된 신자는 신적 본성에 참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칭의 은총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뒤틀린 관계를 교정하는 것이라면 성화 은총은 현재의 구원에 대한 기독교 가르침의 절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령의 목적은 신자의 삶이 가능한 한 많이 그리스도의 삶과 연합되도록 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신자의 삶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칭의 은총은 법적으로 십자가상에서 완성된 성자의 사역이며 반면 성화은총은 현재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활발하게 지속되는 성령의 사역이다. 전자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상대적 지위에 변화를 가져오며 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자자신의 실제적인 존재자체의 변화를 가져 온다고 말한다.


이들은 ‘생활 방식과 제자도’를 강조한 ‘복종의 해석학’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이 해석학의 목적은 추상적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데 필요한 지혜와 용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사도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신앙고백문이나 전통을 인정하지만 제한적인 것으로 보고 새로운 학문, 새로운 성령의 인도하심,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 부정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것을 포함한 모든 신앙고백문과 해석학적 장치들을 계속 점검하려고 한다. 성서의 자료는 ‘일차적으로 자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명제나 신적 인증을 획득한 법전 모음이 아니라 ~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역사를 통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관점에서 자신들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자신들끼리 그리고 하나님과의 상호작용 이에 대한) 반성과 분석의 기록이며 산물이다. 그리고 성서는 참된 기독교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교회내에는 강한 신념이 존재하지만 형식화된 신학, 특히 조직적이고 사색적인 성향의 신학에 대해선 기본적인 반감이 존재한다. 교회는 성서에 따른 계시 자체로부터 결코 독립할 수 없는 신앙의 이차적 언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서의 권위를 중심으로 연합해야 하며 교리적 차이 때문에 분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제자도를 강조하는데 그 초점은 믿는 바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한 개인의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이며~ 그의 정신이 예수의 가르침과 연결되는 것이고 그의 삶 전체가 예수의 권세를 중심으로 재구성되며 그가 예수의 삶의 방식을 수용하고 예수의 사명에 기꺼이 참여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생활에서 성서에 근거한 적절한 훈련이 필요하다.


이 시대 기독교 신학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해석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항상 세상과의 차이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 차이는 민족적 충성이나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성경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지는 데서 기인한다.


초기의 신앙으로 그리고 초대 교회로 돌아가려는 이들의 몸부림이 가슴으로 느껴지는 책이다. 권력과 시대의 요구에 쉽게 변해 버리고 조직화하며 대형화하여 역동성을 잃어가는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안타깝다. 이들의 말대로 교회는 효율성이 아니라 관계성에 집중하며 한 생명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생명력을 덧입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신자들은 새롭게 종말론적 신앙생활을 통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이 땅에서 그의 다스림 받는 삶을 배워 나가야 한다. 문장들이 다소 길고 복잡하고 학문적인 용어들도 많아 현실감이 떨어져 따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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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예배자 솔로몬의 축복 - 일천 번의 예배로 기적을 일궈낸 솔로몬의 축복이야기
김병태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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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갈망하기보다 하나님을 즐겨라.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거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동안,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으로 당신 곁에 머무실 것이다.’


축복은 하나님께로 온다. 는 것을 모르는 신앙인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것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쉽게 그 축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면 귀가 솔깃해진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그런데 그의 삶의 마지막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를 평가할 때 ‘가장 지혜로운 바보’ 라고 말한다. 가장 지혜로운 왕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 책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가 외적인 성전은 건립하였으되 내적인 성전을 세우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솔로몬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린아이처럼 나아가 기도했던 것에서부터 찾는다. 그리고 그가 드린 일천 번의 예배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다고 한다. 그의 기도는 확실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고 나서 그의 왕권이 안정되었을 때 그는 그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 첫 단추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 곧 이방여인과 결혼했다. 그 결과 그는 타락의 길로 들어갔다. 무엇보다 그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 자체보다 세상이 주는 축복을 더 사랑했다. 정욕에 눈이 멀었고 교만해져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전도서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라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저자는 권면한다. “하나님께 사로 잡혀서 그의 말씀에 순종하라. 하나님께 집중하라. 그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라.” 이것이 축복의 세레나데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축복의 개념을 바꾸어야 만 우리는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나를 순종시켜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경을 보고 생각하고 기도하라고 한다. 앤드류 머레이의 권면이 가슴에 와 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음과 삶에 새겨야 한다. 사랑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그것이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들은 실제로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다. 음식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도를 바르게 안내 줄 뿐만 아니라 응답을 보장한다.


세상적인 축복의 세레나데가 여기저기서 유혹한다. 그러나 눈을 들어 영적인 축복의 세레나데를 즐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땅에서 누릴 잠깐의 안락함에서(특히 경제적인 풍요로움에서 오는 즐거움) 눈을 들어 하늘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하고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예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임을 배운다.


솔로몬의 삶에서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의 지혜가 얼마나 한계적이며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약한지 깨닫고 다만 두렵고 떨림으로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


저자의 부드러운 글이 한 여름의 냉수와 같이 몸 안에 빨려 들어간다. 너무 부드러워 힘이 적어 보이지만 외적인 축복에 관심이 많은 때에 경종을 울리고 하나님께 관심 갖도록 촉구하는 저자의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에 관심을 갖고 갈망하는 이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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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 자끄 엘륄이 말하는 그의 삶과 작품 자끄 엘륄 총서 7
자끄 엘륄 지음. 빌렘 반더버그 엮음. 김재현 외 옮김 / 대장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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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제목부터가 상당히 계몽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런데 제목하고 내용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실로 오랜만에 이런 종류의 책을 집어 들었다. 읽기 전에 제목을 통해 ‘생각은 크되 실행은 작은 것부터’ 라는 내용일 거라는 오버를 했었다. 너무 순진했다.


저자는 성장 배경이 순탄치 않았다. 가난했다. 그러나 상당히 총명해서 어떻게든지 부모님은 가르칠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배경에는 이것이 큰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한다. 성경을 좋아했고 신앙생활은 하지만 깊이 자신을 드리지는 못한다. 마르크스의 영향력 때문에 성경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읽기 때문이다. 그러다 칼 마르크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역할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한계를 접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사상은 과학적이지 않고 열정적이다.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비평이 없고 오로지 상대방의 편견과 전제들에 대해서만 날카롭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의 삶과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해답이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운동을 벌이지만 결국은 실패한다. 그는 이것이 전통주의와 변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학을 마르크스 사상이라는 도구를 통해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또한 사회 부적응자와 환경에 대한 헌신을 한다. 인간이 문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해한 이 시대는 기술(테크니끄)이 지배한다. 마르크스가 ‘노동’일 가치를 창조하는 결정적인 것으로 봤다면 그는 현대 가치창조는 과학연구와 기술을 형태로 과학을 응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특정한 기술적 조작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소속된 사람들이 하는 것들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냥, 어로, 오두막 짓기, 채집 등의 행동은 기술적인 조작들이다. 18세기와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상들과 발전하여 온 현상들은 기술현상들이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기술은 효율에 의해 평가된다. 기술은 기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과 약속을 갖고 더 일하게 되고 물질적인 행복을 가지려고 영적이고 지적인 행복을 버렸다. 이러한 행복이 소비사회로 유도한다. 여기서 간과한 것은 기술은 삶이 아니라 하나의 고도로 발전한 형태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이제 기술이 하나의 기술체계(system)가 되었다. 그리고 기술 사회와 인류 사이에 혼란을 가져왔다. 정치집단은 이것을 조정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없고 새로운 조직을 찾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류는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제3세계 국가들은 밀려드는 기술체계와 기술도구들을 단기간에 수용해야 하는 데 이것은 그들은 감당할 수 없다. 서방세계들은 이러한 것들을 수용하는데 200년이 걸렸다.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교육을 통해 기술속에 살고 떠 한편으로는 기술에 대항하여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공동체속에서만 가능하다(개별적인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다). 이처럼 기술은 인간에게 낙담을 주고 절망케 한다. 인간이 기술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서 종교에 관심을 갖는다. 종교는 자연적이고 무의식적인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이러한 종교를 파괴하기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여러 형태를 신앙을 갖게 된다. 종교는 인간에게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제공해 주고 과학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격려를 해 준다.


특히 저자는 기독교 계시, 기독교 신앙에 희망이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조정되지 않고 위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러한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동화되지 않으시며 다만 인간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는 단 한분이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그가 생각한 만큼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이 불순종과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보게 된다. 좀 더 세상과 나를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해 주리라 생각된다. 딱딱하지만 머리를 녹슬지 않도록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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