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 이기환 기자의 이야기 조선사 지식기행 7
이기환 지음 / 책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건이나 사실들이 때로는 외곡되고 때로는 믿을수 없는 것들의 기록일 때도 있지만, 글로 남겨진 역사적 사실들이 꼭 한곳의 통로만 있는것이 아니어서 결국은 후대에 고스란히 남겨지는게 사실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들도 역사에 남겨질 자신의 흔적때문에 참고, 인내하고 때로는 사관에 의한 기록을 훔쳐보고 바꾸려 했던것 일것이다.

역사 드라마를 보다 보면 '아니되옵니다'로 언제나 말하는 대,간관들이 나온다. 상소를 올리고 문제거리를 남겨 답없는 논쟁만 일삼았던 것으로 인식했었던 그들은 세종, 태종, 연산군등 강력한 왕권에서도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잘못된 인사를 강행하려는 군주를 막았던 많은 예를 보게된다. 어찌보면 그들의 목숨을 건 간언과 집단 파업으로 왕과 균형을 유지하며 정치를 했던것같다.

하지만 조선하면 역시 성리학, 유교의 폐혜로 쓸데없는 논쟁과 소모를 꾸준히 하기도 했던 시기였다.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유교의 교의인 기휘(피휘)는 특히 왕의 이름자나 성인군자의 이름을 쓸수 없었다는 것이었는데, 하물며 아버지의 이름자에 '관'자인 함자가 들어 있어 '관찰사'에 임명되었어도 벼슬을 거부한 탓에 아버지의 이름자를 다른 자로 개명한 후에 임명되었다는 예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조선왕조의 대부분의 왕의 이름은 외자로 되어있다.
그것 뿐 아니라 명나라에 눈치를 보던 조선은 명나라에 기록된 이성계에 대한 내용이 이인임의 아들이고 고려왕 4명을 죽이고 왕이되었다고 기록된것을 고치기 위해 장장 200년간 굴욕작인 외교를 해야만 했다. '종계변무'가 그것인데 이를 운좋게 완성시킨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 보다 이 업적으로 으쓱해 했을 얼굴이 떠오른다.

왕을 칭할때 '조'와 '종'은 직계일 때는 종, 그렇지 않으면 '조'로 기억했었는데 실은 조는 공이 있고 종은 덕이 있을 때 붙이며 왕들은 '조'를 더 선호 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대표적인 바보왕들인 선조와 인조는 대체 무슨 공이 있단 말인가?
그밖에도 나쁜 남자 숙종, 혁명가 정도전등 걸출한 인물들은 물론 역사적으로 의미 깊었던 여러 사건들을 보고 현재와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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