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문학은 자유다>(At The Same Time) 수전 손택,

   1933 폴란드인과 유대계 리투아니아인 이민 3세대. 뉴욕 출생 2004 사망. 미국의 비평가, 소설가, 연출가.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을 처음 읽었을 때, 아니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있었나 깜짝 놀랐다. 그당시 내용을 모두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웠고, 충격적이었으며, 다음에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슬쩍 슬쩍 넘어가기도 했다. <해석에 반대한다>는 그나마 그녀의 두 번째 책을 읽는 것이라 훨씬 재밌게 읽었다. <사진에 반대한다>는 <타인의 고통>을 떠올리며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문학은 자유다> 이 책은 그 중 가장 쉽고, 재밌고, 굉장한 책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에세이집만 읽었구나. 손택의 문체는 매혹적이다. 간결하고, 단호하며, 도덕적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과 신념을 위해 당당하게 글을 쓰고, 공연을 하고, 삶을 산다. 다수에게 비판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토록 열정적이고, 진지한 작가에게 빠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책의 서문에서 손택의 딸 데이비드 리프는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고. 뭐든지 경험하고, 맛보고, 어디든 가 보고, 해 보고 싶어 했다고. 어머니에게는 삶의 기쁨과 안다는 기쁨이 완전히 일치했다고. 그녀는 죽기 살기로 진지하게 노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2004년 12월 손택이 타계하기 전 4년 동안에 쓴 에세이와 연설문을 묶은 것이다. I부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손택의 문학평론이다. 글을 읽다보면 수많은 역사의 인물들과 작가들이 나오는데, 모르는 이들을 찾아보고 메모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특히 러시아 쪽 사상가들은 거의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II부 미국의 야만성은 손택의 정치비평으로 9/11 테러 관련 글과 타인의 고문, 사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의 생각에 절대적 지지를 보낸다. III 투쟁하는 독자 는 손택의 연설들을 모은 것으로 통채로 옮겨적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시도는 해 볼 것이다) 글을 읽다 감동이 되어 눈물이 살짝 맺혔을 정도이니.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계속 숭배’ 했듯 나는 열정적이고 진지했던 손택의 삶을 숭배하고 싶다.

* 틀린 단어 - 117쪽 1971년에 -1971년이/ 140쪽 깨나 -꽤나

 

# 문화에 대해 상대주의적인 입장이 과거의 평가에 더 강한 압박을 가할수록 아름다움의 정의는 더욱 공허해졌다. 발레리는 “아름다움의 본질은 그것이 정의될 수 없다는 것에 있다.”고 했다. 아름다움은 바로 “형언할 수 없는”것이었다.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추함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추하다고 부르는 것에 대한 금기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어떤 것은 아름답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아름다움이 구별의 기준이라는 사실은 과거에는 아름다움의 강점이자 힘이었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개념의 강점이었던 것이 이제는 도리어 단점이 되었다.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움직임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성공적인 것은 미술 분야에서 일어났다. 아름다움은, 그리고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행위는 제한적(요즘 말로 하면 엘리트주의적)이 되었다. 대신 무엇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흥미롭다.”고 평가하면 훨씬 덜 배타적으로 느껴진다. 저녁놀, ‘아름다운’ 저녁놀 사진을 두고, 조금이라도 세련되게 말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하리라. “그래요, 그 사진은 흥미롭네요.” 그렇다면 무엇이 흥미로운 것인가? 대부분은 전에는 아름답다고 (혹은 좋다고) 생각되지 않던 것이다.

덧없고 사라지기 쉬운 아름다움과 달리,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억센 것이라 아무리 무자비하게 정신을 흩뜨리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겨 낸다. 전쟁이나 예견된 죽음 같은 것도 그것을 말살하지는 못한다.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은 상호의존적이다.

 

# 1926년

파스테르나크는 마리나 츠베타예바를 4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1922년, 츠베타예바가 러시아를 떠난 뒤 츠베타예바와 파스테르나크는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대화 상대가 되었다. 츠예타예바는 서른네 살이었는데, 파리에서 남편과 두 아이와 궁핍하게 살았다. 릴케는 쉰한 살이었는데, 스위스에 있는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 레오니트 칩킨은 1926년, 민스크의 유대계 러시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경제학자인 나탈랴 미치니코바와 결혼했다. 1957년에 아들과 아내와 같이 모스크바에 정착할 것을 허가받았고 사빈 소아마비 백신을 도입한 팀에 소속되어 일했다. 칩킨은 자기 시를 발표하려고 몇차례 시도했으나 다 실패로 돌아가자 잠시 동안 글쓰기를 그만둔다. 사십대에 들어선 칩킨은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시가 아니라 산문이었다. 그 뒤로 죽기까지 13년 동안 칩킨이 쓴 작품은 양이 많지 않지만 작품 세계는 점점 폭이 넓어지고 복잡해졌다. <바덴바덴에서 보낸 여름>은 일종의 몽환 소설인데 꿈을 꾸는 사람은 칩킨 자신이고, 물 흐르는 듯한 열정적인 서사로 자기 자신의 삶과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그려 낸다.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유대인은) 도스토옙스키가 유대인을 증오했다는 사실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 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민감한 사람, 능멸당하고 상처 받은 사람을 열렬히 옹호했던 사람”이 증오에 가득 차 유대인을 혐오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유대인들이 도스토옙스키에서 특히 끌리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다는 것은 문학을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 "논 삐앙게레Non piangere." 울지 마. 이것이 안나 반티의 소설 <아르테미시아>의 첫 마디다. 1944년 8월 4일. 2차 대전 끝 무렵. 이때가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주인공으로 한 반티의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울지 마. 어디에서, 누가 한 말인가? 작가의 목소리다. 무솔리니 정권 붕괴 후 나치 독일이 피렌체를 점령하고 전쟁은 무시무시한 마지막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날 새벽 4세, 독일군은 유서깊은 피렌체의 다리들을 모두 파괴하고 수많은 가옥을 무너뜨렸다. 반티의 집도 무너졌는데 그 폐허 속에 거의 완성된, 아르테미시아에 대한 새 소설 원고도 있었다.

독자가 손에 든 것은 물론 그 뒤 3년 동안에 다시 써서 1957년 말에 출간한 소설이다. 그녀의 나이 57세였다. 반티는 1985년 아흔 살에 사망 할때까지 소설 16편과 자전적 산문을 남겼다.

아르테미시아는 1600년대 여성 화가이다. 1611년, 저명한 화가인 아버지의 동료 화가가 아르테미시아를 성폭행한 일, 이 일을 공개하여 재판을 받기로 한 결정, 열띤 재판 과정에서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어린 원고를 고문한일, 아르테미시아의 승소.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테미스는 사냥의 여신이다. 직업에 있어서라면, 페르시아 해군을 이끄는 그리스 여왕만큼이나 17세기 이탈리아 여성이 각광받는 전문화가가 되어 성서나 고전에 나오는 거대 서사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여성의 분노나 희생을 담았다. 아르테미시아의 삶과 성격은 속이 보이지 않는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복종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아르테미시아가 아버지를 숭배하는 것은 안나 반티가 자기 남편을 존경하는 것이 전치된 것으로 보인다. 반티의 남편은 20세기 이탈리아에서 독보적인 비평가, 예술사가, 문화적 권위자인 로베르토 롱기였다. 반티는 롱기의 제자였다. 반티는 이 모든 활동을 함께 거들었다. 그러나 반세기 가까운 결혼 생활 내내 언제나 남편의 그늘에 머물렀으며 지적으로 지원하기만 했다. 작가로서 반티의 명성이 높아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 스승을 두었다는 게 남자 예술가보다는 여자 예술가에게 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 빅토르 세르주

세르주는 주장한다. “나는 이전 어느 때보다 인류와 미래에 강한 믿음을 갖는다.” 그랬을 리가 없는데도.

간단히 말해 그의 삶에서 성공적인 면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영원한 고학생, 떠돌아다니는 투사일 뿐이었다. 작가로서 엄청난 재능과 부지런함을 타고난 것, 신념이 있고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에 충성파, 겁 많고 어리석은 이들, 단순히 희망만 품는 이들과 상종할 수 없었던 것, 용감하고 청렴하여 사기꾼, 아첨군, 출세주의 자들과는 다른 외로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는 옳았기 때문에 소설가로서 손해를 입었다. 역사의 진실이 소설의 진실을 밀어냈다. 마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기라도 하는 듯....

프랑스 작가가 이렇게 말했다. “진실을 추구할 때 있을 수 있는 끔찍한 일은, 진실을 아는 것이다.”

 

# 할도르 락스네스 <빙하 아래>

 

# 사진은 첫째로, 보는 방식이다. 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

현대적으로 보는 방식은 파편으로 보는 것이다. 현실은 본래 무한하며 지식은 끝이 없다고 느껴진다. 따라서 경계라든가 통합하는 개념이라든가 하는 것은 오도하거나 선동하는 것이고 좋게 말해도 잠정적일 뿐이며 최종적으로는 언제나 거짓이다.

사진은 파편이고, 힐끗 보기다. 우리는 힐끗 본 것, 파편을 축적한다.

현대적인 보는 방식에서 현실은 일차적으로 겉모습이며 따라서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다. 사진은 겉모습을 기록한다.

보는 것, 그리고 그 파편의 축적은 결코 완결되는 않는다.

최종적인 사진은 없다.

 

# 적어도 60년 넘는 기간 동안 어떤 갈등이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기억되는가는 사진이 결정했다. 서구의 ‘기억의 박물관’은 거의 시각적인 것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떠올리는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사진에 대적할 만한 것은 없다.

에로틱한 삶이란 디지털 사진이나 비디오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진에 찍힌다는 것, 삶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메라의 끊임없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혹은 의식하지 않는 척하며 살아간다.

미국은 폭력의 환상이나 실천이 오락거리, 재미로 받아들여지는 나라가 되었다. 예전이라면 포르노그래피로 분류될것, 극단적인 사조마조히즘적 욕망의 실천이라고 간주될 것이, 지금 새롭고 호전적이고 제왕적인 아메리카의 사도들에 의해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장난이나 스트레스 해소라며 아주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어진다.

 

 

# 제가 생각하는 결정적 순간 가운데 하나는 1920년대 민간항공에서 영어를 국제어로 채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강력하고 결정적인 것은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공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는 지구라는 이름의 인도에서 영어의 부상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보들레르의 프랑스어를 독일어로 옮기면서 베냐민은 보들레르가 마치 독일어로 글을 쓴 것처럼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독일어 독자가 뭔가 다른 것을 느끼게끔 그 느낌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 신념이 없는 사람의 항변 :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했어.” 주어진 상황 아래에서 최선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다시 말하자면 저항 자체에는 우월한 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항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저항하는 사람이 정의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바가 옳으냐 그르냐에 달려 있습니다.

1846년 소로가 미국의 멕시코 전쟁에 저항하는 뜻으로 인두세를 내지 않아 감옥에 간 일은 전쟁을 막는 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벼디가벼운 처벌을 받아 잠깐 투옥된 일의 반향은 계속되어 20세기 후반 내내 그리고 현재까지 부당함에 대한 원칙 있는 저항에 영향을 줍니다.

미국인들은 세계를 적으로 보는 관점에 익숙해 있습니다. 싸움이 늘 벌어지니 적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러시아와 중국 공산주의를 대신해 끈질기고 은밀한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등장했습니다.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는 ‘공산주의자’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쓸 수 있습니다. 아주 다양한 투쟁과 이해를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죠.

 

문학은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문학은 언어, 서사를 가지고 형상화된 기준을 제공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가 아닌, 우리의 것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슬퍼할 능력을 길러 줍니다. 우리가 아닌, 우리의 것이 아닌 사람에게 공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자기 자신을 머리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이라면요? 배울 수도, 용서할 수도,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도 없는 사람이라면요?

 

# 작가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단어를 사랑하고 문장을 두고 고민하는 것.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호프에게 자극과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시대에 태어날 것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아는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지요.

문학에 매달리는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고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어떤 것이 낫고 어떤 것은 나쁜가, 혐오스러운 것과 존경스러운 것은 어떤 것인가, 개탄할 일은 무엇이고 기뻐할 것은 무엇이고 인정할 것은 무엇인가. 직접적으로 생경하게 교훈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한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지요.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자면 소설은 공간과 시간 둘 다의 이상적인 매개체입니다.

시간이라는 차원은 산문 소설에 필수적이지만, 문학을 둘로 분류하는 고전적 사고를 빌려 말하자면 시(서정시)에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습니다. 시는 현재에 존재합니다. 시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라 할지라도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비유는 시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학과 책에 반대하는 주장 뒤에 있는 진정한 힘은 텔레비전이 제안한 서사 모델의 지배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결말은 삶에서 얻을 수 없는 자유를 줍니다. 소설의 재미는 바로 그것이 결말을 향해 간다는 데서 나옵니다.

저는 이야기와 정보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이야기는 결말, 완결, 종결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정보는 정의상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것입니다.

이 둘은 문학과 텔레비전이 제안하는 대조적인 서사 모델과 평행을 이룹니다. 문학은 이야기를 하고, 텔레비전은 정보를 줍니다. 문학은 끌어들입니다. 문학은 사람들 사이의 유대의 재창조입니다. 텔레비젼은 거리를 둡니다. 우리를 무관심의 벽 안에 가둡니다.

대중매체가 쏟아내는 끝없는 이야기들이 제공하는 둔감함, 몰이해, 수동적 낙담, 그에 따른 감정의 둔화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번역이란 경계를 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 ‘모던’한 사회에서는 이제 점점 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텔레비전, 엠티비, 인터넷 등 대중매체의 헤게모니는 오직 하나의 문화만이 존재한다는 것, 경계 밖에 있는 것도 다 마찬가지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지구상 모든 사람이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제조된 표준화된 오락과 성과 폭력의 환상을 먹고 지내니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끝이 없고 걸러지지 않은(그러나 사실상 검열된) 정보와 의견의 흐름 속에서 교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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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동

 

아내는 반 홉 소주에 취했다 남편은 내내 토하는 아내를 업고

대문을 나서다 뒤를 돌아보았다 일없이 얌전히 놓은 세간의 고요

 

아내가 왜 울었는지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남편은 미끄러지는 아내를 추스르며 빈 병이 되었다

 

아내는 몰래 깨어 제 무게를 참고 있었다 이 온도가 남편의 것인지

밤의 것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깜깜한 밤이 또 있을까 눈을 깜빡이다가 도로 잠들고

 

별이 떠 있었다 유월 바람이 불었다 지난 시간들, 구름이 되어 흘러갔다

가로등이 깜빡이고 누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을 뺀 나머지 것들이

조금 움직여 개가 짖었다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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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김수영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풀이 눕는다' 였다. 그때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풀의 연약하면서도 강인함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여 외우고 다녔다. 강신주 작가의 책은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두 권을 읽었다. 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보는데 깔끔한 표지가 마음에 들어 살펴보니 강신주 작가가 김수영 시인에 관해 쓴 책이었다. 그의 책을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어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할까 궁금한 마음에 책을 펼쳐 보았다.

   김수영은 1921년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1941년에 유학차 일본으로 건너가 연출 수업을 받았다. 1950년 김현경과 결혼하였으나 6.25가 일어나 의용군에 강제 입대, 북행하였다. 평남 개천 야영훈련소에서 1개월 동한 강훈련을 받은 뒤, 순천군 중서면 부근에 배치되었다가 UN군의 진주로 자유인이 되었다.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남하하였으나 경찰에 체포,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52년 석방되었다.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하였다. 1968년 버스에 치여 사망하였다. 1974년 <거대한 뿌리> 간행되었다.

    작가는 김수영 시인의 팬이다. 그는 김수영의 삶을 사랑하고, 삶을 통해 써내려가는 시를 사랑한다. 김수영은 어찌보면 위험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거침없고, 당당하며, 우리들이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치부와 상처까지도 냉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편한지도 모르겠다. 김수영은 온몸으로 밀어붙이면 그것이 바로 시가 된다고 하였다. 이 책은 김수영이 썼던 시들, 그 시가 나오게 된 배경, 김수영이 살아내야 했던 시대를 보여준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갇히고(나는 포로가 된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사는 것을 보고, 자유가 억압받는 시대를 견뎌야만 했던 김수영. 그의 시가 우리를 깨우게 하는 것은 그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자유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독립성’을 원하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나니 시인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좋다. 글과 함께 있는 그림들도 좋다. 왠지 그동안 어려워했던 김수영 시인에게 한 발짝 다가간 느낌이다. 그러나 서정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살짝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김수영은 ‘관념에서의 자유’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힘든 시대적 상황에서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쓰는 낭만적인 시가 ‘도피’가 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땐 따뜻하고 서정적인 시가 마음이 끌린다. 안일하게 마음만 다독거리는 현실 도피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시를 읽으며 그래 다시 한번 살아보자. 얼굴 찌푸리지 말고 웃어보자 라며 삶을 긍정하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수영의 사상을 완전히 동의하는 것에 나는 조금 머뭇거리고 있다. 아마 그가 너무 곧아서일 것이다.

 

#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도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을 가졌다는 것, 다시 말해 자유의 존재라는 것.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온몸으로 배운 교훈 아닌가? 그렇지만 사랑의 경우에서만큼은 여자의 내면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가질 때는 그녀의 내면을 읽으려 하지 않았고, 반대로 여자와 정신적 관계를 가질 때는 육체관계를 나눌 수가 없었다.

# 오직 단독적인 삶을 살아낸 사람만이 삶의 보편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火焰)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육체로서-추구할 것이지, 시가-기술면으로-추구할 것이 아니다. -시월평: 모더니티의 문제. 김수영

 

# 어린아이도 어른이 되지 못한 미성숙의 상태가 아니라 그만의 고유성을 가지는 것이며, 어른도 어린아이의 성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만의 고유성을 가진다. 어쩌면 단독성의 이념은 ‘영원한 현재’에 있지 않을까?

 

# 불행히도 모든 교육은 단독성을 개화시키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신봉하는 가치를 주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단독성을 회복하려는 순간, 당연히 가정이든 학교든 군대든 회사든 권력을 쥔 자들로부터 탄압받기 마련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생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로부터 스스로 단독성을 부정하는 개인들이 탄생한다. 외적인 탄압과 억압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런 불행한 개인들은 오히려 타인이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 쉽다. (중략) 시는 자신들이 애써 은페하려던 단독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들은 조금씩 자신이니까 살 수 있는 삶, 자신이니까 느낄 수 있는 감서, 자신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사유를 영위할 것이다.

 

# 인문(人文) 이란 말은 매우 잘 만든 말이다. 사람을 뜻하는 인과 문양이나 표현을 의미하는 문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으니 말이다. 인문학은 사람과 그의 표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 카프카는 1904년 1월 27일 어느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 시적 인식이란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이며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과 각도의 발견인데., (...)시에 있어서 인식적 시의 여부를 정하려면 우선 간단한 방법이, 거기에 새로운 것이 있느냐 없느냐, 새로운 것이 있다면 어떤 모양의 새로운 것이냐부터 보아야 할것이다. 인식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시월평: 시적 인식과 새로움. 김수영

 

# 무슨 일로 아내를 때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는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의 여부만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한 김수영이 최소한 사랑만큼은 자신의 제스처로 살아 내지 못한 것이다. (중략)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야만, 인간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제대로 미워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아내를 때린 날 김수영이 뼈저리게 깨달은 바다.

 

# 여기서 우리는 ‘관념에서의 자유’와 ‘삶에서의 자유’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솝 우화>에 신 포도 이야기가 등장한다. (중략) 그러자 여우는 속으로 말한다. “저 포도는 신 포도야.”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여우는 포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관념에서의 자유’다. (중략) 이런 관념에서의 자유는 포도를 따 먹으려는 의지를 좌절시키고, 끝내는 실천에의 전망도 봉쇄해 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도피자”나 “기만적 유심주의자”의 전략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만적 책략은 진정한 인문주의자를 만나는 순간 여지없이 좌절된다. 진정한 인문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물어 볼 테니까 말이다. “여우야, 너는 먹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포도가 시다는 걸 알았니?” 관념에서의 자유가 허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여우는 어떻게 할까? 아마 여우는 지금 자신의 방식으로는 포도를 딸 수 없다는사실을 자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포도를 따려고 할 것이다. 마침내 여우는 실천적 전망을 확보하면서 ‘삶에서의 자유’로 한 걸음 내딛게 될 것이다.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성(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 나가게

물어 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 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憐憫)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긍지의 날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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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의 시학 서정시학 신서 4
이어령 지음 / 서정시학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이어령 작가가 쓴 것이라 관심이 갔다. 하이쿠에 관한 책도 썼구나. 하이쿠가 무엇인지, 현재 하이쿠에 관해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자세하게 알려준다. 또한 시조와 하이쿠가 어떻게 다른지도 알 수 있다. 이 한 권에 책에 하이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작가의 예리한 분석과 설명이 마음을 즐겁게 한다. 책 머리에 작가는 이렇게 썼다. ‘저 오랜 것으로부터 영원한 새로움의 시에 눈뜰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나니 하이쿠의 매력에 눈이 번쩍 떠지는 기분이다.

 

# 말 한마디 없이 손님과 주인과 하얀 국화와 -료타

료타는 이렇게 읊고 있다. 손님과 주인 사이 하얀 국화처럼 시의 언어는 작자와 독자 사이에 놓인다. 이것은 작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흰 국화가 흰 국화로 있게 될 때 말은 없어도 손님과 주인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하이쿠는 하이쿠 그 자체의 구조로 읽을 때 전 가을 공간에 향기를 내뿜는 흰 국화처럼 널리 이해될 것이다. 시로서의 하이쿠야말로 공시적 구조를 지닌 하나의 사물로서 그리고 세계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하나의 현상 그 자체로서 독해되어야 한다.

 

# 소나무에게 관한 것은 소나무에게 배워라. 대나무에 관한 것은 대나무에게 배워라 라고 말한 것이 바쇼의 시학이다. 사물을 대하는 바쇼의 눈은 플라톤의 ‘이데아’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 하이쿠는 시간의 문학이며 장소의 문학이며 또한 마음의 색깔을 형태로써 사물로써 나타내는 사물의 문학이다. 귀로 하이쿠를 듣지 말라. 눈을 하이쿠를 보라 고 바쇼는 말했다.

 

# 롤랑 바르트는 그의 일본문화론인 <기호의 제국>에서 하이쿠의 운명에 대해 말한다. ‘하이쿠는 의미의 완전한 배제를 완성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하이쿠가 하는 일이다. 하이쿠는 우리들에게 저항을 하고 바로 직전에 주어진 형용사를 끝내는 소실시키는 의미의 무중력 상태 속에 빠져든다. 이 의미의 무중력 상태만이 우리들의 언어에서 가장 널리 행해지고 있는 조작 다시 말하면 주석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옳거니 무사타 어제는 지나갔네 복어찌개여 -바쇼

 

새벽 노을이여 보리의 잎새 끝에 봄날의 서리 -오니쓰라

 

이봐 잠깐 멈추게. 꽃을 보며 종치는 것은 -마쓰에 시게요리

 

종소리 사라져 꽃향기 울려오는 저녁일런가 -바쇼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 -바쇼

 

뛰는 솜씨 서툰 벼룩 귀엽기가 더해라 -잇사

 

사람이 오면 개구리가 되거라 물에 채운 참외야 -잇사

 

돋는 달님 저무는 해 그 사이의 고추잠자리 -니큐

 

새빨간 열매 하나 떨어져 구르네 서리내린 마당 -시키

 

장맛비로다 큰 강을 앞에 두고 집이 두 채 -부손

 

만들던 그때부터 낡아 있는 허수아비여 -노후

 

대합조개가 입을 악물고 있는 더위이련가 -바쇼

 

겨울날이여 말 위에 얼어붙은 그림자 있어 -바쇼

 

선득선득한 벽을 밟으면서 낮잠을 자고 -바쇼

 

산길을 지나다 보면 어쩐지 좋아라 오랑캐꽃 -바쇼

 

길가에 핀 무궁화여 말에게 먹혀 버렸네 -바쇼

 

꾀꼬리 울어 그 작고 작은 주둥이 벌려 -부손

 

기어라 웃어라 두 살이 되었단다 오늘 아침에 -잇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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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하이쿠 선집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4
마쓰오 바쇼 외 지음, 오석륜 옮김 / 책세상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이미 네시/나는 아홉번 일어났다/달을 사랑하기 위해’ 라는 문장을 보고 와~ 이건 뭐지? 했다. 알고 보니 바쇼가 쓴 하이쿠였다. 그때부터 하이쿠의 매력에 폭 빠졌다. 하이쿠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다. 쉽고, 재미있고, 즉각적으로 그 상황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책은 하이쿠의 대가들이라 할 수 있는 시인들의 작품을 모으고 시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 마쓰오 바쇼(1644-1694), 요사 부손(1716-1783), 고바야시 잇사(1763-1827), 마사오카 시키(1867-1902), 가와히가시 헤키고토(1873-1937) -

   하이쿠는 5.7.5의 17자로만 구성된 짧은 시이다. 하이쿠에는 계절을 상징하는 계절어가 있어야 하고, 5.7.7의 어느 한 단락에서 끊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기레지) 하이쿠를 읽다보면, 감동이나 기쁨과 의문을 나타내는 ~여, ~로세, ~구나 같은 글자들이 나온다. 이것을 ‘기레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이쿠의 가장 큰 매력은 변화하는 사계절을 소재로 자연, 동물과 인간의 교감, 때로는 지나간 시간과의 교감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감동이 동반된다. 하이쿠는 서정시이다. 불과 열일곱자에 서정이나 계절이 펼쳐 있는 셈이다.

 

# 종소리 사라져

꽃향기 울려 퍼지는

저녁이로세

 

오랜 연못에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텀벙’ -바쇼

 

# 모란은 지고

부딪쳐 겹쳐지네

꽃잎 두세장

 

도끼질하다

향기에 놀랐다네

겨울나무 숲 -요사 부손

 

# 맑은 아침에

탁탁 소리를 내는

숯의 기분아

 

조용함이여

호수의 밑바닥에

구름 봉우리 -고바야시 잇사

 

# 맨드라미가

열네다섯 송이는

있을 터이다

 

귤을 깐다

손톱 끝이 노란색

겨울나기여 -마사오카 시키

 

# 빨간 동백이

하얀 동백과 함께

떨어졌구나

 

생각지 않은

병아리 태어났네

겨울의 장미 -헤키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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