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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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몹시 힘들 때 읽었다. 기쁘고 명랑한 상태였다면 읽다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문장들이 마음을 다독였다.

 

* 독서로 자유를 얻는다. 독서로 객관성을 획득한다. 나는 내가 되기를 멈추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만둔다. 내가 읽는 것은 때로 나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의복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명료함이고, 만물을 비추는 태양이고, 고요한 대지에 그림자를 드리운 달이고,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간이고, 녹색 이파리를 흔드는 나무의 견고함이고, 농장 연못에 깃든 평화이고, 포도나무 덩굴이 우거진 해안의 비탈길이다. 78

 

* 포기는 자유다. 원하지 않는 것이 힘이다. 163

 

* 그렇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실이기에 다들 스스로를 잃어버리며 산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기쁨 없이 나를 잃어버린다. 201

 

* 철자법도 인격이기 때문이다. 단어는 보이고 들릴 때 완성된다. 그리스 로마 알파벳의 호화로움은 단어에게 왕실의 가운을 입혀 숙녀와 여왕으로 만들어준다. 333-4

 

* 예술은 왜 아름다운가? 쓸모없기에 아름답다. 삶은 왜 흉측한가? 온통 목적과 목표와 의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흉측하다. 인생의 모든 길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존재한다. 413

 

* 일본산 찻잔 세트의 잔 하나가 깨졌을 때, 나는 그 원인이 하녀의 부주의한 손길이 아니라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고뇌라고 상상했다. 그들의 은밀한 자살 결단은 내게 그다지 놀랍지 않다. 우리가 권총을 자살에 이용하듯 그들은 하녀를 이용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나처럼 정확히 안다는 것은) 현대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다. 514-5

 

*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각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사소한 일로 터무니없이 동요하고 몸서리를 친다. 날씨가 흐리다고 괴로워하는 자는 비범한 지성을 갖춘 사람이다. 대체로 인류는 둔감해서 날씨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날씨는 항상 거기 있는 거니까. 인류는 비가 자기 머리에 떨어지지만 않으면 비를 느끼지도 못한다.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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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왜 쓰는가
제임스 A. 미치너 지음, 이종인 옮김 / 예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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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한 소설은 인물들로부터 시작하고 그들과 함께 지적,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인물들은 그들이 처해진 상황, 그들의 시대적 주제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위대한 소설은 작가가 외롭게 인간의 경험을 탐구하는 데서 얻어진 것이지 학술적 조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제인 오스틴, 투르게네프, 그리고 헨리 제임스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물론 소설은 학술적 조사를 바탕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조사는 예술적 견지에서 볼 때 늘 이차적인 기능에 머물고 만다. 조사를 바탕으로 한 작가들이라면 에밀졸라, 발자크, 톨스토이, 디킨스, 드라이저 등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훌륭한 소설들은 늘 예술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95

 

 

* 내가 작가로서 그 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이 연면한 창작의 흐름 속에서 읽기는 쓰기를 낳고, 다시 쓰기는 읽기를 낳는다. 나는 발자크, 카뮈,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 디킨스, 하디, 멜빌, 치버 등의 작가를 읽지 않고 문학을 해보겠다고 덤비는 문학청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게 된다. 도대체 아무런 밑천도 없이 어떻게 준엄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높은 수준을 획득한다는 것인가?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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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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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부코우스키의 책을 접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읽으면서 대체 이건 뭐지? 라는 생각뿐이었다. 책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세월은 흐르고, 얼마 전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라는 그의 말년 일기를 모아놓은 책을 발견했다. 다시 도전해 보는 심정으로 읽었고, 책은 꽤 좋았다. 이제 그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하여 펼쳐든 책은 <펙토텀>. 그의 분신인 주인공이 잡일을 구하고 그만두고 섹스를 하고 술을 마시고 다시 직장을 구하고 그만두는 평범한, 그러나 일반인이 보기에는 매우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그린 소설이다. 조르바 같은, 세상의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의 삶을 들여다본 심정이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일을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글만 쓰며 살고 싶어하는 그의 간절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나는 침대로 들어가 포도주 병을 따고, 베개를 등받이 삼아 뒤에 단단히 받치고, 숨을 깊에 들이쉰 다음, 어둠 속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난 닷새 동안 혼자 있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고독 속에서 자란 인간이다. 내게 고독이 없다면, 그건 다른 사람에게 음식이나 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독이 없는 하루하루는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고독을 전혀 떠벌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에 의존할 뿐이다. 방 안의 어둠은 내게는 햇살과도 같았다. 나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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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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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을 쓰고 싶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매달마다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내게는 책의 형태로 다가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한 해 중 열한 달의 경우에는 실제로 그렇다. 그렇지 않은가. 책은 다른 어떤 것보다 훌륭하다. 문화 매체를 가지고 권투 경기를 진행한다고 상상해보고, 책을 링 위에 세워놓고 다른 예술 형식과 맞붙게 한다면, 거의 모든 경우에 책이 이길 것이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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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여자가 되는 법 -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괴짜 칼럼니스트의 여자 생태보고서
케이틀린 모란 지음, 고유라 옮김 / 돋을새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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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표지만 봤다면 절대 읽지 않았을 책이다. 진짜 여자가 되는 법이라니!! 이런 유치한 제목이....칙릿 소설이나 그런 류의 에세이라고 무시했을 가능성이 100%이다. 하지만 지인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얘기를 듣고, 어라? 내 생각이 틀렸나 하는 마음에 허겁지겁 책을 펼쳤다. 책을 읽으니 내가 겉만 보고 착각했음이 100% 증명되었다. 비록 레이디 가가에 대한 저자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글을 유쾌하고, 솔직하고, 훌륭하다. 서울-대전 간 무궁화 호를 타고 가며 오며 왕복 4시간 동안 책을 읽느라 일 분도 졸지 않았다. 피곤했지만 책이 재미있어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 사람들은 여자라면 누구나 아이를 낳아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이런 질문에 실없거나 유치하게 대답하며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척하지만, 점점 더 압박이 심해지면 여성성은 유아용품점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끝나게 된다. 모두 그렇게 끝이 난다. 모든 여자들이 마놀로 브라닉이나 조지 클루니를 사랑하듯 모든 여자들은 아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운동화만 신고 다니거나 레즈비언이거나 구두를 진짜로 싫어하거나 조지 클루니를 싫어하는 여자라도 아기는 좋아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보이는 여자마다 언제 결혼하고 언제 아기를 낳을 거냐고 묻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 여자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자에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어디서 정자가 돌아다니고 있는지를 보라고 재촉한다. 나중에 정자가 필요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333-4

 

 

 

* 하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여성에게는 매우, 매우 힘든 결정이다. 사회 분위기상 여자들이 ‘낳지 않기로 했어’나 ‘생각만 해도 기분나빠’라는 말을 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이런 여자들을 ‘이기적’이라고 한다. ‘아이가 없다’라는 말은 상실이나 결여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엄마가 아닌 여자들에 대해 10대 소년들 혹은 남자들처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늑대들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30대에 끝나버리기를 바란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않고‘ 아이를 갖는 바람에.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 아이가 없는 여자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고리타분한 믿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번식을 해야 한다거나, 당신이 지구상에 태어난 이유는 당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보다 개인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게 비하적인 요소들이 뒷받침되어 있다. 여자들은 아기를 낳아야 드디어 어른이 된다는 식이다. 여자들은 아기를 낳음으로써만, 보다 어린 존재를 생산하는 능력에 의해서만, ‘연장자’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다른 경험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아기를 낳아야만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비루하고 조잡하기만 하다. 마치 엄마들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처럼, 아이 없는 여자들은 삼류대학의 삼류학위나 받은 것처럼 여겨지는 꼴이다. 3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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