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근대와 영문학
정정호 지음 / 태학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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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책 전반에 걸쳐 포스트모던이 무엇인지, 문학 이론의 흐름은 어떤지, 탈근대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체적인 틀을 잡아주기 때문에 그동안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포스트모던과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3장 <아메리카적 토착성과 타자의 목소리들> 부분에서 다룬 윌리엄즈 시 분석과 4장 <사이버 스페이스 소설의 미학과 정치학> 부분에서 다룬 윌리엄 깁스의 <뉴로맨서> 작품 분석이 매우 재미있었다. 그중 몇 부분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적 요소들을 8가지로 나눠보자면

1. 불확정성(indeterminacy) : 애매모호성. 불연속. 이단. 다원론. 임의성. 반역. 곡해. 절충주의. 무작위성. 해체. 변용.

롤랑 바르트 -문학작품의 목적은 독자를 텍스트의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 로 만드는 것.

2. 단편화(fragmentation) : 몽타주 기법. 콜라주. 혼성모방

3. 탈정전화(decanonization) : 타자에 대한 관심 고조. 서구 중심주의/엘리트주의/남성위주 반대. 제3세계문학/소수민족문학/대중문학/노동자문학/여성문학/변두리문학 옹호.

4. 혼성모방(hybridization) : 풍자적, 조롱적인 희화. 우스꽝스러운 모방. 허구와 사실의 배합.

5. 대중주의(populism) : 대중문화에 관심.

6. 퍼포먼스(performance) :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간극 수정. 행위 예술.

7. 재현불가능성(unrepresentable) : 모방(미메시스)거부. 문학의 한계 추구. 반리얼리즘.

 

* 비평과 이론의 차이

1. 비평은 문학 자체에 대해 부차적인 것이며 문학 텍스트 이후의 작업이다.

비평적 해석이나 가치판단은 비평이 다루는 문학텍스트가 의심할 수 없는 문학이라고 가정.

2. 이론은 비평 작업 자체가 글쓰기와 지식의 몸체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보고 문학이 비평에 종속될 수도 있고 문학 비평 또는 이론이 없으면 문학 자체도 없다고 까지 생각.

 

* 서구인들의 정전화의 기준과 평가기준은 분석, 비판, 검토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들의 지배자 논리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체제 우위를 인정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 William Carlos Williams

윌리엄즈는 미국의 동부 한복판에서 특권층의 하나인 의사로서 살면서 언제나 자신을 타자화하면서 시 창작에 임하였다. 그는 우리의 일상적인 총체적 삶 속에 고묘하고도 은밀하게 침투되어 내장되어 있는 모든 종류의 억압-착취-차별 이데올로기를 큰 소리내지 않고, 그러나 신랄하게 노출시키고 폭로하고 있다. 과거 미국은 언제나 유럽의 타자였다. 그는 미국적 지방성을 하나의 독창성으로 파악하여 미국 예술은 그 공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는 파운드나 엘리엇과는 달리 영국이나 유럽의 고전에 대한 인유나 인용이 거의 없다. 그에게 시는 관념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이다.

 

Metric Figure

 

There is a bird in the poplars!

It is the sun!

The leaves are little yellow fish

swimming in the river.

The bird skim above them,

day is on his wings. ...

It is his singing

outshines the noise

of leaves clashing in the wind.

 

 

a black woman

 

Carrying a bunch of marigolds

wrapped

in an old newspaper.

She carries them upright

bareheaded

the bulk

of her thighs

causing her to waddle

as she walks

looking into

the store window which she passes

on her way.

 

What is he

but an ambassador

from another world

a world of pretty marrigolds

of two shades

which she announces

not knowing what she does

other

than walk the streets

holding the flowers upright

as a torch

so early in the 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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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s Arrow : SHORTLISTED FOR THE BOOKER PRIZE 1991 (Paperback)
Amis, Martin / Vintage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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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화살』은 유태인을 학살시키는데 동참하였던 가해자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소설의 구성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 시간의 역순이다. 즉 시간이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에이미스가 후기에서도 언급했듯 시간의 역순 방식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의 소설 『제 5 도살장』(Slaughter-house Five)에서 빌리(Billy)라는 인물이 2차 세계 대전 비디오를 거꾸로 돌려보는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시간의 화살’이라는 단어는 본래 에딩턴 경(Sir Arthur Eddington)이 열역학 제 2법칙을 가리켜 비유한 것으로, 그는 시간에 따라 무질서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은 시간에 방향(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을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시간의 화살』은 열역학적, 심리적, 우주론적 시간의 화살들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이다. 따라서 주인공은 죽음의 순간에서 깨어나 점차 젊어지며 마지막에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즉 과거-현재-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의 방향성이 뒤집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특이한 점은 주인공 안에 등장하는 또 다른 ‘나’이다. 작가는 주인공 토드(Tod Friendly)의 분리된 자아의 설정이 리프턴(Robert Jay Lifton)의 『나치 의사들』(The Nazi Doctors)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리프턴은 아우슈비츠에서 행한 나치 의사들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이중’(doubling) 자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즉 각각의 독립된 자아가 전체 자아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시간의 화살』에서 주인공은 토드이지만 이야기를 서술해 나가는 화자는 토드가 아닌 토드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인 ‘나’ 이다. ‘나’와 토드는 하나의 몸을 공유하고 있고 특정한 꿈을 함께 꾸기도 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는 자아이다. 토드의 원래 이름인 운베르도르벤(Unverdorben)이란 이름도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독일어인 verdorben은 ‘썩은’, ‘타락한’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거기에 un이 붙어 반대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성(姓)또한 그와 이중 자아를 암시하고 있다이처럼 소설의 화자인 ‘나’는 토드와 분리되어 있지만 특정한 시기에는 합쳐지기도 하며 소설을 기술해가고 있다. 작가는 시간의 역순이라는 설정과 이중 자아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을 소설의 기본 틀로 설정하고 홀로코스트의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시도한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주인공의 범죄가 재구성되는 것을 지켜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미국 북동쪽 웰포트(Wellport)에 살고 있는 노인이다. 그리고 그는 시간의 역순에 따라 뉴욕시(New York City)로 이동하며 그의 이름은 존 영(John Young)으로 바뀌어 있다. 좀 더 젊어진 그는 1948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의 첫 번째 정착지인 포르투갈(Portugal)에서 그의 이름은 해밀턴(Hamilton de Souza)이다. 다시 그는 로마로 이동하며 마침내 아우슈비츠에 다다른다. 아우슈비츠에서 그는 오딜로(Odilo Unverdorben)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역사적 책임감을 가지고 유대인을 학살하고 실험한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캠프는 점차 작아지고 오딜로의 아내 헤르타(Herta)가 종종 그곳을 방문하며 남편을 향한 그녀의 태도는 적대적이었다가 점차 중립적이거나 의심하는 것으로 변해간다. 헤르타는 임신했으나 그녀의 부푼 배는 곧 납작해지고 아이는 헤르타의 자궁으로 사라지며 오딜로는 오스트리아에서 불구이고 정신병이 있는 사람들을 치료한다는 목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는 의학 대학에 들어가고 부모와 함께 살며, 곧 아기가 되고 마지막에는 어머니 자궁으로 들어간다. 1980년대에서 1916년대까지 시간의 역순에 따라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가 홀로코스트 범죄에 가담했던 나치 의사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끊임없이 변해가고 주위 상황 묘사가 거꾸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흐름을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

   덕분에 책을 읽고 또 읽게 해 주었으니 작가에게 고맙다고 해야하나? 번역본이 나오면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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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 신기주 사회비평 칼럼집
신기주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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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비평 칼럼집이라는 소제목답게 저자는 다양한 관점에서 사회를 분석하고 쓴 소리를 던진다. 글에는 다분히 작가만의 정치적 색깔이 묻어나기 때문에 간혹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말은 일리가 있고,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사상?에 물들 수 있다. <에스콰이어>에서 글을 쓰는 기자답게 글은 깔끔하고 명료하다.

   신기주는 작가의 글에서 “우리”를 정의한다. 정치에서는 유권자이고 경제에서는 소비자이며 대중문화에서는 대중이고 군중이었다가 민중이었으며 민초였다가 관중이었다가 관객이었다가 국민이었다가 서민이었다가 우민으로 전락한다고. 우리는 그때그때 다른 가면을 쓴다. 작가는 그런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정치와 경제에 영혼을 판 것은 아니냐고. 왜 우리는 의심하지 않냐고. 한국 사회에서는 우리가 우리를 착취한다. 그게 우리란 걸 우리만 모를 뿐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에 속하는 나를 샅샅이 들여다보게 되어 부끄럽고, 흥미롭고, 유쾌하였다.

 

 

# 강남 좌파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성 탓에 자기 삶의 취향을 포기하진 않는다.

물질주의에 중독됐다고 비난받더라도 멋과 맛을 누리는 게 죄는 아니다.

강남 좌파는 좌파진영 안에서는 커밍아웃할 수 없는 게이와 같다.

우파에게 서민 우파는 포섭의 대상이다. 좌파에게 강남 좌파는 질시의 대상이다.

1990년대 초반 막걸리 대신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동아리 후배를

부르주아라고 비난하던 습성이 좌파 안에 고여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정치를 도덕 논쟁으로 착각하는 습성이 남아 있다.

부에 대해서도 도덕적인 비판을 가하려는 습관이 남아 있다.

여전히 정치를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구도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어떤 가치를 옹호하느냐이지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느냐가 아니다. 45-46

 

 

# 가십의 본질은 흉보기다. 흉이란 한자로 뜻을 풀면 무서운 글자다. 126

 

# 우리시대의 신은 결국 스타들이다. 아름답고 쉽게 가 닿을 수 없다는 점에선 똑같다.

로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스타들의 가십을 즐겨 얘기하면서 안심한다....

가십은 신이 되지 못한 우리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장치다. 130.

 

# 결국 우리의 자아정체성은 누더기와 같다는 뜻이다.

나라는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 다양한 타자의 정체성을 흡수한다.

그렇게 짜깁기한 정체성들을 소화해내면 자기만의 자아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물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157.

 

# 기술에 탐닉하는 피겨스케이팅을 예술로 이끈 건 드문드문 나타났던 위대한 예술가들이었다. 동독의 카트리나 비트와 미국의 미셸 콴 같은 전설들이다.

카트리나 비트는 매일 천 번씩 거울 앞에서 미소를 짓는 연습을 했다.

그녀는 완벽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좇았다. 지금 김연아는 그 길을 걸어가려 하고 있다. 263.

 

# 사람들은 상자 안에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생각의 상자를 정해버리면 그 안에서만 논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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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 동녘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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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랑바르트의 사상을 접근하기가 어려워 <사랑의 단상>, <기호의 제국> 같이 잘 알려진

책만 몇 권 읽다 이 책을 발견했다. 쭉 넘겨보니 <사랑의 단상>처럼 그가 틈틈히 사유한 모아놓은 것 같아, 그래 이건 좀 쉽겠지, 하고 읽기 시작했으나 결론은 흠....

   이 책은 바르트가 사망하기 5년전에 발간되었다. 자기 자신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 자전적

에세이 겸 평전으로 일련의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어 독서가 쉽지 않다.  

  저자는 책 앞장에서 ‘이 책에 씌어진 모든 것은 소설 속의 인물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적어놓았다. 책 처음 부분에는 롤랑 바르트와 관계된 여러 사진들이 실려있어 흥미롭게 보았다.

 

  에릭 마르티(Eric Marty)는 <프랑스 지성인 사전>에서 바르트의 생애를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60년에 이르기까지로서, 이 시기는 작가의 책임을 강조하던 <글쓰기의 영도>시기. 일상적인 스테레오타입과 대상 속에 현존하는 이데올로기 체계를 탈신비화시키던 <신화학>시기, 세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평을 기호에 대한 성찰과 밀접하게 연관 지으며 잡지 <민중극단>의 창간에 동참하고, 브레히트를 발견하던 시기로 세분된다.

   두번째 시기는 1961년에서 1975년까지로, 소쉬르를 이어 그가 본격적으로 일반 기호학을 정립시키며 ‘구조주의적 모험’을 감행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비역사적인 관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강렬한 정치적 색채를 띤 <텔 켈> 그룹 및 필립 솔레르스와 교류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시기이다. 하지만 이때 씌우진 글들을 통해 그는 선동적 언어에 ‘글쓰기’의 혁명적 폭력을 대립시키고, ‘즐김’, ‘즐거움’, ‘텍스트’라는 개념들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거부하고 있다. 즉 그는 문학의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태의연한 이분법을 본질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 시기는 이 저서 발간 이후부터 그가 사망한 때까지의 시기다. 이 기간 동안 바르트는 모든 직접적인 정치적 담론들을 작품으로부터 제거시켜버리며 ‘중립’의 글쓰기를 지향하게 된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등을 통해 그는 탈신비화의 역할을 수행하는 담론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글쓰기만이 세상의 질서에 대항하는 유일한 진실이라는 윤리적, 실존적 사고에 빠져들게 된다.

 

  

# 말의 힘에 대한 큰 승부에서도, 우리는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다. 하나의 언어는 다른

언어에 대해 잠정적으로만 우세할 뿐이다. 제3의 언어가 대열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침입

자는 즉시 퇴각하지 않을 수 없다. 68

 

# 대중의 통념은 육체에 대하여 축소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즉 육체란 늘 영혼에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육체가 환유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모두 금기시된다. 112

 

# 글쓰기의 실천에 몸담은 사람은 날카로움. 자신의 관념에 대한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일탈

시키는 일을 꽤 쾌활하게 수용한다. 145

 

# 작가의 모든 언표는 (아무리 거친 작가라도) 비밀의 조직자, 표현되지 않은 말. 부정이나

의문과 같이 원초적인 카테고리의 침묵적 형태소와 같은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의미

는 “그리고 그것을 알고 싶다!”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글쓰는 사람의 문장은 이 메시지의

각광을 받고 있다. 그 각각의 문장 속에는 극장의 개막 신호인 3점타나 랑크 영화의

타종을 연상시키는 어떤 노래, 어떤 소음, 근육이나 후두의 어떤 긴장이 존재한다. 이형

학의 신 아르토까지도 자기가 글쓰는 것에 관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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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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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는 1984년에 발행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이제야(2012) 발간되었다. 이 에세이는 그가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에 일년 구개월동안 연재했던 칼럼을 묶어놓은 것으로, 첫 잡문집이라 할 수 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김훈의 에세이와는 전혀 다르지만 어째 읽고 있으면 비슷하게 느껴진다.

두 작가의 글쓰기의 공통점을 찾자면 군더더기 없는 글과 단단한 문장이라고 말하겠다. 하루키의 무심한 듯한 말투와, 소소한 이야기들은 뭔가 할일이 잔뜩 쌓여 있어 근심이 가득할 때, 에잇 모르겠다 하고 읽기에 최고의 책이다. 글을 읽으며 웃다보면 우울한 마음도 김중혁 작가의 책 제목처럼 그래, ‘뭐라도 되겠지’ 편안한 심정이 된다.

   하루키의 책들은 생활습관까지 바꿔놓았다. 예를 들면 그를 따라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던 달리기를 시작했다. 두부와 고양이를 싫어했지만 이젠 좋은 부분을 보려고 노력중이다. 게다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맥주를 와인과 같은 등급으로 끌어올려 마트에 가면 새로운 맥주를 찾게 된다. 글의 영향력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아무튼 골치아픈 일들을 다 미뤄놓고, 모처럼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었다. 좋다.

 

#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적합한 장소를 하나 발견해냈다. 귀다. 귀밖에 없다. 나는 발견했다(유레카)! 그후 나는 전철표를 착착 접어서 귓구멍에 넣어 간직하게 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빳빳한 게 귓속에 들어 있어 불안스럽지만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아, 지금 내 귓속에 전철표가 있지'하는 확고한 존재감이 전해줘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98-99

 

# 내가 어째서 이 별것 아닌 문장을 잘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색깔의 조화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우선 로멜 장군의 빳빳한 남색 서지 군복, 흰색 테이블클로스, 막 튀겨낸 옅은 갈색의 비프커틀릿, 버터에 가볍게 볶은 누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북프랑스의 푸른 전원 풍경-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문장을 읽어나가며 언뜻언뜻 떠오른 것이 그런 색깔들의 어울림이었다. 그렇기에 이렇다 할 의미도 없는 그 문장이 언제까지고 머리 한구석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문장의 미덕이라 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는 문장 말입니다. 가령 소설 같은 걸 쓸 때는, 이렇게 열린 문장으로 시작하면 이야기가 점점 확대되어간다. 반대로 아무리 공을 들인 아름다운 문장이라 하더라도 그게 닫힌 문장이면 얘기는 거기서 그만 멈추고 만다. 116-17

 

# 파리의 주부들은 빵을 사다 묵히지 않는다. 그녀들은 식사 때마다 빵집에 가서 빵을 사오고, 남은 것은 버린다. 식사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부만 해도 그렇다. 막 사온 것을 먹어야지 밤을 넘긴 두부 따위를 먹을 수는 없잖는가. 이게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다. 귀찮으니까 그냥 하루 지난 것이라도 먹자는 생각이 방부제나 응고제 같은 것들의 주입을 초래하는 것이다. 149

 

# 진짜 정보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이 아무 도움 안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세상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쳐가기만 하고 제 것이 되지는 못하는 정보들이 너무 넘쳐나는 게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217

 

# 이렇게 개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관습의 문제를 편식과 동일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좀 무리겠지만, 그래도 무엇을 먹고 무엇은 안 먹는다는 선택이 기본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차원의 얘기다. 야만이라는 것은 인긴이 지닌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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