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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 동녘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롤랑바르트의 사상을 접근하기가 어려워 <사랑의 단상>, <기호의 제국> 같이 잘 알려진
책만 몇 권 읽다 이 책을 발견했다. 쭉 넘겨보니 <사랑의 단상>처럼 그가 틈틈히 사유한 모아놓은 것 같아, 그래 이건 좀 쉽겠지, 하고 읽기 시작했으나 결론은 흠....
이 책은 바르트가 사망하기 5년전에 발간되었다. 자기 자신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 자전적
에세이 겸 평전으로 일련의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어 독서가 쉽지 않다.
저자는 책 앞장에서 ‘이 책에 씌어진 모든 것은 소설 속의 인물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적어놓았다. 책 처음 부분에는 롤랑 바르트와 관계된 여러 사진들이 실려있어 흥미롭게 보았다.
에릭 마르티(Eric Marty)는 <프랑스 지성인 사전>에서 바르트의 생애를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60년에 이르기까지로서, 이 시기는 작가의 책임을 강조하던 <글쓰기의 영도>시기. 일상적인 스테레오타입과 대상 속에 현존하는 이데올로기 체계를 탈신비화시키던 <신화학>시기, 세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평을 기호에 대한 성찰과 밀접하게 연관 지으며 잡지 <민중극단>의 창간에 동참하고, 브레히트를 발견하던 시기로 세분된다.
두번째 시기는 1961년에서 1975년까지로, 소쉬르를 이어 그가 본격적으로 일반 기호학을 정립시키며 ‘구조주의적 모험’을 감행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비역사적인 관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강렬한 정치적 색채를 띤 <텔 켈> 그룹 및 필립 솔레르스와 교류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시기이다. 하지만 이때 씌우진 글들을 통해 그는 선동적 언어에 ‘글쓰기’의 혁명적 폭력을 대립시키고, ‘즐김’, ‘즐거움’, ‘텍스트’라는 개념들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거부하고 있다. 즉 그는 문학의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태의연한 이분법을 본질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 시기는 이 저서 발간 이후부터 그가 사망한 때까지의 시기다. 이 기간 동안 바르트는 모든 직접적인 정치적 담론들을 작품으로부터 제거시켜버리며 ‘중립’의 글쓰기를 지향하게 된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등을 통해 그는 탈신비화의 역할을 수행하는 담론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글쓰기만이 세상의 질서에 대항하는 유일한 진실이라는 윤리적, 실존적 사고에 빠져들게 된다.
# 말의 힘에 대한 큰 승부에서도, 우리는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다. 하나의 언어는 다른
언어에 대해 잠정적으로만 우세할 뿐이다. 제3의 언어가 대열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침입
자는 즉시 퇴각하지 않을 수 없다. 68
# 대중의 통념은 육체에 대하여 축소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즉 육체란 늘 영혼에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육체가 환유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모두 금기시된다. 112
# 글쓰기의 실천에 몸담은 사람은 날카로움. 자신의 관념에 대한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일탈
시키는 일을 꽤 쾌활하게 수용한다. 145
# 작가의 모든 언표는 (아무리 거친 작가라도) 비밀의 조직자, 표현되지 않은 말. 부정이나
의문과 같이 원초적인 카테고리의 침묵적 형태소와 같은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의미
는 “그리고 그것을 알고 싶다!”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글쓰는 사람의 문장은 이 메시지의
각광을 받고 있다. 그 각각의 문장 속에는 극장의 개막 신호인 3점타나 랑크 영화의
타종을 연상시키는 어떤 노래, 어떤 소음, 근육이나 후두의 어떤 긴장이 존재한다. 이형
학의 신 아르토까지도 자기가 글쓰는 것에 관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