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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ㅣ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에서는 1984년에 발행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이제야(2012) 발간되었다. 이 에세이는 그가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에 일년 구개월동안 연재했던 칼럼을 묶어놓은 것으로, 첫 잡문집이라 할 수 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김훈의 에세이와는 전혀 다르지만 어째 읽고 있으면 비슷하게 느껴진다.
두 작가의 글쓰기의 공통점을 찾자면 군더더기 없는 글과 단단한 문장이라고 말하겠다. 하루키의 무심한 듯한 말투와, 소소한 이야기들은 뭔가 할일이 잔뜩 쌓여 있어 근심이 가득할 때, 에잇 모르겠다 하고 읽기에 최고의 책이다. 글을 읽으며 웃다보면 우울한 마음도 김중혁 작가의 책 제목처럼 그래, ‘뭐라도 되겠지’ 편안한 심정이 된다.
하루키의 책들은 생활습관까지 바꿔놓았다. 예를 들면 그를 따라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던 달리기를 시작했다. 두부와 고양이를 싫어했지만 이젠 좋은 부분을 보려고 노력중이다. 게다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맥주를 와인과 같은 등급으로 끌어올려 마트에 가면 새로운 맥주를 찾게 된다. 글의 영향력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아무튼 골치아픈 일들을 다 미뤄놓고, 모처럼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었다. 좋다.
#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적합한 장소를 하나 발견해냈다. 귀다. 귀밖에 없다. 나는 발견했다(유레카)! 그후 나는 전철표를 착착 접어서 귓구멍에 넣어 간직하게 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빳빳한 게 귓속에 들어 있어 불안스럽지만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아, 지금 내 귓속에 전철표가 있지'하는 확고한 존재감이 전해줘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98-99
# 내가 어째서 이 별것 아닌 문장을 잘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색깔의 조화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우선 로멜 장군의 빳빳한 남색 서지 군복, 흰색 테이블클로스, 막 튀겨낸 옅은 갈색의 비프커틀릿, 버터에 가볍게 볶은 누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북프랑스의 푸른 전원 풍경-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문장을 읽어나가며 언뜻언뜻 떠오른 것이 그런 색깔들의 어울림이었다. 그렇기에 이렇다 할 의미도 없는 그 문장이 언제까지고 머리 한구석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문장의 미덕이라 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는 문장 말입니다. 가령 소설 같은 걸 쓸 때는, 이렇게 열린 문장으로 시작하면 이야기가 점점 확대되어간다. 반대로 아무리 공을 들인 아름다운 문장이라 하더라도 그게 닫힌 문장이면 얘기는 거기서 그만 멈추고 만다. 116-17
# 파리의 주부들은 빵을 사다 묵히지 않는다. 그녀들은 식사 때마다 빵집에 가서 빵을 사오고, 남은 것은 버린다. 식사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부만 해도 그렇다. 막 사온 것을 먹어야지 밤을 넘긴 두부 따위를 먹을 수는 없잖는가. 이게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다. 귀찮으니까 그냥 하루 지난 것이라도 먹자는 생각이 방부제나 응고제 같은 것들의 주입을 초래하는 것이다. 149
# 진짜 정보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이 아무 도움 안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세상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쳐가기만 하고 제 것이 되지는 못하는 정보들이 너무 넘쳐나는 게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217
# 이렇게 개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관습의 문제를 편식과 동일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좀 무리겠지만, 그래도 무엇을 먹고 무엇은 안 먹는다는 선택이 기본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차원의 얘기다. 야만이라는 것은 인긴이 지닌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다. 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