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예이츠
정영희 지음 / 평민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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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리엄 버틀러 예이츠 하면 “나 일어나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로 유명한 시인이다. 예전에는 이니스프리가 지중해 어느 섬인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예이츠의 고향 아일랜드 근처 호수였다. 예이츠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니 시 속에 내포되어 있는 영국계 아일랜드로서 예이츠가 느꼈던 심정들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작가가 살아온 환경이나 사상을 제외하고 작품만으로 평가해야 된다고 말한다(그 유명한 <저자의 죽음>도 있지 않는가). 그러나 예이츠의 경우 그가 태어난 조국 아일랜드 그리고 그가 자란 영국을 의식하지 않고 시를 읽는다면, 그의 시를 오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책을 읽기 전 나처럼.

예이츠 하면 유명한 것이 모드 곤을 향한 예이츠의 사랑이다. 예이츠는 평생에 민족운동주의자였던 모드 곤을 사모하여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시가 많으며, 심지어 연극도 만들었다.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여러 번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하다 모드 곤의 전남편과 이혼 한 뒤 다시 청혼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예이츠는 홧김에? 그녀의 양녀에게 청혼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한 후 드디어 52살에 조지 하이드리와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모드 곤과는 좋은 친구로 지냈으니 예이츠의 모드 곤을 향한 사랑이 놀랍다. 예술가들의 열정인가?

   사무엘 베켓은 ‘아일랜드의 반대말은 영국’이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로 두 나라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 아일랜드는 16세기에 헨리 8세에 의해 대대적으로 침략당한 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22년 영국으로부터 자치정부체제로 독립되기까지 800여 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오면서 아일랜드의 말(게일어)은 언어식민정책에 의해 사라졌다. 한국의 일제 식민지와 같은 상황이다. 아일랜드는 또한 원시 자연신교인 드루드교를 믿어왔는데 A.D 55년부터 로사의 식민지배를 400년 가까이 받은 후 로마 가톨릭교를 받아들여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자신이 만든 성공회를 아일랜드 국민에게 강요하고 12,000명의 개신교도(성공회 신자 800명, 장로교 11,200명)을 북 아일랜드 지방에 이주시켜 아일랜드 지주계급으로 정착시켰다. 따라서 영국계 아일랜드인 개신교도와 가톨릭 원주민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영국계 지배계급은 아일랜드에서 부와 명성을 가졌지만 아일랜드 토착민들에게는 식민지배자로, 영국에서는 아일랜드 취급을 받는 사이에 낀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이 예이츠이다.

   예이츠는 1865년 더블린에서 태어났으나 가족과 함께 2살 때 런던으로 건너가 살다가 고등학교 때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와 공부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어쉰의 방랑기>는 고대 아일랜드 켈트 문학 특유의 미묘한 정서를 풍겨 시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책의 저자는 예이츠의 작품세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이를 정리해 보자면 초기는 신화적 민족문학의 시기이다. 예이츠는 식민지 아일랜드의 국가적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적 독립을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하여 아일랜드 게일 신화와 전서, 민담에 표현된 특유의 정서를 되살리려고 노력하였다. 예이츠의 민족의식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낭만적이고 영웅적 신화에 근거한 것이다. 예이츠의 현실초월 욕구가 아일랜드 농어민의 가난한 현실보다는 비현실적, 비사회적, 초자연적인 문학을 낳았다.

   중기는 반가톨릭 중산주의와 문화적 귀족주의의 시기이다. 그는 1900년대 이후 극장 경영, 배우 훈련, 정치 참여 등 실천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초기 작품에서 보인 여성적이고 우아한 문체는 딱하고 건조한 남성적 문체로 바뀌고, 환상적 심상은 구체성으로 바뀌었다. 예이츠의 아일랜드 문예운동(가톨릭교와 고대 아일랜드의 신비주의 결합)은 정통 교리를 추구하는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샀다. 아일랜드의 정치 대중인 중산계급은 지극히 현실적인 실익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예이츠는 이를 혐오했고, 문화 계급주의로 돌아섰다. 그는 18세기 영국계 아일랜드 지배 계급 시대의 문화를 이상화하여 소수 독자를 대상으로 문화론을 펼쳤다.

후기는 비극적 환희의 달관한 시기로 1920년대 말에 이르러 평생동안 시적 형식으로 자제해 온 감정 표현이 일순간에 폭발하는 듯한 분노와 욕정의 시기와 삶과 역사와 민족에 대해 좀 더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비극적 환희의 시기를 맞는다. 예이츠는 죽기 직전까지 당대 정치에 대해 비판하면서 문화 활동을 통해 그의 문학적 이상을 문화와 정치 영역에 실천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인이자 극작가였다. 예이츠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의 폭력적이고 이념적인 면에 반대하면서 시와 극으로서 당대 정치를 초월하려고 하였다.

   예이츠의 배경을 알고 시를 읽으니, 시가 훨씬 재밌게 읽힌다. 또한 저자가 원문 한 줄에 번역 한 줄을 달았기 때문에 원문을 바로 찾을 수 있어 좋다. 각 시마다 짧은 해설과 논평도 달아주어 가만히 앉아 숟가락으로 떠주는 음식을 먹는 기분이다. 시를 막 공부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이런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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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먼의 시적 상상력 - 자연 인간 우주
이광운 지음 / 정림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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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트먼의 <풀잎>이 셰익스피어의 <햄릿>만큼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풀잎>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시집이다. 휘트먼은 1819년 미국 뉴욕 섬 롱아일랜드 퀘이커 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5년에 <풀잎> 초판을 발행했으며 이 시집은 계속 수정을 거치며 다시 발행되었다. 휘트먼은 1892년 사망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휘트먼에 대해 쓴 논문들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휘트먼 시를 어느 정도 읽은(적어도 <풀잎> 정도는) 독자를 상정하고 있다. 휘트먼이 동성애자(아마도)였다는 것을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상정한다. 그러나 휘트먼이 누군지도 모르고 책을 읽어도 상관은 없다. 오히려 더 재밌게 읽을지도. 저자는 휘트먼의 시들을 다양한 각도로 분석하기 때문에 시 속에서 여러 장치들을 함께 찾아보는 일은 꽤 재미있다. 누군가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는 느낌이다. 책을 읽으며 휘트먼이 가지고 있는 시적 역량을 다시 한번 느꼈다. 휘트먼의 신선한 문장과 깨어 있는 사상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제 1부는 시에서 나타나는 자연과의 합일(풀, 나무, 물, 색채, 새)을 다루고 있다. 제 2부는 시와 인간과의 합일(언어, 성 의식, 여성성, 연사 페르소나, 전기적(electrical)화자, 도시와 텍스트성)을 다루고 있다. 제 3부는 우주와의 합일(샤먼적 입무의례, 입무의례, 샤머니즘적 제의, 기원으로서의 회기)를 이야기한다. 책에서는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중 몇 개만 정리해본다.

 

1. 풀잎 -소우주적 존재, 민주주의의 상징, 시인과 독자의 영적 결속

2. 물 - 수태 이미지/ 바다 -에로티시즘의 미학. 파괴적 양상/ 연못 -시인과 독자의 교류 장소.

3. 새 -영매, 육체적인 기민성과 생명력의 표상

4. 성 - 시적 창조의 원동력, 자기 성애적인 나르시스틱한 특징, 에로스적 자아상, 독자와 텍스트의 상호관계를 성적 관계로 인식.

 

 

# 나는 루이지애나에서 떡갈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는 것을 보았다.

(I Saw in Louisiana a Live-Oak Growing)

 

나는 루이지애나에서 떡갈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나무는 홀로 서 있었고 가지에는 이끼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나무는 동무도 없이 기쁨의 말을 속삭이듯

짙푸른 잎사귀를 수런거리며 자라고 있었고,

그 거칠고 뻣뻣하며 호색한 모습은 나 자신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어떻게 동무도 없이 홀로서서 기쁨의

말을 수런거리는지 궁금하였다. 나는 할 수 없기에.

나는 잎사귀가 조금 달린 이끼 낀 잔가지를 꺽어와

나의 방안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다.

나의 친한 친구들을 상기하도록 하기 위해 그 나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친구들 생각으로 가득하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신비스러운 징표로 남아 내게

남성다운 사랑을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아무리 그 떡갈나무가 루이지애나의 넓은 평원에서

가까이에 친구나 애인도 없이 기쁨의 잎사귀를 수런거리며

저 홀로 반짝이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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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남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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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신간 코너에 산뜻하게 놓여 있길래 보았더니 페렉의 소설이다. 페렉은 프루스트처럼 익숙한 이름이다. 허나 정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그 두께 때문에 아직까지 읽기를 미루고 있듯 페렉의 소설도 <인생 사용법>을 제외하고는 읽어보지 못했다. 따라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책 두께가 얇음에 위안을 삼으며 빌려왔다.

   그런데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누구를 향한 이야기란 말인가? 우선 인칭부터가 눈에 거슬린다. 사람들이 무의적으로 정해놓은 표준을 이탈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일인칭 삼인칭이 아닌 이인칭 ‘너’이다. 주인공을 ‘너’로 지칭하여 소설은 시작되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너’ 한명만 등장할 뿐이다. 작가가 상정한 ‘너’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경우는 그랬다. 그리하여 ‘너’는 ‘나’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나이기도 한 ‘너’는 어떤 사람인가? ‘너’는 모든 것에 무관심한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너’의 무관심은 모든 소설의 주인공을 통틀어서 최고일 것이다. 페렉 또한 이 작품을 두고 “무관심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평하였다. ‘너’의 무관심은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작품은 일관되게 ‘너’의 독백과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데, ‘너’는 무관심하게 ‘너’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과 사람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소설 속에는 단어들이 넘쳐난다. 수많은 단어들이 소음을 일으킨다. 문장은 쉼표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아마 번역하느라 진짜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너’는 파리에 사는 25살의 청년으로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거리를 걷는다. 혼자 포커 게임을 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십자풀이를 하며,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도 빼어놓지 않고 읽는다. ‘너’에게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 흥미와 호기심이 전혀 없다. ‘너’는 몽유병자처럼 멍텅구리처럼 이 세상에 조용히 존재하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페렉은 이 작품을 통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인가? 작가는 단지 ‘너’의 행동을 통해 물음만을 던질뿐이다.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은 독자인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의 <날개>와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도 떠오른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너’는 모든 것에 무관심한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인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도, 맑은 사람도, 투명한 사람도 아니다. 너는 공포를 느낀다, 너는 기다린다. 너는, 클리시 광장에서, 내리는 비가 멎기를,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너’는 무기력하고 지루한 삶을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너'를 만나고 싶다. 설마 '너'가 나는 아니겠지. 

 

# 그 무엇도 원하지 않기. 기다릴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기. 늑장 부리기, 잠자기. 인파에, 거리에 휩쓸리게끔 너 자신을 방치하기. 도랑을, 철책을, 배를 따라 물가를 좇기. 강둑을 따라 걷기, 벽에 찰싹 붙어 지나가기. 네 시간을 허비하기. 온갖 계획으로부터, 모든 성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욕망없이, 원한 없이, 저항 없이 존재하기. 45.

 

# 시간의, 하루하루의, 주의, 계절의 저 흐름에 맞추어, 너는 모든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분리시킨다, 너는 모든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떼어낸다. 너는, 네가 자유롭다는, 그 무엇도 너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네 마음에 들지도 않고 들지 않는 것도 아닌, 일종의 취기를, 가끔이다시피 할 정도로, 발견하곤 한다.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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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전 - 이천오백 년 동안 세상을 지배한 남자
바오펑산 지음, 이연도 옮김 / 나무의철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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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논어에 관련된 책 제목만 보다 <공자전>이라고 적힌 책을 보니 마음이 끌렸다. 저자 소개를 보니 바오평산은 상하이 카이팡 대학에 있는 교수로 공자 연구의 최고 권위자라고 적혀있다. 음, 믿음이 간다. 이 책은 작가가 20년에 걸친 공자의 연구와 집필을 모아 놓은 책으로 공자의 출생(기원전 551년)부터 73세 죽음(479년)까지 한 생애가 적당히 가볍고도 무겁게 담겨있다. 공자 가라사대가 아닌 공자의 삶을 이야기하며 공자의 명언?들이 나오게 된 계기를 알려주니 훨씬 흥미진진하다. 고전을 이야기 한 책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공자의 생애를 읽으면서 그의 고고한 인격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새삼 놀랐다. 향기가 나는 인물. 그의 생애 자체가 본받을 만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토록 그에게 열광하는구나. 얼마 전 미술관에서 학예사로 근무하는 친구가 동양의 철학 사상을 알게 되면 서양의 것이 시시해진다 라고 말한 것이 문득 떠오른다.

   공자가 특히 아낀 제자 안회, 자로, 자공에 관한 에피소드도 굴비 엮듯이 술술 풀어나가고 있어 재미를 더한다. 예전에 본 <공자>영화랑 맞물리는 부분도 많아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영상까지 떠올라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의 첫 부분에 화보 <장해공자성적도>도 소개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첫 공개라고 한다. 장해라는 화가가 공자의 생애를 통해 일어난 일화를 그린 그림인데, 책을 다 읽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림을 살펴보니 그림 속 사건들이 와글와글 소리를 내었다.

   괴이한 것, 힘을 자랑하는 것,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귀신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대답하기를 거절한 공자. 15세에 처음 학문의 뜻을 세우고 평생을 실천한 학자. 그를 존경한다.

 

# 공자는 일찍이 서리 일을 한 적이 있는데 “회계를 잘하면 그것으로 되었다.”라고 말했다. 승전 일을 할 때도 소와 양이 탈 없이 잘 자라면 그것으로 되었다.“라고 말했다. 64. <맹자>

 

# 스승은 어떤 사실에 대한 지혜와 안목, 옳고 그름, 아르다움과 속된 것에 대한 가치판단력이 있어야만 한다. 학생들에게 기존의 지식 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사고할 수 있는 방법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근거, 즉 가치관이 있어야 현실세계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79.

 

# “사람 사는 도리는 정직함이다. 정직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은 요행이 화를 면한 것일 뿐이다.” 94. <논어>

   

# “공자는 초목이 무성한 숲 사이를 거닐다가 살구나무 아래 단에 앉아 쉬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 공자는 금을 타고 노래를 불렀다.” 177 <장자>

 

# “배우고 때에 맞춰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닌가? 178. <논어>

 

#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180.

 

# 모든 제자 가운데 공자는 안회를 가장 아꼈다. 그 이유는 그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는 인물이니, 큰 즐거움이 거기에 있었다. 194.

 

# 공자는 네가지 결점을 끊었는데 주관과 절대, 고집, 자아다.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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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 핀터 전집 2
해롤드 핀터 지음, 이현주 옮김 / 평민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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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벙어리 웨이터>와 <핫 하우스>는 <생일파티와>와 더불어 핀터의 초기작품에 속한다. 이 작품들에는 등장 인문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관이 행사하는 폭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극은 불안하고 폭력적이며, 보이지 않는 권력이 주인공들을 움직인다. 극을 읽는 독자들은 무언가 부조리한 상황을 느끼게 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볼 수 없다.

   핀터는 런던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2차 대전의 경험이 일생동안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태어날 때부터 낙인찍힌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부당한 폭력과 위협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핀터는 그때의 상처가 초기극의 주제가 되었다. 비평가 마틴 에슬린은 그 상처가 바로 작가의 눈이며, 모든 세계는 바로 그 눈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핀터에게서는 세계가 상처임을 지적하였다.

                                          <책 뒤 작품 해설 참조함>

    1957년에 발표된 <벙어리 웨이터>는 핀터의 두 번째 희극이다. 극에는 구스(Gus)와 벤(Ben) 단 두 명이 등장하는 단막극으로 배경은 창문 하나 없는 닫힌 지하실이다. 답답한 방에서 있어야만 하는 것에 구스는 의문을 품는다. 극이 시작될 때 벤과 구스는 반복적인 행동을 한다. 벤은 계속 신문을 읽고 있고, 구스는 구두를 벗어 성냥갑을 꺼내고 다시 신고 흔들어 본다. 이러한 행동들은 아무 생각없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살인청부업자의 지령을 받아 이 장소에 온 그들은 세계와 고립되었으며 여기엔 먹을 것 하나 변변치 않다. 벤과 구스가 외부 세계와 연락을 주고 받는 유일한 문은 음식을 나르는 승강구 문, 즉 벙어리 웨이터 문이다. 그러나 이 문은 소통을 주고받는 문이 아닌 명령이 내려오는 문으로서 작용된다. 이들을 고용한 윌슨이라는 고용주는 부하들의 안락함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냉혹한 인물로 묘사된다. 윌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맹목적인 복종이지, 자신의 일에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하려는 부하가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일에 의문을 품게 되는 구스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마지막에 누가 구스를 살해했는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은 벤이 살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구스의 죽음은 절대적 복종만이 존재하고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가져서는 안되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인간적으로 살아가려가는 한 인간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핫하우스>는 1958년에 완성되었지만 발표된 지 22년이 지난 후 공연되었다. 극의 배경은 정부 부처에서 주관하는 한 요양소(정신병원)이다. 이 요양소는 성적으로 문란하다. 이 요양소 역시 질서가 강조된다. 질서를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인간적인 측면이 부재한다. 환자들은 모두 6457번, 6459번처럼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려진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인간적 교류란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환자 6459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를 낳게 되자 요양소의 질서가 흔들리기시작된다. 작품은 요양소의 총 책임자 롯이 이끄는 세계가 맹목적으로 질서에 순응하는 깁스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을 그려간다. 결국 깁스는 새로운 소장 자리를 차지하고 요양원은 권위가 질서가 유지되는 조직으로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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