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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남자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도서관 신간 코너에 산뜻하게 놓여 있길래 보았더니 페렉의 소설이다. 페렉은 프루스트처럼 익숙한 이름이다. 허나 정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그 두께 때문에 아직까지 읽기를 미루고 있듯 페렉의 소설도 <인생 사용법>을 제외하고는 읽어보지 못했다. 따라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책 두께가 얇음에 위안을 삼으며 빌려왔다.
그런데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누구를 향한 이야기란 말인가? 우선 인칭부터가 눈에 거슬린다. 사람들이 무의적으로 정해놓은 표준을 이탈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일인칭 삼인칭이 아닌 이인칭 ‘너’이다. 주인공을 ‘너’로 지칭하여 소설은 시작되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너’ 한명만 등장할 뿐이다. 작가가 상정한 ‘너’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경우는 그랬다. 그리하여 ‘너’는 ‘나’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나이기도 한 ‘너’는 어떤 사람인가? ‘너’는 모든 것에 무관심한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너’의 무관심은 모든 소설의 주인공을 통틀어서 최고일 것이다. 페렉 또한 이 작품을 두고 “무관심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평하였다. ‘너’의 무관심은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작품은 일관되게 ‘너’의 독백과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데, ‘너’는 무관심하게 ‘너’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과 사람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소설 속에는 단어들이 넘쳐난다. 수많은 단어들이 소음을 일으킨다. 문장은 쉼표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아마 번역하느라 진짜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너’는 파리에 사는 25살의 청년으로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거리를 걷는다. 혼자 포커 게임을 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십자풀이를 하며,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도 빼어놓지 않고 읽는다. ‘너’에게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 흥미와 호기심이 전혀 없다. ‘너’는 몽유병자처럼 멍텅구리처럼 이 세상에 조용히 존재하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페렉은 이 작품을 통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인가? 작가는 단지 ‘너’의 행동을 통해 물음만을 던질뿐이다.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은 독자인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의 <날개>와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도 떠오른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너’는 모든 것에 무관심한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인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도, 맑은 사람도, 투명한 사람도 아니다. 너는 공포를 느낀다, 너는 기다린다. 너는, 클리시 광장에서, 내리는 비가 멎기를,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너’는 무기력하고 지루한 삶을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너'를 만나고 싶다. 설마 '너'가 나는 아니겠지.
# 그 무엇도 원하지 않기. 기다릴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기. 늑장 부리기, 잠자기. 인파에, 거리에 휩쓸리게끔 너 자신을 방치하기. 도랑을, 철책을, 배를 따라 물가를 좇기. 강둑을 따라 걷기, 벽에 찰싹 붙어 지나가기. 네 시간을 허비하기. 온갖 계획으로부터, 모든 성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욕망없이, 원한 없이, 저항 없이 존재하기. 45.
# 시간의, 하루하루의, 주의, 계절의 저 흐름에 맞추어, 너는 모든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분리시킨다, 너는 모든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떼어낸다. 너는, 네가 자유롭다는, 그 무엇도 너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네 마음에 들지도 않고 들지 않는 것도 아닌, 일종의 취기를, 가끔이다시피 할 정도로, 발견하곤 한다.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