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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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2004년 작가의 책 Long life: Essays and Other Writings by Mary Oliver 를 번역한 것이다. 올리버란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으면서였다. 거기에 「기러기」라는 시가 실려 있었는데, 그 반짝이는 시를 읽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역시 이 시의 일부에서 따온 것이다. 노트에 베껴놓은 올리버의 시가 차츰 기억에서 잊힐 쯤 서점에서 『완벽한 날들』을 보고 다시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책은 그녀의 산문(그리고 몇 편의 시)을 모아 놓은 것인데 한 문장이 한 줄의 시구처럼 느껴진다.

  올리버는 휘트먼과 소로의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 그녀 역시 자연 속에서 조용히 살아간다. 따라서 그녀의 글을 읽고 있다보면 그들의 글과 삶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책 속에는 뉴 잉글랜드의 초기 작가이자 미국의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진 워즈워스, 애머슨, 호손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동시에 새, 습지, 개, 꽃, 비 등 자연의 아름다움이 묘사된다. 각각의 산문이 독립적이기 때문에, 아무 장이나 펼쳐 읽어도 된다. 문장들은 단순하나 소화를 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저기서 손에 잡히는 대로 여러 문장들을 모아 적으면 그것 자체로 한 편의 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원서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아 몇몇 도서관에 검색해보니 구비되어 있지 않다. 이런.

 

# 만일 당신이 나와 너무 똑같다면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내게 무얼 배우겠는가? 내가 사사프라스 잎을 집에 가져가면 M은 그걸 보며 감탄한다. 그녀가 내게 마을과 항구 위 하늘을 나는 기분을 이야기해주면 그 푸른 길에 대한 묘사로 내 세계는 달콤해진다. 우리의 서로 다른 흥분을 접하는 건 함께하는 삶의 또 다른 선물이다. 31.

 

# 잘 정비된 개미 언덕을 바지런히 오르내리는 검은 개미들도 하나의 기회다. 뜨거운 모래밭의 말랑말랑한 두꺼비도 하나의 기회다.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한 시간을 보내는 건 기회들의 향연이다. 아침마다 소란과 고요가 결혼하여 빛을 만든다. 태양이 장밋빛 자두처럼 떠오른다. 물에서 떠도는 새들이 돌아보다. 이따금 바람도 돌아보는 듯하다. 33.

 

# 문학의 최고 효용은 제한적인 절대성이 아니라 아낌없는 가능성을 지향한다. 문학은 답을 주기보다는 의견, 열띤 설득, 논리, 독자가 자신과의 싸움이나 자신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것이 에머슨의 핵심이다. 그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주제의 모든 면에서 어슬렁거린다. 친절한 몸짓으로 제안을 하고,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며 우리 눈으로 직접 보라고 말한다. 그가 완강히 주장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우리 스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삶의 진수니까. 삶의 문제들에 대해 숙고하는 것, 정원에서 잡초를 뽑거나 소젖을 짜면서도 생각에 집중하는 것.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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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일기 - [할인행사]
우디 알렌 감독, 리암 니슨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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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런의 영화를 본 후 그에게 빠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영화 또한 완벽하다. 주인공들의 심리를 묘사할 때마다 핸드 헬드 기법을 사용하여 머리가 어질어질 할 수도(<블레어 와치>를 떠올리시라) 있지만, 탄탄한 줄거리와 독특한 구조, 노트에 끊임없이 적어야만 할 것 같은 멋진 대사들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게다가 우디 알렌이 감독이자 주연으로 나와 시무룩한 표정과 수줍은 행동으로 관객에게 즐거움을 준다.

  내용은 간단하다. 중년의 두 부부가 오랜 결혼 생활 끝에 별거를 하기로 합의하고, 가장 친한 친구 부부에게 이야기한다. 그들은 별거 후 각각 다른 애인을 만나고 방황의 시간을 거친 후 다시 합치게 된다. 반면 이제는 친구 부부가 이혼하고 각자의 삶을 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들의 삶을 어찌나 흥미진진하게 보여주는지. 별거 와중에도 상대방이 다른 애인과 있는 것을 질투하는 부부, 더 이상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지만 겉으로는 평온하게 살아가는 부부. 일상적인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상처와 아픔들을 들춰보기가 무서워 가만히 덮어둔 채 모른 척 살아가는 부부들. 이성의 유혹에 주저하고 흔들리는 모습들. 그렇게 조심조심 살아가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가.

  감독은 대부분의 부부들이라면 한 번쯤 느껴봤을 심리상태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삶을 보며 관객들은 아,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위안 혹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거기서 거기구나 하는 교훈을 얻게 된다.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부부간의 애정과 신뢰가 변함없이 지속될 수 있을까? 타인을 위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결국엔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영화에서 앨런의 대사 중에 자신은 ‘가미카제 여성’을 사랑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에 미친 듯이 열중하는 사람,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고, 광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에게 끌린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바쳐 목표를 향해 발사하기 때문에 결국 자신도 죽고, 상대방도 죽게 된다. 앨런은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런 사람에게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고백한다. 부부사이도 그런 것이 아닐까? 뜨거운 사랑이 언젠가는 미지근해 질 것을 알지만, 그리하여 언젠가는 정 혹은 자식들 때문에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당시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 때문에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는 아닐까? 재밌지만, 결코 재밌지 않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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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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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1920년대 미국의 할렘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유능했던 흑인 여성 작가 중의 한 명으로, 1929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녀의 대표작이다. 문장은 간결하며 담담하다. 소설을 이해하려면 우선 패싱(Passing)이 어떠한 개념인지 알아야 한다. 얼굴색이 백인과 같거나 비슷한 흑인 혼혈(물라토)들이 인종 차별이 횡횡했던 미국에서 백인 행세를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특히 1920년대에 흑인들의 패싱 인구가 급격하게 팽창했다고 한다. 패싱의 증가는 전후 흑인 중산층의 경제적 지위 향상과도 관계가 있다.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인물들도 뉴욕 맨해튼 할렘 지역에서 살고 있는 중산층 흑인 여성들이다. 그들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편을 두고 있으며, 자녀의 교육에 열을 올리고, 흑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자선 모금 바자회도 여는 등 백인과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유지한다. 따라서 이러한 흑인 중산층들은 백인만 출입할 수 있는 몇몇 장소에 들어갈 수 없는 제한이 있었을 뿐, 그들만을 중심으로 우아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고 있다.

  소설에는 다양한 패싱이 등장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클레어이다. 클레어는 백인 아버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생김새로만 보아서는 백인이다. 그녀는 부모를 잃은 후 백인 행세를 하며 아름다운 외모로 국제 금융가인 존 벨루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둔 여성이다. 그녀는 백인 상류층 여성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했으나, 남편은 철저한 인종주의자로서 흑인을 끔찍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위장된 그녀의 삶은 숨이 막히다.

  또 다른 여성은 아이린은 완벽한 흑인 중산층 여성으로 사람들은 그녀를 이탈리아 사람, 스페인 사람, 멕시코 사람, 또는 집시로 여길 뿐 결코 흑인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흑인 정체성을 지키고, 흑인 남자와 결혼하지만 편의에 따라 흑인 출입이 금지된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 등을 이용할 때만 ‘패싱’ 행세를 한다. 아이린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안정과 지속성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흐트러뜨리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고, 억제한다.

  이 두 여성이 십년이 훌쩍 지나고 시카고의 백인 전용 고급 호텔 옥상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치며 사건은 시작된다. 그들의 교류를 통하여 패싱을 하는 흑인들의 불안함, 소외감, 분노, 절망을 보여준다. 흑인 아이가 태어날까봐 임신 내내 끔찍한 불안에 시달리는 뮬라토 여성들, 흑인에 대한 자부심과 수치심 사이의 양가적 감정, 인종적 편견이 가득한 사회 분위기 등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난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소외받아야 되었던 그들의 역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다. 단지 피부색으로 우월함과 열등함을 나누는 일부(라고 믿고 싶다) 사람들의 생각은 얼마나 저급한가, 금발과 파란 눈동자와 하얀 피부가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믿음은 얼마나 맹목적인가. 피부색과 인종을 따지지 않는 시대가 오기는 할까? 나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 “‘패싱’에 관해서는 정말 알 수 없어요.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용서해요. 우리는 그것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찬미해요. 우리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며 그것을 피하면서도 보호해요.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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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딩 포레스터 - 아웃케이스 없음
구스 반 산트 감독, 숀 코너리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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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트 감독은 <굿 윌 헌팅>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내게는 <엘리펀트>와 <밀크>의 감독으로 인식되어 있다. 뉴욕 브롱스 할렘 지역에 살고 있는 16살 흑인 소년 자말이 글쓰기 선생님을 만나 멋지게 성장한다는 가족 드라마 같은 따뜻한 줄거리이다. 숀 코네리가 자말의 글쓰기 지도를 하는 포레스터 역으로 나오는데, 포레스터는 딱 한 권의 위대한 책을 내고 은둔해버린 작가이다. 그가 몇 십 년 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하는 일이라곤 혼자 글쓰기, 창문 밖으로 망원경을 들이대고 흑인 소년들이 농구하는 거 구경하기, 캠코더로 공원에 있는 새들 찍기, 열심히 창문 닦기 정도이다. 그렇다면 자말은 누구인가? 매일 포레스터가 사는 건물 아래 농구 코트에서 친구들과 농구 연습을 하는 평범한 학생이나, 한편으로는 몰래 글을 쓰며 문학적 열망을 불태우는 뛰어난 학생이기도 하다.

  자말은 글쓰기 덕분에 유명 사립고의 장학생으로 발탁되었으며 그곳에서 인기 있는 농구 선수로 활동도 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 학교의 이사장 딸인 지적이고 아름다운 클레어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우연찮게 포레스터에게 글쓰기 지도까지 받게 되니 이 얼마나 멋진 인생이란 말인가. 자말이 겪어야 하는 시련도 있지만 결론은 물론 해피엔딩이다.

  그렇다면 자말의 인생이 잘 풀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지 그에게 글 쓰는 재능과 농구 실력이 있었기 때문일까? 자말에게는 진실한 마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포레스터를 끈질기게 찾아가 글쓰기를 지도해 달라고 공손하게 요청한다. 과거의 고통 속에서 세상과 단절한 포레스터를 위해 멋진 이벤트를 선물하기도 한다. 자말은 성실하게 살았다. 그는 온통 노는 것에만 관심 있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고, 홀로 있는 시간에는 끊임없이 글을 쓴다. 자말은 겸손하나 실력으로 승부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백인들과 선생님 앞에서 겸손하나 정당하게 겨룬다. 자말이 잘 된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생각나는 장면은, 포레스터가 자말 덕분에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어느 날 그가 혼자 자전거를 타며 밤거리를 산책하는 장면이다. 한 손으로 수신호를 하며 쌩쌩 자전거를 타는 포레스터의 모습이 참 근사하다. 자말이 작문 시간에 선생님과 한 판 붙는 장면도 끝내준다. 선생님이 인용하는 모든 시들의 작가를 척척 맞추는 자말을 보니, 그래 나는 저 학생보다 아는 게 없구나. 열심히 공부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영화의 주제곡 ‘Over the rainbow'는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견줄 만큼 잘 어울린다. 영화 마지막에 잠시 나오는 변호사 역할의 멧 데이먼의 젊은 모습도 보너스.

  포레스터가 말하는 글쓰기 비법은(기억이 나는 것만 적자면) 이렇다. 우선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타자기를 두드려라. 자신이 없으면 다른 작품을 베껴 쓰는 것부터 시작해라. 문장의 첫 단락에는 접속사를 안 쓰는 게 좋은데, 쓰려거든 최소한으로, 문장을 강조할 수 있는 접속사를 넣어라.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결국 잘 쓰려면 매일매일 꾸준히 쓰는 방법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쉽고도 어려운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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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상실
톰 울프 지음, 박순철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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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는 1975년에 이미 현대 미술은 상실되었다고 말한다. 와우~ 그가 언급하는 작가들은 2000년대인 지금까지도 굉장한 작가들로 여겨지고 있는데, 30년 전에 이미 그들을 날카롭게 비판한 작가가 있었다니 놀랍다. 그의 글은 신랄하며, 재치있고, 예술가에 대한 독자들의 맹목적 존경심에 의심을 품게 한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고백하기를, 자신은 최소한 미술에 있어서 만큼은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고 믿어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현대미술은 ‘아는 것이 곧 보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현대미술은 완전히 문예적 성격을 띄게 되었으며, 그림이나 다른 작품은 오직 문의를 예시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기에.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책을 읽다보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간단히 말하면 미술보다 이론이 먼저란 소리다. 작가는 현대미술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가차없이 쏟아 놓은 후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예언한다. 2000년이 되어 만약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나 현대 미술관이 1945년부터 75년 사이의 위대한 미국 미술 회고전을 열게 되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폴록, 드 쿠닝, 존스가 아니라 그린버그, 로젠버그, 스타인버그(이론가들)가 될 것이라고. 그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이론의 설명서들이 액자에 걸려 있고, 그 옆에 화가들의 작품을 축소한 조그만 복사화가 있을 것이라고.

  물론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예언은 틀렸다는 것을. 그러나 작가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실 나의 경우 폴록이나 로스코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처음 접했을 때 그림들이 가진 의도와 의미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론을 애써 떠올리며 감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림 자체를 즐기기는 어려웠다. 만약 화가가 혹은 미학가가 제시하였던 이론을 몰랐다면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에서 미술교사로 분한 줄리아 로버츠는 거대한 폴록의 작품을 보며 감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체 그녀가 느꼈던 감동은 그가 살아왔던 삶이었을까, 그가 추상주의의 선두자로 떠올랐기 때문일까, 이론가의 이론을 먼저 접했기 때문일까, 작품에 마구 뿌려진 물감들의 자유로운 선이었을까,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드리핑 기법 때문이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 모두 실언을 합시다.” 그래. 이론도 중요하다. 알면 보인다는 말도 맞다. 하지만, 이론을 몰라도 볼 수 있다. 나에게 끌리는 그림이 좋은 것이지, 화가가 유명하다고 해서 그림이 좋은 것은 아니다. 톰 울프의 책은 처음인데, 보석을 발견한 기분. 2013년을 이토록 멋진 책과 함께 마무리한다.

 

# 그 어떤 작품도, 심지어 잭슨 폴록이나 윌렘 드 쿠닝의 작품도, 그때의 이론만큼 대담하고 자신감 넘치는 기념비가 되지 못했다. 작품들은 ‘조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론들은 ‘멋있었다.’ 55

 

# 특히 그린버그는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했다. 그는 첫인상이 호감을 주는 인물도 아니었고, 말을 꺼냈다가도 우물쭈물하는 등, 기분에 따라 이야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의 산문 스타일도 비슷했다. 그는 ‘본질’, ‘순수’, ‘광학적’, ‘형식적 요소’, ‘재조정의 논리’ 그밖에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난해한 ‘괴팅겐 학자식’의 동의어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서 셸리(작가)라도 당황하게 만들 절망과 분노의 외침을 터뜨리곤 했다. 60

 

# 아직 얼굴을 찌푸리며 폴록의 작품이 ‘더럽다’, ‘혼란스럽다’ 또는 ‘추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윗동네나 아랫동네에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이런 비난에 대해 그린버그는 훌륭히 대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심오하고 독창적인 작품은 처음에는 추하게 보이는 법이다.” 글쎄....그렇기도 하겠군! “그 말이.......옳아!” 문화촌의 모든 사람들이 최초에 자신이 참여하지 않았던 ‘주의’(ism)를 몇 개씩은 기억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의 시대에 그린버그의 이 발언은 모더니즘의 깊은 통찰에서 나오는 금언같이 들렸다. 수집가, 미술관 관계자, 심지어 일부 화상들마저 처음에 정말로 ‘추하게’ 보았던 작품들에게서 이상한 광채를 보기 시작했다. 하여튼 미술계에서 포록이 차지하는 지위에 대해 그린버그가 옳았다면, 그린버그의 이론 자체도 옳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폴록은 이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의 작품을 돌리기 시작했다. 전진! 더 평면적으로! 더 거무스름하게! 더 균일하게! 그러나 구멍은 줄이도록! (그린버그는 폴록의 그림이 완전한 평면성을 지니고 있으나 때때로 구멍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린버그는 폴록의 스튜디오에 자주 들러 ‘현장 비평’을 하곤 했다. 폴록은 곧 ‘그 자신(지난날의 잭)’과 ‘그에 대한 평판’ 사이의 경계선이 어디 있는지 알기가 어려워졌다.75

 

# “솔직히 말해서 요즘엔 이론이 없으면 그림을 봐도 모르겠어.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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