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데부 - 이미지와의 만남 동문선 현대신서 184
존 버거 지음, 이은경 옮김 / 동문선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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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책을 읽다보면 주눅이 들 때가 있다. 작가의 글이 너무 깊고 아름다워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적어왔던 나의 글들이 모래알처럼 하찮게 느껴진다. 존 버거의 글이 그렇다. 문장 하나하나에 품격이 있고, 고매하다. 사진 혹은 그림 한 장으로 놀라운 사유를 이끌어낸다. 글을 읽으며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디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은 그냥 읽어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랑데부>는 여러 매체에 수록한 에세이들을 모은 것인데 주제는 농부, 건축, 영화, 그림, 작가, 어머니, 드로잉, 극장 등 다양하다. 각 에세이 첫 장에는 그림(사진)이 실려 있다. 작가는 그 이미지를 물꼬로 하여 글을 시작한다. 하지만 글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그 이미지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미지들을 묘사하고,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는 글을 읽으며 머리 속으로 부지런히 상상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꽤 집중을 요구하기 때문에 책에 이미지를 수록하지 않은 작가가 원망스러워 질지도 모른다. 작가는 헌신을 다해 글을 썼고,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이기는 독자에게 달렸다.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작가를 찬양하기로 마음먹었다.

 

* 텔레비전 시리즈와 멜로드라마들은 한결같이 마치 제집 같은 곳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네마에서 우리는 여행자이다. 주인공은 우리에게 이방인이다. 우리가 가장 친숙한 순간이 이 주인공들을 이방인으로 종종 마주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스토리에 깊이 이런 주장은 믿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개별적인 등장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줄리앙 소렐이나 맥베스, 나타샤 보스토바, 혹은 트리스트람 샌디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시네마의 서사 방식은 우리가 오직 그들을 만날 뿐이며, 그들과 더불어 살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4.

 

* 농부들에게 경험적인 것은 소박한 것이다. 농부는 한번도 전적으로 예측 가능하고 가시적으로 출현하는 것과 더불어 일하지 않는다. 농부에게 가시적인 것은 대체로 비가시적인 상태의 신호일 따름이다. 그는 표면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을 자기 마음속에서 보다 잘 그려 보고 형상화하기 위해 표면을 만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작하거나 멈추기 위해 자기 자신 너머에 있는, 혹은 어떤 사람 너머에 있는 과정을 따르면서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100.

 

* 극장은 물리적으로 두 배나 상호 공존에 의존한다. 공연 시간과 드라마의 순간이 그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현재를 떠난다. 극장에서 우리는 현재를 결코 떠날 수 없다. 과거는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방식으로 현재가 된다. 과거를 현재로 만드는 이 고유한 가능성이 극장이다. 168.

 

* 기억은 이상한 기능을 갖는다. 기억이 받아들인 자극이 좀 더 날카롭고 좀 더 고립된 것일수록, 그 자극은 좀더 잘 기억된다. 자극이 포괄적일수록 그런 자극은 기억이 잘 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흑백 사진이 역설적으로 컬러 사진보다 좀더 도발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흑백 사진은 기억이 재빠른 분출을 자극하는데,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적고 남아 있는 것은 좀 더 많기 때문이다. 216.

 

* 문학에서 진정성은 작가의 개인적인 정직성과는 거리가 멀다. 식언을 밥먹듯이 하는 위대한 작가들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정착하여 안정되게 사는 사람들이나 다름없이 자주 자기 말을 어긴다. 게다가 많은 작가들-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은 극도로 이기적이며, 자기에게 의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안중에도 없다. 존경받는 작가와 만난 독자들의 실망은 아마 진정성의 원천을 혼동한 까닭에서 비롯된다. 문학의 진정성은 정직성이나 지혜와는 상관이 없다. 아름다움이나 미학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다. ‘아름다운’ 모든 글쓰기는 미덥지 못하다. 진정성은 오직 충실성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경험의 모호성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다. 모호성의 에너지는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사건으로 어떻게 이끌어 나가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데 있다. 그것의 신비는 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 위에 있다.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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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슬픈 외국어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사상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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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루키의 책을 펼친다. 그의 에세이는 소설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김훈 작가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사랑하듯. 무심한 듯한 말투가 좋고, 소소한 자기 생각을 꾸밈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좋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마라톤, 재즈, 영화, 여행, 음식 이야기가 주요 소재인 것도 마음에 든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차곡차곡 읽다보니 다른 에세이집에서 읽었던 내용이 또 등장하기도 한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다시 읽어도 즐거우니까. 하루키의 글은 깔깔거리기보다 피식 웃음이 나는 정도인데, 그 정도 웃음을 지속적으로 선사하는 그의 은근한 유머감각은 얼마나 위대한가.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그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1991년부터 몇 년간 체류하면서 잡지사에 틈틈이 연재하였던 수필들을 모은 것이다(그 기간에 그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태엽 감는 새>라는 두 소설을 완성하였다). 작가는 미국과 일본의 문화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읽다보면 과연 그렇겠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일본과 한국은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다).

  일요일 오후, 나른한 몸을 기대고 커피를 마시고 빌 에반스의 음악을 들으며 하루키의 수필을 읽고 있자니 근사한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는 느낌이다. 와우~책 한 권이 주는 힘이란 이토록 굉장하다. 귀여운 하루키 아저씨.

 

* 그리고 프린스턴에 와서 편한 건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경우 이외에는 거의 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돈 이야기가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는 일이 극히 드물다. 거꾸로 말하면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돈 이야기만 한다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무라카미 씨는 베스트셀러를 써서 부자니까 이 정도쯤이야” 하는 말을 듣는다.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말해 쓸데없는 참견이다. 나는 1600cc 작은 차를 타고 다녔는데, 여러 사람으로부터 “무라카미 씨는 돈이 있으니까 이런 거 말고 좀 더 비싼 차를 사는 게 어떻겠습니까”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 맘이다. 굳이 비싼 차가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생각에 즐겁게 몰고 다니니까 다른 사람에게 이런저런 말을 들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런 점에서는 “돈? 아아,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돈 같은 것도 있었군요” 하는 프린스턴의 학자인 척하는 분위기는 정말 안심이 된다. 그런 건 위선적이지 않느냐, 이 세상에 돈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지 않느냐, 라는 말을 듣는다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모두 돈 얘기를 그다지 입 밖에 꺼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정말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살고 있으면 물질적인 영리추구를 본체만체하면서, “세상이 전부 돈으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하고 고집스레 살아가는 것이   본래 인텔리의 사명이 아닌가, 당연한 자세가 아닌가 하고 문득 생각하곤 한다.

  결국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일본에서는 지적 계급성이라는 것이 거의 해체돼버렸다. 전후 얼마 동안은 그런 것도 어느 정도는 시스템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산주의나 음악다방이나 순수문학 같은 것의 소멸과 호응하듯이 어느 틈엔가 슬며시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지적 계급성이 사러져버리면 계급적 스노비즘 같은 것의 존재 의의도 사라져버린다.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라 하면, 계급적 스노비즘의 잔존 기억을 대중에게 돌려 ‘베를린 장벽의 파편’처럼 상품으로 조금씩 팔아치우고 있는 거대 유통, 정보 자본뿐이다. 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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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 태양과 청춘의 찬가
김영래 엮음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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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브레송의 사진첩을 넘기다 매우 매우 멋지게 생긴 남성이 담배를 물고 따뜻하지만 도전적인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어머,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누구지? 어떤 배우인가 싶어 제목을 보니 ‘알베르 카뮈’였다. 아니 노벨상을 받은 작가가 얼굴까지 이토록 잘생겼다니 인생은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였지.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카뮈를 다시 만났다.

  이 책은 카뮈의 글들과 인터뷰, 일기, 세 개의 작품 중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엮은 것이다. 카뮈의 책 중 <페스트>와 <이방인>만 읽어 본 나로서는 카뮈의 사생활?을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된 반가운 책이다. 카뮈를 모르는 독자라면, 카뮈를 쉽게 사랑하게 될 기회를 얻는 책이 될 것이다.

1913년 알제리에서 빈민가의 아들로 태어난 카뮈는 가난과 싸워야 했다. 아버지는 1차세대전으로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여성이었다. 거기다 소년 시절에 얻은 폐결핵으로 평생 질병과 동거해야 했으며, 1,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견뎌야만 했다. 어찌 보면 카뮈의 인생은 행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문학이 있었고, 17살에 32살의 장 그르니에를 만나며 그는 작가의 꿈을 키워간다. 1957년 노벨상을 받았지만 그로부터 3년 후 47살의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다.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글을 쓰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질병과 싸우며 살았던 카뮈. 글쓰기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것은 ‘진실에 대한 섬김과 자유에 대한 섬김’이었다. 카뮈는 거짓말을 거부하였고, 억압에 맞서서 저항하였으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나는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이방인>의 첫 문장을 읽으며 두근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도 유명한 책이라 멋모르고 읽었던 그때의 <이방인>은 살짝 따분하고,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지금 다시 읽는 <이방인>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뫼르소의 모습에서 카뮈가 느껴진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뫼르소, 거짓말 하기를 거부하는 뫼르소, 진실에 대한 열정을 가진 뫼르소. 이제 나는 뫼르소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 드는 것이 이래서 좋구나.

 

* 모든 완성은 속박이다. 그것은 더 높은 완성을 강요한다. <작가수첩 2>1951. 23.

 

* 여행의 가치를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다. 어느 한 순간, 자기 나라나 모국어와는 그토록 먼 곳에서(프랑스어로 된 신문 한 장도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낯선 카페에서 어깨를 맞대고 앉을 사람이 그리운 이런 저녁들도 그러하다) 어떤 막연한 두려움이 불현듯 우리를 사로잡고 옛 습관들의 보금자리로 되돌아가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이 밀려드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가져다주는 가장 확실한 선물이다. 그 순간 우리는 열에 들뜨는 동시에 구멍투성이가 된다. 아주 조그만 충격도 우리의 존재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어놓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빛만 보아도 영원이 바로 거기에 있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어떤 고행이라고 본다. 교양이라는 것이 사람의 가장 내밀한 감각, 즉 영원에 대한 감각의 훈련이라고 정의한다면, 사람은 자신의 교양을 위하여 여행하는 것이다. 쾌락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파스칼이 말하는 ‘기분전환’이 우리를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듯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심각한 지혜인 여행은 우리를 그것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작가수첩 1>1935. 68-69

 

* 카페며 신문이 없다면 여행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말로 인쇄된 신문 한 장, 저녁 무렵 우리가 사람들과 팔꿈치를 부딪쳐 보기를 원하는 곳, 그런 것의 덕분으로 우리는 제 고향에서 자기였던-그러나 먼 곳에 가져다놓으면 그렇게도 낯설어 보이는-그 사람의 낯익은 몸짓을 흉내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행을 귀중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버린다. 이제 더 이상 속임수를 써볼 수는 없다-사무실과 작업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시간들 뒤에 숨어서 가면을 쓰고 지내는 짓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불평을 해대지만, 사실은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 또한 그러한 시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소설들을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는 “아내가 죽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일까지 처리해야 할 한 무더기의 발송 서류가 잔뜩 남아 있다.” 그런데 여행은 이 피난처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고 만다. 우리의 가족 친지와 우리의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의지가 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우리의 가면도 벗겨져버린 채(전차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이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안과 겉> 중 ‘삶에의 사랑’ 1937년. 71.

 

* 헤겔. “오직 현대 도시만이 인간 정신에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기틀을 부여한다.”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지금은 대도시들의 시대다. 인간은 이 세계에서 그 진실을, 그것의 항구성과 균형을 이루어주는 것을 절단해버렸다. 다시 말해서 자연, 바다 같은 것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의식은 오직 도시의 길바닥에만 있다! (1945년) 74

 

* 옛날의 철학자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책 읽기보다 스스로 심사 숙고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처럼 구체적인 것에 가까이 매달린 것이다. 그런데 인쇄술이 그걸 바꿔놓았다. 깊이 생각하기보다 책을 더 많이 읽게 된 것이다. 우리는 철학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만 주석을 가진 것이다. 철학에 전념하던 철학자들의 시대가 가고 철학자들에게 전념하는 철학 교수들의 시대가 왔다고 지적한 에티엔 질송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태도에서는 겸손과 동시에 무력함이 엿보인다.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라는 말로 책을 시작하는 사상가가 있다면 그는 웃음을 살 것이다. 오늘날 아무런 권위, 인용, 주석 등에 기대지 않은 채 나오는 철학 서적이 있다면 그것은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1943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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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매
안톤 체홉 원작, 데이빗 마멧 번안, 황동근 옮김 / 예니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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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체홉의 작품은 연극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가 무대에 올려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극작품은 대본을 읽고 직접 연출된 연극을 봐야만 완성되는 것이라 사실 <세 자매>를 읽고 이에 대한 감상?을 쓰는 것은 무리가 있다. 종이에 쓰여진 글자와 대사로 표현되는 글자는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말투를 상상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체홉이 <세 자매>에서 나타내려고 했던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홉은 <세 자매> 초연을 보고 나서, 연극이 자신은 대본에서 희망을 그려냈는데 연극은 단순히 비극으로만 묘사해서 화를 냈다고 한다.

  배경은 러시아의 지방 도시에서 살고 있는 세 자매와 가족을 무대로 벌어진다. 올가, 마샤, 이리나는 언젠가는 꿈의 상징인 모스크바로 떠나려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주위 환경은 세 자매를 고난으로 몰고 가고 이들은 결국 모스크바를 떠나지 못한다. 맏딸인 올가는 책임감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둘째인 마샤는 틀에 박힌 남편을 마음속으로 멀리하다 모스크바에서 온 군인 베르쉬닌을 사랑하게 되나 결국 그를 떠나보낸다. 막내 이리나는 모스크바에 가고 싶은 마음에 사랑하지 않는 뚜젠바흐와 약혼을 하나, 일리나를 사모하던 솔료이느는 뚜젠바흐에게 결투 신청을 하고 뚜젠바흐는 결국 결투로 인해 죽는다. 올가의 남동생인 안드레이는 도박으로 세 자매의 집을 저당잡히고, 재산을 탕진하며 안드레이의 아내 나따샤는 돈을 빼돌리고 바람을 피운다.

  1막부터 4막까지 줄기차게 절망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지다 마지막 장면은 세 자매가 서로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여기서 그녀들은 현실의 모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읽지 말자고 서로를 다독인다. 희망을 대화를 나누며, 미래를 기대하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비평가들은 비극 속에서 희망을 찾는 세 자매를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나 나는 잘 모르겠다. 그녀들이 과연 저 상황들을 잘 극복하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체홉은 절망하고 넘어지면서도 끊임없이 이상향(모스크바)을 향해 나아가는 혹은 꿈꾸는 인간의 삶 자체가 희망이라고 본 것인가?

 

* 마샤 : 오, 봐. 음악이 연주되고 있어. 그들이 연주하고 있어. 그들이 떠나가고 잇어. 그들 모두는 영원히, 영영 가는 거야. 그리고 우린 여기 남아서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고 있어. 우리가 만들어야 할....우리가 창조해야 할 인생을 말이야......(사이)

이리나 :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분명해질 거야. 힘들어보이는 지금의 의미를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고통의 의미도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때까진 우린 일을 해야 돼. 난 일할 테야. 학교에서 날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일생을 바치겠어. (사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그리고 온 세상에 눈이 쌓이겠지, 그리고 난 일 할 거야. 일을 할 거야....

올가 :......음악이 밝게 연주되고 있어. (사이) 시간들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사라지고, 우리들도 사라질 테지. 우리만 여기 잠시 남았어. 지금 알 수 없는 우리의 고통도 우리의 후손들에겐 기쁨으로 바뀌게 될 거야. 그들은 우리를 기억하고 우리를 축복하겠지. 혹은 우리에 대한 기억들로 감사할 거야,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서 말이야. 내 사랑, 오 나의 사랑하는 동생들....... (4막 끝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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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3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옥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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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는 Half of a Yellow Sun 이다. 꼬박 7시간 동안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고픔도 참았다. 주인공들은 전쟁 피난민이 되어 고생하는 장면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나는 이렇게 따뜻한 곳에 살며 마음껏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부엌찬장에 놓인 다양한 그릇, 옷장에 걸린 알록달록한 옷들.....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쓸모없어질 물건들이 주위에 가득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아디치에는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한 여성 작가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나이지리아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었으며 그녀는 그곳에서 부족함 없이, 아니 매우 풍족하게 자라났다. 그러므로 아디치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난한 아프리카 여성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부유한 그녀의 삶을 투영함과 동시에 평범한 나이지리아인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최상층과 최하층의 삶을 어찌나 절묘하게 교차시키고, 연결시키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비아프라 공화국’ 을 아는가? 책을 읽으며 처음 비아프라 공화국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바르가스 요사가 쓴 <염소의 축제>가 떠올랐다. 그 책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32년간 통치한 트루히요라는 독재자가 나오는데, 그런 인물은 당연히 허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트루히요는 실제 인물이고 도미니카를 32년을 통치하였다. 비아프라 공화국은 남부의 이그보 종족이 나이지리아루터 독립하여 1967년~1970년간 존속했던 아프리카의 실제 나라이고 나는 소설을 통해 참혹했던 나이지리아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만, 독립 후에도 나이지리아를 자기 영향권에 두고 싶은 영국은 식민 지배에 협조한 북부 출신에게 정부를 넘겨준다. 이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남부 출신 군인들이 반발하여 쿠테타를 일으키고, 북부 출신들이 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자 남부는 ‘비아프라 공화국’을 세워 나이지리아로부터 독립하려고 한다. 4년에 걸친 싸움에서 영국을 등에 업은 나이지리아와 달리 비아프라는 기아와 온갖 물품 부족에 시달리다 결국 무너지고 만다.

  소설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부 출신의 민족주의자 대학 교수 오데니그보, 그 집의 일꾼인 열세 살 소년 하인 으그우, 오데니그보의 연인 올란나, 올란나의 쌍둥이 언니 카이네네, 카이네네의 연인인 영국인 리처드. 이들이 겪는 사랑과 독립을 위한 투쟁이 소설을 끌고 나간다. 두 쌍의 부부와 으그우, 평화로운 삶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들은 서로를 갈라놓으나 이들은 전쟁을 겪으며 결국 그런 일들은 참혹한 현실 속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로에 대한 용서로 나아간다. 소설에는 완벽한 인물이 없다. 아무리 멋지고 착한 사람에게도 비열한 혹은 약한 모습이 있다. 작가는 나이지리아의 역사뿐만 아니라 사람이 가진 본성까지 날카롭게 묘사한다. 작품엔 군더더기가 없다. 올란나와 카이네네의 감정을 간단한 동작이나 말 한 마디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전쟁의 비참함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우리의 세계와 너무 동떨어져 보여 상상이 되지 않는다. 잘려 나간 딸의 머리를 호리병에 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엄마, 머리가 잘려 나간 것도 모른 채 도망치다 쓰러지는 몸뚱이, 군인들에게 강간당하는 여자, 단백질 부족으로 배가 부풀어 오르다 죽어가는 아이, 매일 승리한다고 거짓말을 해대는 라디오, 거리에서 보이는 즉시 전투병으로 끌려가는 어린 소년...

  하지만 폭탄이 떨어지고, 공습 경보가 울어대는 중에서도 사랑과 양보가 존재한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키우며, 교육을 시킨다. 얼굴을 씻고, 끼니를 끓이며, 이웃을 돌본다. 어려움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하며, 서로의 아픔을 기꺼이 껴않는다. 민중들은 믿었다. ‘비아프라 공화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조금만 참고 견디면 독립할 것이라고. 민중들은 군인들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기꺼이 내어 주고, 군인들의 횡포를 견디었다. 그들은 몰랐다. 지배층이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기 바빴다는 사실을.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원조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은 패배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기차역이 없는 마을에 기차역을 만들어 내거나 도시가 정복당한 순서를 바꾸기도 하였지만, 그 시대를 규정할 만한 중요한 사건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녀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으로 등장인물의 성격을 구상한 적도 없다고 말한다. 아, 세상의 모든 전쟁은 추악하다.

 

 

* “너희 외삼촌이랑 결혼하고 나서 난 다른 여자가 나타나서 날 쫓아내지나 않을까 항상 걱정했어. 하지만 너희 외삼촌이 내 삶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어. 내 삶은 내가 바꾸고 싶을 때에만 바뀌는 거야.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외숙모.”

“내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이제 너희 외삼촌도 아주 조심하지.” 40. 2권.

 

* 우리가 죽을 때 그대는 침묵했나요?

 

머리에 딱지가 앉은 아이들

예순여덟 명 사진을 그대는 보았나요?

 

조그만 머리마나 앉았다가 썩은 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지는 부스럼을?

 

두 팔은 이쑤시개 같고 배는 축구공 같으며

살이 없어 피부가 늘어지는 아이들을 상상해 보세요.

단백질 부족증이랍니다......어려운 단어,

너무나 역겨운 단어, 죄악.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어요. 광택이 흐르는

당신이 든 <라이프> 잡지에 사진이 가득하니까요.

그대는 보았나요?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나요?

그리고 돌아서서 그대의 연인이나 아내를 껴안았나요?

 

아이들 피부는 황갈색의 연약한 찻잎으로 변해서

거미줄 같은 정맥 혈관과 부서지기 쉬운 뼈다귀를 드러낸답니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웃어요, 사진사가 사진을 찍고

혼자 떠나지 않기라도 할 것처럼.

 

302-03.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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