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 태양과 청춘의 찬가
김영래 엮음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오래 전 브레송의 사진첩을 넘기다 매우 매우 멋지게 생긴 남성이 담배를 물고 따뜻하지만 도전적인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어머,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누구지? 어떤 배우인가 싶어 제목을 보니 ‘알베르 카뮈’였다. 아니 노벨상을 받은 작가가 얼굴까지 이토록 잘생겼다니 인생은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였지.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카뮈를 다시 만났다.

  이 책은 카뮈의 글들과 인터뷰, 일기, 세 개의 작품 중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엮은 것이다. 카뮈의 책 중 <페스트>와 <이방인>만 읽어 본 나로서는 카뮈의 사생활?을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된 반가운 책이다. 카뮈를 모르는 독자라면, 카뮈를 쉽게 사랑하게 될 기회를 얻는 책이 될 것이다.

1913년 알제리에서 빈민가의 아들로 태어난 카뮈는 가난과 싸워야 했다. 아버지는 1차세대전으로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여성이었다. 거기다 소년 시절에 얻은 폐결핵으로 평생 질병과 동거해야 했으며, 1,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견뎌야만 했다. 어찌 보면 카뮈의 인생은 행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문학이 있었고, 17살에 32살의 장 그르니에를 만나며 그는 작가의 꿈을 키워간다. 1957년 노벨상을 받았지만 그로부터 3년 후 47살의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다.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글을 쓰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질병과 싸우며 살았던 카뮈. 글쓰기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것은 ‘진실에 대한 섬김과 자유에 대한 섬김’이었다. 카뮈는 거짓말을 거부하였고, 억압에 맞서서 저항하였으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나는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이방인>의 첫 문장을 읽으며 두근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도 유명한 책이라 멋모르고 읽었던 그때의 <이방인>은 살짝 따분하고,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지금 다시 읽는 <이방인>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뫼르소의 모습에서 카뮈가 느껴진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뫼르소, 거짓말 하기를 거부하는 뫼르소, 진실에 대한 열정을 가진 뫼르소. 이제 나는 뫼르소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 드는 것이 이래서 좋구나.

 

* 모든 완성은 속박이다. 그것은 더 높은 완성을 강요한다. <작가수첩 2>1951. 23.

 

* 여행의 가치를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다. 어느 한 순간, 자기 나라나 모국어와는 그토록 먼 곳에서(프랑스어로 된 신문 한 장도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낯선 카페에서 어깨를 맞대고 앉을 사람이 그리운 이런 저녁들도 그러하다) 어떤 막연한 두려움이 불현듯 우리를 사로잡고 옛 습관들의 보금자리로 되돌아가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이 밀려드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가져다주는 가장 확실한 선물이다. 그 순간 우리는 열에 들뜨는 동시에 구멍투성이가 된다. 아주 조그만 충격도 우리의 존재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어놓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빛만 보아도 영원이 바로 거기에 있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어떤 고행이라고 본다. 교양이라는 것이 사람의 가장 내밀한 감각, 즉 영원에 대한 감각의 훈련이라고 정의한다면, 사람은 자신의 교양을 위하여 여행하는 것이다. 쾌락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파스칼이 말하는 ‘기분전환’이 우리를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듯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심각한 지혜인 여행은 우리를 그것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작가수첩 1>1935. 68-69

 

* 카페며 신문이 없다면 여행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말로 인쇄된 신문 한 장, 저녁 무렵 우리가 사람들과 팔꿈치를 부딪쳐 보기를 원하는 곳, 그런 것의 덕분으로 우리는 제 고향에서 자기였던-그러나 먼 곳에 가져다놓으면 그렇게도 낯설어 보이는-그 사람의 낯익은 몸짓을 흉내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행을 귀중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버린다. 이제 더 이상 속임수를 써볼 수는 없다-사무실과 작업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시간들 뒤에 숨어서 가면을 쓰고 지내는 짓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불평을 해대지만, 사실은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 또한 그러한 시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소설들을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는 “아내가 죽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일까지 처리해야 할 한 무더기의 발송 서류가 잔뜩 남아 있다.” 그런데 여행은 이 피난처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고 만다. 우리의 가족 친지와 우리의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의지가 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우리의 가면도 벗겨져버린 채(전차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이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안과 겉> 중 ‘삶에의 사랑’ 1937년. 71.

 

* 헤겔. “오직 현대 도시만이 인간 정신에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기틀을 부여한다.”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지금은 대도시들의 시대다. 인간은 이 세계에서 그 진실을, 그것의 항구성과 균형을 이루어주는 것을 절단해버렸다. 다시 말해서 자연, 바다 같은 것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의식은 오직 도시의 길바닥에만 있다! (1945년) 74

 

* 옛날의 철학자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책 읽기보다 스스로 심사 숙고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처럼 구체적인 것에 가까이 매달린 것이다. 그런데 인쇄술이 그걸 바꿔놓았다. 깊이 생각하기보다 책을 더 많이 읽게 된 것이다. 우리는 철학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만 주석을 가진 것이다. 철학에 전념하던 철학자들의 시대가 가고 철학자들에게 전념하는 철학 교수들의 시대가 왔다고 지적한 에티엔 질송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태도에서는 겸손과 동시에 무력함이 엿보인다.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라는 말로 책을 시작하는 사상가가 있다면 그는 웃음을 살 것이다. 오늘날 아무런 권위, 인용, 주석 등에 기대지 않은 채 나오는 철학 서적이 있다면 그것은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1943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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