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데부 - 이미지와의 만남 동문선 현대신서 184
존 버거 지음, 이은경 옮김 / 동문선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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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책을 읽다보면 주눅이 들 때가 있다. 작가의 글이 너무 깊고 아름다워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적어왔던 나의 글들이 모래알처럼 하찮게 느껴진다. 존 버거의 글이 그렇다. 문장 하나하나에 품격이 있고, 고매하다. 사진 혹은 그림 한 장으로 놀라운 사유를 이끌어낸다. 글을 읽으며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디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은 그냥 읽어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랑데부>는 여러 매체에 수록한 에세이들을 모은 것인데 주제는 농부, 건축, 영화, 그림, 작가, 어머니, 드로잉, 극장 등 다양하다. 각 에세이 첫 장에는 그림(사진)이 실려 있다. 작가는 그 이미지를 물꼬로 하여 글을 시작한다. 하지만 글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그 이미지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미지들을 묘사하고,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는 글을 읽으며 머리 속으로 부지런히 상상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꽤 집중을 요구하기 때문에 책에 이미지를 수록하지 않은 작가가 원망스러워 질지도 모른다. 작가는 헌신을 다해 글을 썼고,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이기는 독자에게 달렸다.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작가를 찬양하기로 마음먹었다.

 

* 텔레비전 시리즈와 멜로드라마들은 한결같이 마치 제집 같은 곳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네마에서 우리는 여행자이다. 주인공은 우리에게 이방인이다. 우리가 가장 친숙한 순간이 이 주인공들을 이방인으로 종종 마주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스토리에 깊이 이런 주장은 믿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개별적인 등장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줄리앙 소렐이나 맥베스, 나타샤 보스토바, 혹은 트리스트람 샌디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시네마의 서사 방식은 우리가 오직 그들을 만날 뿐이며, 그들과 더불어 살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4.

 

* 농부들에게 경험적인 것은 소박한 것이다. 농부는 한번도 전적으로 예측 가능하고 가시적으로 출현하는 것과 더불어 일하지 않는다. 농부에게 가시적인 것은 대체로 비가시적인 상태의 신호일 따름이다. 그는 표면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을 자기 마음속에서 보다 잘 그려 보고 형상화하기 위해 표면을 만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작하거나 멈추기 위해 자기 자신 너머에 있는, 혹은 어떤 사람 너머에 있는 과정을 따르면서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100.

 

* 극장은 물리적으로 두 배나 상호 공존에 의존한다. 공연 시간과 드라마의 순간이 그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현재를 떠난다. 극장에서 우리는 현재를 결코 떠날 수 없다. 과거는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방식으로 현재가 된다. 과거를 현재로 만드는 이 고유한 가능성이 극장이다. 168.

 

* 기억은 이상한 기능을 갖는다. 기억이 받아들인 자극이 좀 더 날카롭고 좀 더 고립된 것일수록, 그 자극은 좀더 잘 기억된다. 자극이 포괄적일수록 그런 자극은 기억이 잘 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흑백 사진이 역설적으로 컬러 사진보다 좀더 도발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흑백 사진은 기억이 재빠른 분출을 자극하는데,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적고 남아 있는 것은 좀 더 많기 때문이다. 216.

 

* 문학에서 진정성은 작가의 개인적인 정직성과는 거리가 멀다. 식언을 밥먹듯이 하는 위대한 작가들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정착하여 안정되게 사는 사람들이나 다름없이 자주 자기 말을 어긴다. 게다가 많은 작가들-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은 극도로 이기적이며, 자기에게 의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안중에도 없다. 존경받는 작가와 만난 독자들의 실망은 아마 진정성의 원천을 혼동한 까닭에서 비롯된다. 문학의 진정성은 정직성이나 지혜와는 상관이 없다. 아름다움이나 미학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다. ‘아름다운’ 모든 글쓰기는 미덥지 못하다. 진정성은 오직 충실성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경험의 모호성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다. 모호성의 에너지는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사건으로 어떻게 이끌어 나가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데 있다. 그것의 신비는 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 위에 있다.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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