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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ㅣ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오래전 존 어빙의 <가아프가 본 세상>이라는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스토리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는 것이 꿀맛이었다. 그 뒤로 <일년 동안의 과부>, <사이더 하우스>등 한국에 번역된 그의 모든 소설을 다 찾아 읽으며 이야기에 푹 빠졌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즐거움은 그 책이 정전의 계보에 속하는 것인지, 문학적으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허겁지겁 읽었기에 더욱 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페이지 터너라 불릴 만한 이야기꾼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을 읽었을 때, 존 어빙(살만 루시디도 살짝 스치긴 했지만)이 떠올랐다. 새로운 이야기꾼(게다가 이번엔 위대하기까지 하다)이 내게 와준 것이다. 아, 그의 소설은 달고 달다. <포트노이의 불평>, <에브리맨>, <네메시스>에 이어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까지 그의 소설을 읽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가란 모름지기 이래야 하는 것이다. 몸이 아파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면서도 책장을 넘길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문장. 그 텍스트의 힘.
* 마리 선생님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인간에겐 믿을 수 없는 여러 모습이 존재한다는 게 자네 책의 주제 아니었나? 자네 소설에서처럼 인간에게는 모든 게 가능해. 세상에, 한 명이 아니었네. 아이라의 여자 말이야. 드높은 사회적 양심과 못 말리는 성욕이 공존했지. 양심적인 공산주의자, 성욕이 넘치는 공산주의자. ” 274
* “군에 있을 나는 매일 밤 버턴의 <우울과 해부>를 읽었네. 프랑스에 진입하기 전 영국에서 훈련받을 때 처음으로 그 책을 읽었지, 네이선, 난 그 책이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당혹스러웠어. 버턴이 우울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나? 모든 사람은 우울에 빠지는 성향을 타고나지만, 일부만이 우울을 습관화한다. 어떻게 습관이 되는걸까? 이 문제에 버턴은 답하지 않았네. 그 책에는 답이 없었지. 난 상륙작전이 끝날 때까지 의문을 품었고, 나중에 개인적인 경험으로 알아낼 때까지 계속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네.
배신을 당하면 그 습관이 생기는 거야. 정답은 배신이었어. 311-2
* “예술이 무기일까?” 그가 내게 물었다. 그 ‘무기’라는 말은 참으로 경멸적이었고, 그 자체가 무기였다. “예술은 모든 것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해야 할까? 예술이 좋은 것들의 옹호자야? 이걸 다 누구한테 배웠지? 예술이 슬로건이라고 누구한테 배웠어? 누가 너한테 예술은 ‘민중’을 위한 거라고 가르친 거야? 예술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관심을 끌 만한 예술은 나오지 않아....” 366
* “정치투사는 세계를 변화시킬 신념을, 강한 믿음을 소개하고, 예술가는 이 세계에 들어설 자리가 없는 창작물을 소개하지. 그 창작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예술가는, 진지한 작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걸 소개하는 거야...” 375
“고독이란 유토피아를 조심하게. 숲속 오두막, 분노와 슬픔을 차단하는 오아시스에 유토피아가 있다는 생각을 조심하기 바라네. 난공불락의 고독, 아이라의 인생은 그렇게 끝났지. ” 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