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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정전 - 할인행사
왕가위 감독, 장국영 외 출연 / 우리엔터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미루고 미루다 뒤늦게 왕가위의 <아비정전>을 보았다. 제목만 봐서는 도저히 무슨 얘기지 알수가 없다. 영어 제목은 Days of being wild이다. 훨씬 낫군. 누군가 와일드한 나날들을 보낸단 말이지?
왕가위 감독의 작품은 스타일리쉬하다. 방금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그래픽 디자인과를 졸업하였다고 나와 있다. 어쩐지...카메라는 대부분 초라하고 낡은 홍콩의 뒷골목이나 방을 보여주지만, 오히려 화보처럼 보인다. 주인공들의 대사와 카메라가 얼굴을 비추는 각도와 조명, 심지어 음악까지 완벽하다. 시시껄렁한 사랑 이야기도 그의 손을 거치면 아름답게 피어난다. 그런 면에서는 홍상수 감독과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본 왕가위 영화들을 생각해보니 <화양연화>, <해피 투게더>, <중경삼림>이다. 일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만 쏙쏙 골라 본 셈이군. 그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배우들은 장국영, 양조위, 장만옥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모두 ‘떴다’. 그리고 배우들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요즘 작품들을 보니 외국 배우들과 영화를 많이 찍고 있다. 프랑스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왕가위 감독 작품이었더니. 세상에.
그동안 본 4편의 영화 중 <화양연화>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중경상림>에서 양조위가 비누와 수건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제외한다면. 왕가위 감독의 가장 위대한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이 4편 중에서 하나를 언급한다. 글쎄, 가장 좋은 작품이 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화양연화>에서 나왔던 풍경들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특히 장만옥이 냄비를 들고 국수를 사러 홍콩 골목길을 걸을 때, 아름다운 그녀의 아울렛과, 빗소리, 국수가 담겨 있는 냄비, 좁은 골목길의 계단, 영화를 보고 나서 얼마나 홍콩에 가고 싶던지. 홍콩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국수집이 보이면 빠짐없이 들어가 국수를 먹고 싶었다. 결국 홍콩에 갔지만 뒷골목에서 국수를 먹지는 않았다. 막상 길거리에 앉아 먹으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나 할까.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은 늘 중심에 사랑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들은 헤어지고, 죽고, 그리워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 쓸쓸하고 허무한 사랑, 궁극적으로는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삶을 차갑고 냉소적인 시선이 아닌, 따뜻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유치한 대사들도 진실되게 느껴진다. 배우들은 대부분 말이 적다. 감독은 대화보다는 나레이션, 음악, 움직임, 시선을 통하여 관객에게 다가간다.
<아비정전>의 주인공은 유덕화, 장국영, 장만옥이다. 아비(장국영)은 어렸을 때 입양되었고 양어머니로부터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삐딱하게 살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여자나 꼬시는 청년이다. 그에게는 아무 계획도 없고, 또 그럴 의욕도 없다. 수리진(장만옥)은 극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아가씨인데, 아비가 낭만적인 말로 꼬셔서 결국 그의 연인이 된다.
아비 :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까
아비 : 오늘 밤 꿈에 날 보게 될꺼에요
(다음날) 수리진 : 어제 밤 꿈에 당신 본 적 없어요,
아비 : 물론이지 한숨도 못 잤을테니
역시 카사노바는 말을 잘한다. 그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아비에게 결혼하자고 하나, 아비는 싫다고 한다. 아비에게 사랑은 그 한순간일 뿐이다. 수리진은 상처받고 떠나나 그를 잊지 못해 힘들어한다.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아비 집 근처를 순찰하는 한 경찰관(유덕화)이 그의 집 앞에서 서성이는 수리진을 발견하고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경찰관은 수리진을 사랑하게 되나 그녀는 알지 못한다. 루루는 전문 댄서로 아비와 우연히 만나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아비가 독신주의자이고,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친어머니를 늘 만나고 싶었던 아비는 마침내 양어머니가 친어머니의 주소를 알려줘, 루루를 버려두고 필리핀으로 떠난다. 경찰관은 예전부터 원했던 선원이 되어 출항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간다. 필리핀으로 간 아비는 친어머니가 자신을 만나길 거부하자, 필리핀 차이나타운을 떠돌며 하루하루 건달처럼 살아간다. ‘가정부는 어머니가 집에 없다고 했지만 내가 집을 나설 무렵 뒤에서 누군가 날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다시 돌아오진 않겠지만 단 한번이라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싫으시다면 나도 내 얼굴 보여주지 않는다.’
우연히 선원이 된 경찰관과 만난 아비는 함께 식사를 하고, 아비는 그 식당에서 불법 여권을 받으려고 한 남자를 기다린다. 그는 거래를 하다 돈을 주지 않고, 상대방을 칼로 찔러 여권을 빼앗고 도망친다. 엉겹결에 같이 위험에 처하게 된 경찰관은 그와 함께 기차에 오른다. 경찰관이 잠깐 다른 사람에게 다음 정차역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러 간 사이, 아비는 아까 자신이 찔렀던 남자 동료의 총에 맞는다. 그는 죽어가며 경찰관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경찰관이 수리진을 기억하냐고 묻자, 그는 나중에 그녀를 만나면 자신은 다 잊었다고 전해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비는 죽는다. 경찰관은 배를 타 선원이 되고, 수리진은 경찰관에게 전화를 걸지만 아무도 받는 사람은 없다.
영화를 보고 나니, 쓸쓸한 마음이다.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아비는 여자들을 쉽게 버리고 상처를 주는 것인가? 인생을 자포자기한 아비가 불쌍하였다. 그의 마음속은 친엄마와 양엄마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어머니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 방금 장국영의 프로필을 보니, 그의 실제 삶과도 비슷하다고 나온다.
영화에서 장국영이 속옷 차림으로 맘보 춤을 추는 장면은 유명하다. 이때 나오는 음악이 ‘Maria Elena’인데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멜로디이다. 자살로 생을 마친 장국영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건 웃지도 못하겠고.
아비정전 비하인드 스토리. 다른 블로거의 글을 보니, 왕가위 감독은 당시 홍콩 뒷골목의 자금을 지원받아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그들은 피튀기며 총싸움하는 전통적인 느와르 필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당대 배우였던 사람들이 내노라 하는 홍콩 느와르 스타였기 때문에. ‘유덕화, 장국영, 양조위, 장학우’ 게다가 제목까지 being wild였으니. 그러나 영화가 개봉되자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주윤발의 쌍권총 액션이 아시에서 유행을 끌고 있었는데, 이 영화는 마지막에 장국영이 총 한 발 맞아 죽는 장면 외에는 폭력적인 면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환불을 요청했고, 흥행에 참패했다. 조폭들을 열이 받아 왕가위 감독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왕가위는 필리핀에서 2년간 숨어 지내야 했다는 놀라운 뒷이야기가 있다. 영화 맨 마지막에 양조위가 등장하는데, 이는 속편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속편은 커녕 감독이 죽게 생겼으니. 나중에서야 아비정전이 재평가를 받아 새롭게 태어났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로 여겨졌다고 하니, 정말 재밌는 세상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