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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봄이 오려고 하나보다. 겨울이 마지막 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눈을 뿌리고, 차가운 바람을 불어넣지만 어디선가 슬금슬금 봄내음이 난다. 금방이라도 땅이 부풀어 올라 새 잎이 쏘옥 솟아날 것 같다. 겨울 내내 희곡과 시를 읽고 있다.
유진 오닐의 Long day's journey into night(밤으로의 긴 여로) 를 읽었다. 너무도 유명한 책이라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는데 3이제야 읽는다. <느릅나무의 욕망>도 마찬가지. 이 희곡은 오닐이 세번째 부인과 결혼 12주년을 기념하여 그녀에게 바친 작품이다. 책을 펼치면 첫장에 오닐이 부인에게 바치는 헌정사가 들어있는데, 얼마나 멋진가. ‘사랑하는 카롯타, 당신과 지내온 12년 간은 내게 있어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행이었소. 당신이 내 감사의 뜻을, 그리고 내 사랑을 알아주리라 믿소.’ 이것보다 더 근사한 선물을 찾기가 쉽지 않을 듯. 게다가 이 작품으로 유진은 사후에 퓰리처상까지 받았으니 말 다했다. 극의 내용은 유진의 자서전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사후 25년 후에 발표하도록 했으나 미망인에 의해 1995년 발표되었다.
유진의 삶을 잠깐 살펴보자면, 오닐의 아버지 제임스 오닐은 어릴 때 아일랜드 출신의 농민이었던 부모와 미국으로 이민을 왔으나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족들을 남겨둔 채 홀로 아일랜드로 건너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어린나이에 가장의 책임을 진 그는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혹독한 생활고에 시달렸기 때문에 돈에 집착하는 성격이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한 기회에 연극배우가 되었고 그 방면에서 꽤 성공했다. 그러다 엘란 퀸랜이라는 수줍음 많고 감수성 예민한 여인을 만나 결혼하여 세 아들을 얻었는데 그중 한 아들은 죽고 막내 아들이 유질 오닐이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순회공연을 다니며 연극에 관심을 가지던 오닐은 8살 때 어머니가 마약중독자가 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는 비뚤어진 성격이 되었다.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형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는 1996년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으나 곧 퇴학당하고 니체 등에 심취했다. 그는 부두 노동자, 선원 등의 생활을 하면서 남미지역을 여행했다. 이 때의 경험들은 후에 그의 작품(지평선 너머 등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방랑생활을 끝내고 지방신문기자로 일하던 중 페결핵에 걸렸고 요양원에서 치료를 한다. 그 뒤로 작품창작에 열중했고 세번의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1953년 그의 세번째 부인에게 선물했던 <밤으로의 긴 여로>의 완간을 보지 못하고 호텔방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삶은 이 작품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한 가족의 하룻동안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분위기는 절망과 체념이다. 돈에 집착이 강하고 보수적인 아버지 제임스 티론, 남편의 인색함과 직업상의 이유로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지 못한 어머니 메어리. 그녀는 점점 소녀시절을 그리워하며 신경이 분열되어 가는 아편중독자이다. 반항적이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제이미, 예민한 성격에 염세적 사고방식을 지닌 폐결핵 환자 에드먼드. 가족들은 현재 상태를 비관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용서하지 못하는 애증의 비극이 작품을 감싸고 있다.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던 과거가 극이 진행됨에 따라 밝혀지고 그들의 절망감은 점점 심해진다. 어머니는 아편 주사를 맞고 예전 소녀 시절로 돌아간 착각에 빠져 독백을 하고, 아들과 아버지는 술에 취해 그런 어머니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극이 끝난다.
극은 총 4막으로 되어 있다. 1막은 1912년 8월의 어느 아침 8시 30분 티론의 여름용 별장 거실이다. 2막 1장은 12시 45분 경, 2장은 1장보다 30분쯤 후이다. 3막은 저녁 6시 30분 경이며 4막은 한밤중쯤이다.
희곡을 읽으며 각자의 처지와 상황들이 이해가 되었다. 어렸을 적의 가난함 때문에 돈에 집착하는 제임스도 불쌍했고-자식들에게까지 심하게 인색하긴 하다. 예를 들면 에드먼드가 폐렴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가야 되는데 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립요양원을 권하는 장면등- 평생을 여기저기 떠돌며 호텔에 머물러야 했던 메어리도 안쓰러웠다. 그녀는 수녀가 되기를 원했지만 제임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는데, 점점 삶에 지치면서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 그리하여 현실에 대한 탈출구로 아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구두쇠 아버지와 아편 중독자 어머니를 둔 제이미와 에드먼드.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마음 아프고 화가 났을까. 그들의 빈정대는 말투와 제멋대로 사는 것은 부모에게 자포자기해서이다.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리 행복한 가정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행이 있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 매일 늦게 들어올 수도 있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치맛바람을 날리며 자식들에게 공부하라고 압력을 넣는 어머니가 있고, 자식들을 온통 학원에 맡기고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 어머니일 수도 있다. 오락만 좋아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아들도 있고, 부모에게 거짓말만 하고, 멋내기를 좋아하는 딸일 수도 있다. 도박에 빠진 할아버지나 다단계에 속은 할머니가 있을 수 있고, 이혼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삼촌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가족은 너무 많고, 모두 긴밀하게 엮여져 있기 때문에 나 하나 잘한다고 해서 행복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의 정의를 찾아보니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이라고 나와 있다. 일상에서 충분한 만족을 누리려면 방법은 하나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 욕심이 생기면 만족할 수 없다. 50평대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70평대를 원한다. 에쿠스를 모는 사람은 아우디가 타고 싶다. 버리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다. 가족이나 친구의 행동을 판단하고 고치려고 하면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내 맘대로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야 한다. 마음 비우기. 그래서 어렵다.
# 티론 : 잘 돌아왔다. 혼자 있자니 쓸쓸하더구나. 아니 그래, 이 밤중에 아비를 혼자 내버려 두고 나가 버리는 자식이 어디 있니? 지각도 없지. 불 끄라고 하지 않았느냐! 댄스 파티를 하는 줄 아니? 이런 한밤중에 온통 휘황찬란하게 불을 켜두다니, 다 돈 낭비야
에드먼드 : 휘황찬란하다고요? 겨우 전구 한 개에요, 한 개. 자기 전까지는 현관에 불을 켜 놓는 법이라구요. 하마터면 모자걸이에 무릎을 부딪힐 뻔했어요.
티론 : 이 방 불이 충분히 거기까지 비친다. 말짱한 정신이면 문제없어. 취했으니까 그렇지
애드먼드 : 말짱하면요? 전 환한 게 좋아요.
# 메어리 : 전 수녀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천주님의 부르심을 믿는다고요. 자신이 생기도록, 가치있는 사람이 되도록 마리아님께 기도했다고 말씀드렸어요 -생략- 그랬더니 원장님은, 단순한 공상이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그렇게 자신이 있거든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다른 친구들과 같이 생활하고 파티나 무도회에도 참석해서 즐겁게 지내는 가운데 마음을 시험해봐. 그렇게 일이년을 지내고 나서도 자신이 있거든 돌아와. 그때 다시 의논하자꾸나’ -생략-이건 졸업하는 해 겨울의 일이었어요. 그리고 봄이 되자 어떤 사건이 생겼어요. 그래요, 생각나는군요. 제임스 티론과 사랑에 빠져 얼마 동안은 행복했어요. (그녀는 슬픈 꿈을 꾸듯 앞을 응시한다. 티론은 앉은 채 몸을 조금 꿈틀거린다. 에드먼드와 제이미는 움직이지 않는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