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아네스 자우이 감독, 알랭 샤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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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캐스트에서 타인의 취향 이란 글을 읽었다. 영화도 같이 소개해 놓았는데, 관심이 가서 얼른 찾아보았다. 1999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 대충 정리하자면 주인공 카스텔라는 한 회사의 사장. 예술에 전혀 문외한인 그는, 어느 날 그가 조카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가서 감동을 받았는데 그 주연배우 클라라가 자신의 개인 과외 영어 선생님임을 알게 된다. 그는 클라라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통해 연극과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는 지적인 클라라의 취향이 아니다. 그녀는 그를 무시한다. 자신의 취향과 너무 맞지 않기 때문에.

   한편으로 카스텔라의 아내는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하는 여자이다. 집을 온통 꽃무늬와 분홍색으로 꾸미며 자신의 애완견이 다른 사람을 물어도, 그건 그 사람이 멍청하거나 나쁜 마음을 품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취향만 고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첩되고, 그러면서 각자의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아가게 된다. 꽤 재밌고 괜찮은 영화다.

   보는 내내 나도 카스텔라의 아내나 클라라처럼 내 취향만 고집하고, 남들을 은근히 무시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카스텔라의 보디가드로 나오는 프랑크의 삶도 인상깊다. 그는 전직형사로 동료와 부패한 정치인을 잡으려 했으나 위의 압력으로 조사를 못하게 되자 경찰서를 떠난다. 그러나 그의 동료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경찰서에 남는다. 프랑크는 사회가 더럽고 부조리하다고 하지만(옛 애인의 배신도 있었기에), 그의 애인이자 레스토랑의 종업원인 마니는 프랑크가 뒤에서 비판만 할 뿐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카스텔라 운전기사인 브루노는 프랑크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하나 실패할 뿐이다. 브루노도 미국으로 유학 간 애인이 미국에 남겠다고 편지를 보내자 고통스러워하나 그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중간중간에 그의 끔찍하고 서툰 플룻 연습이 나오고, 마지막에 그가 아마추어 단원들과 화음을 맞춰 플룻을 부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 내내 바보같고 답답했던 그가 다시 보였다.

  타인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내 멋대로 그들의 취향을 평가하고 깎아내릴 때가 많다. 특히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마음 속으론 다른 이의 옷 스타일을 보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에 따라 그를 내 맘대로 정의내린다. 아, 멋진 사람이구나. 혹은 너무 재미없다.

  마음이 뜨끔하다. 내 취향은 사람들이 보기엔 고상하지만 따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고상한 것은 따분하다는 공식이 은연중 있는 것 같다. 클래식 음악, 고전 소설이나 영화, 홍차 등등.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후 그것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사실 호기심이 많아 남들의 취향에 관심을 갖고 잘 듣는 편이다. 헤어지고 나면 무시할지라도. 나에게도 고정관념이 있다. 오락, 트로트, TV, 이런 것들을 하찮게 보는. 편견없이 사고한다는 것이 얼만 어려운지.

  나는 깔끔한 것이 좋다. 모든 것이 가지런히 정돈된 공간에서 있는 것이 좋다. 시끄러운 음악보다는 조용하고 악기만 연주하는 음악이 좋고, 족발, 닭발, 곱창, 육회같은 걸쭉한? 음식보다는 과일, 빵, 면 등이 좋다. 화려한 장식은 되도록 피하고, 단색으로 된 옷이나 소품이 좋다. 나의 취향 또한 누군가를 만족시켜주거나 실망시킬 것이다. 전혀 다른 취향의 사람과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친구가 되고 싶어도 내가 있는 활동범위 안에서 그런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다들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나보다. 어떤 취향을 가졌듯 그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도록 더 애써야겠다. 취향으로 그 사람의 마음까지 판단하는 실수를 버리자. 역시 겸손은 어디에서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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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밑의 욕망
유진 오닐 지음, 이한섭 옮김 / 동인(이성모)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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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오닐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Desire under the elms)을 읽었다. 이 작품은 델버트 만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는데 안소니 퍼킨스와 소피아 로렌이 등장한다. 로렌의 연기도 멋졌지만 작품 자체가 훌륭해서 영화보단 책이 훨씬 재밌게 느껴졌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을때는 그 작품들이 희극 대본이라기보단 그냥 한편의 소설처럼 생각했었는데 요즘에 읽는 작품들은 무대와 배우의 표정을 상상하며 읽게 된다. 오르한 파묵은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양면을 최초로 보여줬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나에겐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훨씬 재밌다.(리어왕을 제외하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읽지 않았던 것처럼 흔한 이름이 되버려서일까?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배울 때는 몰랐는데 이번에 다른 극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점점 희곡에 빠지고 있다. 아서 밀러,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즈, 샘 세퍼드, 마샤 노만, 데이빗 마멧, 캐럴 처칠, 사라 럴, 헤롤드 핀터...위대한 작가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들도 엄청날 텐데, 갑자기 주눅이 든다.

   유진오닐은 미국 극작가이며 <지평선 너머>, <밤으로의 긴 여로>, <얼음장수의 왕림>등의 작품을 썼다. 셋 다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이다. 정리를 해놓아야 되는데...

   <느릅나무>의 주요 등장인물은 5명이다. 배경은 1850년대 뉴잉글랜드 지방에 있는 캐버트의 농가이다. 집 양쪽에는 두 그루의 커다란 느릅나무가 있어 지붕위로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아버지 캐버트, 세 명의 아들 시미언, 피터, 이븐, 캐버트의 세번째 아내 애비가 나온다. 시미언과 피터는 캐버트의 첫째 부인에서 얻은 아들이며 이븐은 둘째 부인 아들이다. 풍요롭고 멋진 농장을 운영하는 캐버트는 76세 노인으로 힘이 세고 거친 농부이다. 두 아내가 죽고 몇년을 혼자 살던 그는 지금 세 번째 아내를 찾으러 잠시 농장을 떠났다. 세 명의 아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농장을 자신들이 물려받길 원하나 그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캐버트가 새 아내를 구해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시미언과 피터는 농장을 포기하고 캘리포니아에 황금을 찾으러 떠난다.

   25살 이븐은 농장에 대한 집념이 무척 강하다. 자신의 어머니가 농장에서 20년간 일을 하다 세상을 떠났기에 그 농장은 곧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끝까지 남아 농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지닌 젊은 청년이다. 또한 창녀 미니를 좋아한다. 비록 그녀가 나이 많고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와 두 형들과 모두 잠자리를 같이 하였지만. 캐버트가 데리고 온 새 부인 애비는 30대의 젊은 여자로 아름답고 유혹적이다. 그녀는 캐버트가 죽으면 농장을 자신이 차지할 생각으로 그와 결혼했다.

    그러나 애비와 이븐은 처음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끌리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감정에 저항하지만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진다. 둘이 사랑에 빠지기 전, 캐버트는 자신이 죽으면 농장은 아무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자신이 가져갈 수 없으니 다 태워버릴 것이라는, 농장에 대한 강한 소유욕을 나타낸다. 애비가 어떻게 하면 자신이 농장을 물려받을 수 있냐고 하자, 아들을 낳아주면 아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한다. 애비는 마침내 캐버트의 아들을 낳게 되는데 사실 이 아들은 이븐의 아들이다. 애비가 아기를 낳은 후 캐버트는 이븐에게 이제 농장은 자신의 아들 것이라며 자랑한다. 그리고 애비가 농장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낳았지만, 자신의 아들이니 물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이븐은 애비가 농장을 차지하려고 자신을 이용했다고 오해하고 형들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나려고 한다. 그런 이븐을 보고 애비가 그것은 우리가 사랑에 빠지기 전이었다며 가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증명으로 아기를 베개로 덮어 죽여버린다. 이 사실을 안 이븐은 경찰관에게 신고를 하고, 애비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븐과 함께 벌을 받기로 결심을 하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경찰과 동행하며 막이 내린다. 마지막 부분에서 <죄와 벌>이 생각난다. 라스꼴리니코프가 죄를 고백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자 그의 뒤를 따르는 소냐처럼..

   <느릅나무>는 농장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사람들을 파멸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소유에 대한 욕심. 죽어서라도 자신의 농장을 가지고 싶어하며, 자신이 가져갈 수 없으면 다 태워버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길 원하는 캐버트. 농장에 대한 그의 집념이 두 아내를 죽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븐과 애비. 두 사람은 농장에 대한 욕심과 육체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점점 사랑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따라서 비극이지만 결국 사랑이 승리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소유욕. 가지면 가질수록 더 커지는 마음. 비우면 비울수록 더 작아지는 마음. 세상에는 갖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최신의 전자제품, 예쁜 옷, 반짝거리는 악세사리, 먹음직한 음식, 멋진 가구와 집, 커피와 홍차 용품, 사랑과 관심, 외모와 몸매, 많은 지식과 책, 문밖을 나가면 온통 광고이다. 정류장, 간판, 전봇대, 광고를 피할 수 없다. 현대인의 ‘농장’ 은 무엇일까? 집? 자식? 외모? 학력? 영원히 농장이 나의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캐버트처럼 자기 자신과 가족을 망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집안을 슬쩍 둘러본다. 꼭 필요한 물건들만 있는지. 나를 잡아끄는 욕망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 이븐 : 저기 별이 하나, 어딘가엔 아버지가 있을 거구, 여긴 내가 있구, 저쪽 길엔 미니가 있어- 같은 밤에 말야. 내가 그 여자한테 키스한들 뭐가 어때? 미니는 오늘밤같이 아름다워. 부드럽구 따뜻하구 두 눈은 별처럼 반짝이지. 입술도 따뜻하구 팔두 따뜻하구 온통 갈아놓은 밭처럼 훈훈하지. 정말 예뻐...나하구 만나기 전에 얼마나 죄를 지었건 누구하구 죄를 지었건 상관없어. 내 죄나 그 죄나 다 마찬가지지.

캐버트 : 물론 가지구 갈 순 없지. 가지구 갈 수만 있다면 가지구 가겠소. 그렇지 못할 바엔 죽는 순간에 농장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버리구 싶어- 이 집이랑 옥수수 알 하나하나, 나무란 나무, 건초의 마지막 잎사귀까지 모두 태워 없애버릴 거야. 그것들이 나하구 같이 죽는 걸 앉아서 지켜봐야지. 아무두 내껄 차지할 순 없어. 아무것도 없는데서 순전히 내 피와 땀으로 일군 건데. 암소들은 다르지. 그것들은 풀어줄 꺼야.

 

# 보안관 : 경찰이다. 문 열어

캐버트 : 너희들 잡으러 왔다. 들어오게 짐. 잠깐 기다리게 짐. 도망 못 가게 잡아놨네.

이븐 : 아까는 내가 거짓말을 했어. 사실은 나두 같이 도왔어. 나두 같이 데려가세요.

애비 : 안돼요.

캐버트 : 둘 다 데려가게. 네놈-제법이다. 그럼 난 가축이나 다시 몰아넣어야겠다. 잘 가라.

이븐 : 안녕히 계세요

애비 : 안녕히 계세요.

보완관 : 자-그만 갈까?

애비 : 기다려요. 사랑해 이븐.

이븐 : 사랑해, 애비. 해가 뜨는 군. 아름답지? (Sun's a-rizin'. Purty, hain't it?)

애비 : 응 정말.

보완관 : 정말 멋진 농장이야. 나두 이런 거나 하나 있었으면

-막-

 

해가 뜬다. 그들은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당당하게 해를 바라본다. 아름답구나. 절망의 상황에서 해를 바라보는 저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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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홍상수 감독, 김태우 외 출연 / 미디어마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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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영화를 다운받았다. 오랜만에 한국 영화 좀 볼까 하는 마음에서. 홍성수 감독의 영화는 몇 편밖에 보지 못했다.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해변의 여인>.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의 영화들은 영화 같지 않다.

   일상의 삶을 너무나 사실적이고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불편함이 든다. 프레임 속 색채는 칙칙하고, 카메라가 들이대는 거리와 사람들은 평범하고 추하다. 가끔 내가 걸었던 길이나, 장소들도 등장하는데 저렇게 예쁘지 않은 곳이었나 싶을 정도이다. 배우들도 전혀 예쁘지 않다. 화사한 조명도 없고, 아름다운 의상도 없다. 본연의 얼굴과 목소리로 승부할 뿐이다. 지금까지 본 영화들에서는 남녀관계가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하였다. 남녀간의 사랑도 낭만적이지 않다. 주인공들은 너무도 유치하고, 현실적인 사랑의 말들을 주고받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사랑을 들먹인다. 영화는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인간 마음속의 이기심과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한국에도 이런 감독이 있다니 좋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김태우(김헌준)와 유지태(이문호)가 학교의 선후배로 나온다. 김태우는 홍상수 영화에서 자주 보이고, 유지태는 처음이다. 잘생기고 멋진 유지태가 이 영화에선 40대의 후줄근한 아저씨로 변해버린다. 이것이 과연 의상만으로 가능한 건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로 유지태는 평범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 사람이 유지태이다 마음속으로 생각을 하고 봐야 했다.

   헌준은 연극영화과이고 문호는 미대생이며 헌준의 애인 성현아(박선화) 역시 그림을 그린다. 헌준은 선화와 사랑을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기보단 그녀의 몸을 원해서이다. 헌준은 선화를 남겨둔 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선화를 짝사랑하던 문호는 이 틈을 타서 선화와 연인이 된다. 시간은 흘러 문호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 대학 강사이며 헌준은 미국에서 잠시 돌아와 문호를 만난다. 술을 먹다 그들은 지금 선화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추억을 떠올리다 선화를 찾아가기로 한다. 부천에 있는 한 호텔에서 바를 경영하고 있는 선화. 그녀를 본 둘은 어떻게 하면 선화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까 궁리한다. 결국 두 명과 차례로 잠자리를 같이 한 선화. 아침이 되어 그 사실을 알게 된 헌준은 그녀가 깨끗하지 못하다며 화를 내고 떠나버리고 문호는 선화에게 아무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한다.

   그들의 뻔뻔함. 조금만 괜찮은 여자가 있으면, 자신이 영화감독이라고, 그림을 그린다며 모델이 되어 줄 수 있냐고 작업을 걸고, 제자와 자고, 옛 애인을 버리면서 선화에겐 깨끗하지 못하다며 비난을 하는 그들의 이중성. 왜 많은 남자들은 사랑하지 않는 여성과도 자고 싶어할까? 남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남자가 더 적극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여성은 감정의 나눔을 통해 교감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성은 몸을 통해 교감을 하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의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육체적 관계가 사랑을 제외하고, 그보다 가벼운 즐거움을 위해 행해진다면 행위가 끝난 후 허전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다시 작업을 되풀이하는 것인가?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카메라로 옮겨놓아 작품을 만드는 홍상수 감독. 재주 참 좋다. 그의 영화가 불편하여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일까? 재미가 없다고? 결코 그렇지 않다. 다만 인공적인 요소가 없어 예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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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노래들 - 현대 미국시와 시론
이일환 지음 / 제이앤씨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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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오는 2월의 아침. 빗소리 좋다. 비가 오는 건 싫은데 빗소리는 참 좋다. 햇살이 반짝일 때 빗소리만 들려오는 날씨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 <상상력의 노래들>(이일환 역, 제이앤 씨.2008) 을 읽었다. 현대미국시들만 모아 놓았다.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면 시가 아닐까? 시인이 모국어로 창조한 시를 다른 언어로 바꾸려고 할 때, 이미 그 시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시는 원문으로 읽어야 하지만 영어 하나만으로도 벅차다. 우리말로 번역된 시를 읽으니 역시 한국시를 읽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책은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시, 2부는 시론, 3부는 영시. 처음 들어본 시인도 무척 많다. 새로운 시들과 시인들을 받아들이다보니 눈이 피곤하다. 시를 쓰는 것은 집 한 채를 만드는 것이다. 주춧돌을 쌓고, 재료를 모은다. 몇 개의 창을 내야 할지, 방은 어떻게 분할해야 할지 생각한다. 뼈대를 올리고, 시멘트를 바르고, 지붕을 얹는다. 장판을 깔고, 벽지 색깔을 맞추고 배수와 조명시설을 확인한다. 이제 집이 다 되었다. 사람들이 집을 구경하려고 전등을 딸깍 켜는 순간 시 한편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젠 확인하고 감탄할 시간이다.

   사람의 일생이 몇 줄 안에 담길 수 있는 것이 시이다. 시는 이 세상을 가장 단순하고도 깊이 표현 할 수 있다. 어려운 시도 많다. 누군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시만이 진정한 시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내가 읽어야 될 시는 손에 꼽아야 될지도 모른다. 시 전체를 통해 어떤 느낌을 받기도 하고, 한 문장에서 기쁨을 얻기도 한다. 나에게 시를 읽는다는 건 휴식이다. 좋은 시는 마음을 즐겁게 한다. 한 줄의 문장이 한 권의 소설보다 좋을 때다 있다. 시를 쓰려고 몇 번 노력했으나 어렵다.

   로버트 프로스트, 에즈라 파운드, T.S 엘리엇, 랭스턴 휴즈, 엘리자베스 비숍, 권돌린 브룩스, 앨런 긴즈버그, 실비아 플래스, 그나마 아는 시인들이다. 나머지는 처음 보는 시인들이다. 시 공부 좀 해야겠다. 2부 시론에서는 12명의 시인이 시에 관하여 쓴 에세이이다. 글들이 얼마나 좋은지, 읽으면서 감탄하였다. 시인들의 문장은 산문에서도 드러난다. 깔끔하고, 명료하며, 정확하게 이야기한다.

   좋은 문장들을 몇 개 적자면 “우리가 시 속에 집어 넣으려는 것은 삶이다”, “글짓기는 그 어느 본질에 있어서도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실질적 힘은 순전히 상상력의 힘이다”, “말하자, 관념들이 아니라 사물들 속에서,라고”, “어느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것”, “그럴듯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예쁘장한 철학적 에세이들을 쓰는 사람들에게 맡겨라”, “시란 정서의 풀어놓음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탈피이고,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탈피이다”, “시에 대한 발견을 하는 최선의 방법은 시를 읽는 것이다.”

욕심이 생길 땐 시를 읽자. 마음이 번잡할 땐 시를 소리내어 읽자. 시 몇 구절을 옮겨보면.

 

*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다,

-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부분. 로버트 프로스트

 

* ‘진짜 두꺼비들이 있는 상상의 정원’을 내놓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시를 갖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당신이 한편으로는

시의 날 재료를 날 것 그대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진정한 것을

찾으려 한다면, 당신은 시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Poetry- 부분. 매리엔 무어

 

* 한번은 오래 된 볼티모어시를

기쁨으로 마음과 머리가 가득찬 채로 차 타고 가는데,

한 볼티모어 사람이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8살이었고 매우 작았는데,

그도 조금도 더 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혀를

쑥 내밀고는, 나에게 말했다, “검둥이”

 

나는 5월부터 12월까지

볼티모어 전부를 다 보았지만,

거기서 일어난 모든 일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Incident-전문. 카운티 컬른

 

* 어느 날 명사들이 거리에 운집했다.

한 형용서가 어두운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그 옆을 걸어갔다.

명사들은 충격을 받고, 움직이고, 변화했다.

그 다음날 동사 하나가 차를 타고 와서는, 문장을 창조하였다.

각 문장은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 - 예를 들어, “형용사가 그 옆을

걸어간 날은 어둡고 비오는 날이었지만, 나는 초록색의 실제의

땅으로부터 소멸하는 날까지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순수하고 향기로운 표정을 기억할 것이다.”

또는, “창문 좀 닫아주시겠어요, 앤드류?”

또는, 예컨대, “고마워요, 창문틀에 있는 분홍색 화분의

꽃들이 요즘 연한 노란색으로 색이 변했어요, 요 가까이에 있는

보일러 공장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에 말이에요.”

 

봄날에 문장들과 명사들이 조용히 풀밭에 누워 있었다.

한 외로운 접속사가 여기저기서 “그리고! 그러나!”라고 외쳐대었다.

그러나 형용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형용사가 문장에서 없어져 버렸듯이

나도 당신의 눈, 귀, 그리고 목구멍에로 없어져 간다 -

당신은 언어의 전멸 때까지도

파멸될 수 없는

단 하나의 키스로 나를 매혹시켰다.

-Permanently- 전문. 케네스 코크

 

*그의 소중한 사람, 그의 아내는 젊고 예쁘다, 그녀의 숄은 장미빛,

핑크빛, 그리고 하얀색이다.

그녀의 슬리퍼는 검정색 에나멜 가죽인데, 미국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녀는 부채를 가지고 다닌다, 정숙한 여인이라 사람들이 너무 자주

자신의 얼굴을 보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은 자기 아내나 연인에 너무 바빠

수염 기른 그 사내의 아내를 쳐다볼지도 의문이다.

-The instruction manual- 부분. 존 애쉬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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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사랑이란
톰 스토파드 / 예니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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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톰 스토파드의 <진짜 사랑인란?>(The real thing) 란 작품을 읽었다. 스토파드는 체코 태생의 영국 극작가로 많은 작품을 쓰고 있는데 이제 한 작품 읽었다. 스토파드는 관객을 위한 ‘매복장치’를 사용하여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 자신의 극작기법 중에서 특히 중요한 일부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작품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진다.

   총 1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2장을 읽다 너무 헷갈려서 맨 뒷장에 있는 해설을 봐야만 했다. 작품은 액자식 구조로 극중에서 또 극중극을 하는 형태이다. 맥스, 샤로테, 헨리, 애니, 빌리, 브로디, 데비가 주인공이다. 헨리는 극작가이고 맥스, 샤로테, 애니는 배우이다. 1장에선 샤로테가 바람을 피우고 집으로 돌아오자 맥스가 그 사실을 깨닫고 샤로테를 비꼰다. 그리고 샤로테는 애인 헨리의 집으로 가버린다. 그런데 2장을 읽다보면 1장은 맥스와 샤로테가 연기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독자는 혼란에 빠진다. 사실 헨리와 애니가 연인인 것이다.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계속 이어진다. 배우들이 대본을 읽으며 연기를 하는 장면과 실제 생활의 장면이 뒤섞여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에 빠진다. 스토파트는 동일한 인물들과 유사한 장면들을 사용함으로써 독자(관객)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작품에서는 언어적 유희가 잘 사용되고 있다. 극작가 헨리의 말은 거침없고, 논리정연하고 예리하다. 헨리의 언어적 철학은 그가 하는 대사들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음악적 요소(음향)도 중요하게 사용된다. 애니는 클래식을 좋아하고 헨리는 팝송을 좋아하는데 그들이 대화하고 논쟁할 때 음악들이 적절하게 흘러나오고 그들의 감정을 표현한다. 무대 위에는 항상 라디오가 있고 장면과 장면을 연결한다. Hermans Hermits의 ‘I'm into something good' , Righteous brothers의 'You've lost that lovin' feeling', Monkees의 ’I‘m a believer', Elvis의 ‘모든 게 엉망진창’, Procul harum의 ‘a whiter shade of pale' 의 팝송이 등장한다.

끝까지 다 읽었지만, 대체 어느 부분이 연극이고 어느 부분이 실제인지 모르겠다. 다시 읽어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다. 문체가 어렵다거나 글이 지루한건 전혀 상관없지만 구성이 복잡한 건 좀 상관이 있다. 이런 작품도 있구나. 다른 작품도 궁금하다. 설마 다 이런 식이진 않겠지. 아직 내가 가야할 길은 멀고 멀구나. 작품을 영화나 연극으로 보면 참 좋겠다. 작품을 번역한 김성희는 말한다. 사랑이란 고통을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자기인식이며, 진짜/가짜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아닌 겉과 속,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일종의 클라인 병과도 같은 공간으로서 여전히 불확실하고 혼돈스럽긴 하나, 끊임없이 새로운 발전을 잉태하는 변화의 과정이라고. 그것이 ‘the real thing'이 담고 있는 메세지라고.

 

 헨리 - 그래, 사실, 난 그렇지 않지. 그게 왜냐고? 그건 내가 우월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 불쌍한 거렁뱅이인, 그자는 거기서, 잘사는 사람의 남아도는 귓밥 부스러기나 주워모으고 있는 거야. 당신 말이 맞아. 난 조금도 개의치 않아. 난 그걸 좋아하지. 그 자신의 무례함으로 인하여 자기의 가난함을 시인하게 되는 그런 방식을 난 즐기지. 난 그자를 좋아해. 그래서, 그게 사실의 전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왜냐하면, 당신은 집에 있는 나한테 돌아올 거고, 말하자면 우린 다른 사람의 존재는 원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 헨리 - 단어라는 건 그런 시시껄렁한 소리와 어울리는 건 아니거든. 그것들은 순수하고, 중립적이고, 정확한 것이어서, 이것을 상징하는가 하면, 저것을 기술하기도 하고, 또한 그 밖의 전혀 별개의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

 

# 헨리 - 설득력 있는 넌센스라는 거야, 말 속에 담긴 궤변이 너무나도 정교해서 그 의미를 파헤칠 만한 실마리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는 뜻이야. 그런 건, 결함은 없지만 옳진 않은 거란다. 정말로 쓸모없는 무익한 거지. 넌, 단어들을 가지고 그런 재주를 부릴 줄 아는 모양인데, 내, 친히 그 단어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어주마. 아, 참, 근데, 모든 “구속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사랑이란 게 사실은, 오히려 사랑, 그 자체로부터도 자유로운 거”라는 건 또 뭐니? 그건, 신선한 충격을 주는 또 다른 일품 명언이로구나. 그렇담, 그 뭐냐, 버티우스터처럼 너도 그 말끝마다 계속 무엇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걸 연쇄적으로 집어넣을 수도 있겠구나. … 그래서 단어들을 DNA의 나선형처럼 계속해서 그 자체들을 반복시켜나가면 되겠지. 가령, “어떤 사랑이 사랑으로부터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울까?” 하면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이란 어떤 사랑이지, 어떤” 이라는 식으로 말이야.

 

# 헨리 - 당신은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난 한꺼번에 하나 이상의 도덕체계를 당해낼 재간이라곤 없는 인간이야.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옳다는 게 내 도덕체계인 거야. 당신이 하면 옳은 거고, 당신이 원하는 건 옳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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