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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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랜만에 김연수님의 소설을 읽었다. 존칭을 생략하고 말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나 (특히 한국작가의 경우) 앞으로 생략하기로 하고. <사랑이라니, 선영아> 책을 처음 접하고, 간결한 문체와 사진 한 장으로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그의 글에 매료되어 그때부터 그의 책과 기사는 꽤 많이 읽어왔다. 어느 글인가 그가 하루키를 매우 존경하고, 또 그를 따라 마라톤을 시작했다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쓴 산문들을 읽다 보면 하루키와 비슷한 느낌이다. 김연수가 태어난 김천은 지인이 살고 있어 한동안 꽤 방문 했었다. 그래서 그가 자랐던 역전 근처와 어렸을 적 부모님이 하셨다는 제과점도 알고 있기 때문에 작가와의 만남 때 얼굴 한번 본 게 전부지만 왠지 그가 친근하게 여겨진다. 김천은 김연수와 더불어 김중혁님, 문태준님까지 배출한 멋진 도시이다. 지금은 김훈님과 같은 동네인 일산에 살고 있다는데. 일산 호수 공원에 가면 그가 뛰고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상은 몇 번이나 놀러가서 주변을 눈여겨 살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쨌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역시 사진 한 장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도 중요한 사진이 등장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읽은 책은 초판 4쇄였는데 1쇄를 발행한지 일주일만이다. 와우~ 정말 멋진걸요.

    제목만 봐서는 도저히 무슨 내용일지 알 길이 없다. 소설의 제목이나 소제목 또한 하루키와 비슷한 느낌이다. 하루키와 김연수를 동시에 너무 좋아해서 괜히 연결 지으려는 나만의 생각일까?

동백꽃이라는 뜻의 카밀라 라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제 1부는 카밀라가 화자. 그녀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입양되어 앤과 에릭 사이에서 자라난다. 엔이 암으로 죽고 난 후 카밀라는 자신의 친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유이치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에릭은 다른 여자를 만나 재혼하려고 하고, 카밀라에게 그동안 엔이 모아두었던 카밀라의 짐들을 보낸다. 유이치는 카밀라에게 하루에 하나씩 박스에서 나오는 물건들에 대해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보라고 권유하고 카밀라는 그렇게 한다. 유이치는 카밀라의 글을 모아 책을 내주고, 카밀라는 열일곱살 때 자신을 낳은 진짜 엄마를 만나기 위해 유이치와 한국으로 온다. 그녀의 어머니가 태어났던 진남으로.

    여기까지 읽었을 때 아, 앞으로 엄마가 누구인지 찾아나가는 과정이 그려지겠군. 대충 읽으면서 엄마가 누군지나 보자 싶었다. 곧 엄마의 이름은 정지은이며 카밀라의 아빠는 지은이의 오빠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들어나고 그녀가 카밀라를 입양시킨후 일 년 후 자살했다는 사실이 거듭 밝혀진다. 뭐? 세상에, 그래서 죽었구나. 근데 남매가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근친상간에 관한 소설이었단 말인가? 호기심에 좀 더 읽어나가는데 어라 새로운 등장인물 최성식 선생님이 등장한다.

   이것이 제 2부로 이때부터 화자는 정지은이 되어 지은이가 카밀라를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기술한다. 독자는 얼른 정신차리고 새로운 시점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니 그렇다면 카밀라의 아빠가 사실은 최 선생님이었단 말인가? 속속들이 들어나는 편지와 증거, 증인들로 인해 암묵적으로 최선생이라고 믿고 마음속으로 그를 비난하는 순간 이건 또 뭐야, 새로운 인물들 또 등장이요. 제 3부는 우리이다. 지은이의 고등학교 친구들의 이야기와 삶이 펼쳐지면서 지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원인 중의 하나가 친구들의 따돌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인물 희재가 등장한다. 제 4부는 희재의 관점으로 쓰여진 장이다. 희재가 지은이를 만나게 된 경위, 그들이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고 가까워지게 된 계기, 그리고 글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카밀라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이런 반전의 반전이 있을 줄이야.

    다 읽고 나니 궁금하다. 지은이는 왜 자살했을까? 학교의 방해로 아이를 억지로 입양시켜야 했기 때문일까? 친구들의 터무니없는 소문과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서였을까? 희재가 그녀를 사랑한 후 떠났기 때문일까? 지은이의 오빠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카밀라는 어디서 살게 될까? 누구와 결혼을 할까? 유이치는 어떻게 생겼을까? 아 궁금해라..

   누구라도 책을 손에 잡는다면 카밀라처럼 진실을 알고 싶어 마지막 페이지까지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적어놓았다. 이 글을 보니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갑자기 불안해진다.

 

# 숲

눈동자 속에 숲으로 가는 길이 있다 너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는 새벽이 있다

 

서늘한 달이 자신을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서

모든 신부는 시작되고 그리고 다만 하나의 숲

 

숲 속으로 들어가 너는 나올 줄을 모른다 하늘은

푸르게 바뀌고 공기는 점점 더 투명해지는데 너는

 

너의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검은 머리칼처럼 나뭇잎, 숲 속을 가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너의 비밀은

나를 바라보고 불빛처럼 반작이는 너의 눈동자

 

눈동자 속에 숲으로 가는 길이 있다 너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는 새벽이 있다

 

# “나 역시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어느 날 자다가 깨어서 뭔가를 쓰기 전까지는 말이야. 시인이든 작가든 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뭔가 쓰는 순간, 되는 거지. 처음 본 순간부터 넌 작가라고 생각했어.”

유이치의 말은 늘 그렇게 흥미로웠다.

“왜?”

“첫번째,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해. 고독을 즐기지. 그러니까 레드우드의 에너지에 끌려서 거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면적이고 달의 영향권 안에 있어. 두번째, 그래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장 강한 사람들과도 투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 세번째, 무엇보다도 네게는 쓸 이야기가 너무나 많아.”

 

#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노트의 세 장을 글자로 채우는 일, 그것도 유이치에게 배운 일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쓰는 거야”라고 그는 말했다.....오로지 막막할 뿐이라면 그 막막함에 대해 쓰라고 유이치는 말했다.

 

# 어느 틈엔가 나는 너를 위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를 증오하는 사람이 됐지. 그게 내게는 가장 고통스러웠어. 하지만 지금은 증오는 물론, 그런 고통마저도 다 지나간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야. 지나가면, 우리는 조금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 조금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겠지.

 

# “희재라고요?”

“예. 희재입니다. 왜 그러신가요?”

“왜냐하면, 제 이름도 희재거든요.”

그가 너를 바라본다. 너도 그를 바라본다. 벌써 오래전부터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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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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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님의 산문은 완벽하다. <남한산성> 같은 소설도 좋긴 하지만 그의 최고의 글들은 산문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전거 여행>은 아무데나 펴고 읽어도 감탄이 나온다. 이렇게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글을 쓸 수 있다니. 이 책을 처음 읽고 언젠가 필사를 한다면 이 책은 꼭 포함시켜야지 하고 생각했다. 아직 실행은 못했지만. 조세희님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간단명료하고 정확한 표현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닮은 느낌이다. 우리것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측면에서 비슷한 책을 찾아보자면 최순우님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가 떠오른다.

이 책은 그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며 느꼈던 바를 적은 글인데, 왜 똑같이 자전거를 타고 같은 풍경을 보면서 나는 저런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던가 화도 난다. 그는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갔던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곱씹고 생각한다. 나도 그와 같은 담백한 문체를 닮고 싶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다.

 

# 염전은 갯가의 평야다. 바깥은 바다쪽으로 펼쳐지고 안쪽은 야산에 기댄 마을에 닿는다. 염전은 폭양에 바래지며 해풍에 쓸리운다. 염전의 생산방식은 기다림과 졸여짐이다.

 

# 된장의 친화력은 크고도 깊다. 된장의 친화력은 이중적이다. 된장은 국 속의 다른 재료들과도 잘 사귀고, 그 사귐의 결과 인간의 안쪽으로 스민다. 이 친화의 기능은 비논리적이고 원형질적이어서 분석되지 않는다.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치정 관계이다.....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 국물이란 흔치 않다. 냉이 건더기를 건져서 씹어보면, 그 뿌리에는 봄 땅의 부풀어오르는 힘과 흙 냄새를 빨아드리던 가는 실뿌리의 강인함이 여전히 살아있고 그 이파리에는 봄의 햇살과 더불어 놀던 어린 엽록소의 기쁨이 살아있다.

 

# 미나리에는 그늘이 없다.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미나리의 맛은,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시간의 맛이다.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서과 잘 어울린다.

 

# 공깃돌만한 콩털게와 바늘 끝만 한 작은 새우들도 가슴에 갑옷을 입고 있다. 그 애처로운 갑옷은 아무런 적의나 방어의지도 없이, 다만 본능의 머나먼 흔적처럼 보인다.

 

# 갈대는 빈약한 풀이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늙음을 간직한다.

 

# 5월의 산에서 가장 자지러지게 기뻐하는 숲은 자작나무 숲이다. 하얀 나뭇가지에서 파스텔톤의 연두색 새잎들이 돗아날 때 온 산에 푸른 축복이 넘친다. 자작나무숲은 생명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늘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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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얀 마텔 지음, 황보석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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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길거리 좌판대에서였다. 무슨 행사가 있어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는데 한 코너에 책이 잔뜩 쌓여 있는 걸 발견했다. 회원가입을 하고 만원만 내면 책 세권을 골라 갈 수 있다는 말에 얼른 싸인을 하고 책을 고르기 시작했는데 그때 발견한 책이 <파이 이야기>이다. 얀 마텔. 뭐 이런 이름이 다 있어? 처음 보는 작가라 망설여졌는데 파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그려진 표지가 아름다워 결국 집으로 가져왔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든 생각은 대체 이렇게 재밌는 책이 ‘세 권에 만원’ 인 도서에 포함된 것이었을까? 였다. 너무 재밌기 때문에 작품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렇게 재밌고 놀라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이 작가는 대체 몇 살인가? <파이 이야기>를 썼을 당시 그는 38살쯤이었다. 그는 1963년 스페인에서 캐나다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지역에서 살았으며 그때의 경험들이 소설을 쓰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최근 영화로도 나왔는데 역시 원작을 따라가기엔...

    1993년 첫 소설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로 데뷔하였는데(겨우 서른 살이었다) 이 소설 또한 좋다. <파이 이야기>만큼 탄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때 이미 그의 문체는 남들과 다른 독특함을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에 나의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폴이 죽어버리기 때문에 <파이 이야기>만큼 사랑할 수는 없는 소설이지만.

    그리고 1996년에 발표한 <셀프>. 황보석 님이 번역하였다. 이분은 폴 오스터의 소설들 대부분을 번역하신 분인데 이 책도 번역했구나. 와우. 얀 마텔의 작품이기에 아무 배경 지식 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야한? 장면이 많아 얼떨떨했다. 내가 알던 얀 마텔이 맞는 것인가? 내용은 간단하다. 주인공은 서른살까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남자였던 그가 어느 순간 여자로 바뀐다는 것이다. 뭐?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마텔은 썼다. 주인공을 통해 독자들은 남성의 시각과 여성의 시각을 둘 다 가질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주인공의 성이 바뀌는 것은 너무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인공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지 않냐는 듯이. 그래서 나 또한 뭐 그럴수도 있겠지라며 할 수 없이 주인공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이 바뀐 후 티토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티토가 모임으로 일주일간 집을 비운 사이 이웃집 남자가 주인공을 성폭행한다. 그녀는 충격에 빠지고, 고통스러운 며칠을 보낸 후 그녀의 몸은 다시 남성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원하지 않지만 그가 되어야 하고 그럼으로 티토를 떠나야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극적일 수가. 주인공의 절망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나는 그에게 어떤 위로도 해 줄 수 없다.

    소설에서 성은 핵심이다. 성행위, 강간, 수음, 동성애, 계간 등등. 이것이 과연 진정한 문학 소설인지 독자들이 고민할 수도 있겠다. 문득 하니프 쿠레이시의 <시골뜨기 부처>가 떠오른다. 성과 연관 지어 보자면 둘이 죽이 잘 맞을 수도 있겠군. 마텔은 책에서 인간의 본성과 본능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마텔의 성장과정과 비슷한 면이 많아 그의 사생활이 더욱 궁금해진다. 그의 이러한 자유롭고 거침없는 글쓰기가 놀랍고 부럽다. 용감하군요 당신은 진정.

 

# 나는 세탁물이 면죄를 받는 모든 과정, 불결함에서 구원에 이르기까지 거치는 모든 단계, 현대 미술관에 일렬로 전시된 모든 그림들을 따라갔다......세탁물이 마치 지옥으로 끌려들어가는 그렇게도 많은 사악한 영혼들처럼 기계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물은 더 차오르기를 그만두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작동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에는 숭고한 미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설교를 듣고 있는 세탁물들의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작에서 복음주의자의 기쁨을 느꼈다.....그러면 나는 소리쳐 어머니를 불렀고 그 다음에는 셔츠, 스커트, 블라우스, 속옷, 바지, 양말, 등속과 함께 나까지도 죄를 면제받고 셋째 날에 승천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희미하게 반짝이는 생명력으로 촉촉이 젖어 그 갱생 기계에서 빠져나왔다.

 

# 종이 여자들에 대한 그 변덕스러운 갈망-나는 많은 여자를 원한다! 나는 아무 여자도 원치 않는다-에서 나는 어쩌면 내 식사가 정말로 빈약하다는 것, 그 식사가 내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잇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통고라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그 즐거움이 너무도 컸다.

 

# 서너 달 위에 나는 첫 월경을 했다. 내가 월경 주기에 대해 품고 있던 고상한 견해는 고열과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밤잠을 설친 뒤-나는 감기가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피로 물든 시트에서 잠을 깬 날 아침에 현저히 흐려졌다.

 

# 사실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할 때면 오래 끌기를 좋아했다. 키스할 곳이 너무도 많았다. 오른쪽, 왼쪽, 위, 아래 그리고 한가운데. 평평하고 매끄러운 앞니. 둥글고 뾰족한 위쪽 송곳니. 단단한 앞어금니.

 

# 나는 사람들이 왜 그것을 강간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내게 그것은 살인이었다. 나는 그날 살해되었고 그후로 언제까지고 내 안에 죽음을, 다채로운 내면에서 배회하는 회색을 끌고 돌아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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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세익스피어 - 희극 : 사랑의 헛수고
BBC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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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k Thornton Burnett의 글을 바탕으로 *

 

   브래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하여 셰익스피어 코미디를 해석하였다.『사랑의 헛수고』는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잊기 쉬운 초기희극이라는 낮은 평가와 푸대접을 받아왔으나 우수한 연극 공연을 통해 그 진가가 더욱 드러나고 있다. 브래너도 왕립셰익스피어 극단(Royal shakespeare company)의 『사랑의 헛수고』공연에서 나바레 왕 역으로 출현한 후에, 이 작품에 적절한 시공간적 배경 설정이 이루어질 때 뛰어난 극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간파하고 영화화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감각으로, 브래너의 『사랑의 헛수고』는 최근의 텔레비전과 영화적 유행에 강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헛수고>는 텔레비전 시리즈와 더 흔히 연관되어 향수를 자아낸다. 더욱이 연예인들의 출현, 예를 들면 알리아 실버스톤(Alicia silverstone : 프랑스 공주라는 이미지보다 베트걸, 1997년 베트멘과 로빈이라는 이미지가 더 빨리 떠오른다)이 도움이 된다.『사랑의 헛수고』는 연극과 뮤지컬의 결합이며 셰익스피어의 낭만희극의 특징을 두루 지님으로써 극 전체에 걸쳐 고양된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브래너는 말했다. “우리는 초창기에 셰익스피어 영화를 만드는 방법으로부터 벗어나서....지금은 전에 그들이 시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야기가 표현의 자유가 있다.” 확실히 헛수고는 브래너의 가장 대담한 시도로 여겨진다. 브래너의 『헛수고』처럼 이런 필름들은 “10대 영화”의 부활을 위한 것이고 더 어린 관객들을 위한 잠재적 전환이다.

   헛수고의 배경은 1930년대 말이며, 적대감의 폭발이 일어나기 전인 순수하고 평온한 시대를 묘사한다. 그리고 원작의 운문대사에 그와 유사한 내용과 분위기의 20세기 뮤지컬 노랫말을 접목시켜 현대화시킨 배경에서의 낭만적 구애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주인공의 여덟 남녀들은 개성 있는 캐릭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음부를 담당한 악기처럼 존재한다. 예컨대, 4막 3장에서 비로운(Branagh)이 동료들에게 사랑이 학문보다 강함을 역설할 때 그들 모두가 “천국, 천국에 와 있네”(Heaven, I'm in heaven)라는 후렴을 시작으로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뮤지컬 곡 “뺨을 맞대고 춤을”(Dancing cheek to cheek)을 합창한다. 이 장면에서 네 명의 남자가 실제로 공중(천국)으로 높이 떠올랐다가 내려와서 각자의 파트너와 짝지어 가상적인 춤을 추는 광경은 고양된 낭만적 분위기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주연급 남녀들뿐만 아니라, 조연급인 돈 아마도(Timothy Spall)와 자퀴네타(Stefania Rocca), 그리고 나다니엘(Richard Briers)과 홀로퍼니아(Geraldine McEwan) 간의 애정까지 뮤지컬 장르를 통해 표현하여 낭만적 분위기를 확신시킨다.

   브래너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셰익스피어의 운문에 곡을 붙여 뮤지컬로 만드는 대신, 그의 노래 대부분을 잘라내고 2차 세계대전 전후의 할리우드 뮤지컬에 나오는 곡들인 콜 포터(Cole porter)나 조지 거쉰(George Gershwin)이 작곡한 30~40년대의 뮤지컬 곡들을 넣었다. 이때 사용된 음악들은 미국인이라면 매우 익숙하였을 재즈 음악들을 비롯한, 귀에 익은 멜로디 라인을 가진 곡들이다. 딱딱하고 어려운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음악의 가사로 쉽게 흘려들음으로써 극중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90년대 중반 MTV 시대를 지나고 이미 대중음악산업의 발전기를 겪은 미국인들에게는 환영받을 수 있는 전략이었다.

   프랑스 왕의 죽음 때문에 귀국하는 여성들을 전송 나온 나바레 남성들이 합창하는 거쉰의 “내게서 그걸 빼앗아갈 순 없지”(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me)도 현실이 낭만을 없애버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장면은 『카사블랑카』의 마지막 이별장면-공항에서 비행기에 탄 연인을 전송하는 장면-과 흡사하게 연출함으로써 비극적 현실을 상쇄시키기 위한 낭만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또한 험프리 보카트-잉그리드 버그만-폴 헨레이드의 3명이 남자들과 여자들의 8중주로 바뀌는 기능을 한다. 이 장면은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고전으로 자리한 작품을 연상시켜 관객의 향수를 자극시킨다.

   하지만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낭만적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와 병행해서 뉴스릴을 통해 전쟁이 임박한 암울하고 위태로운 현실을 시종일관 비추어준다. 브래너는 이 전쟁 현실을 흑백장면으로 처리함으로써 총천연색으로 펼쳐지는 낭만적 에피소드와의 색채 대비를 통해 낭만과 현실의 대립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러한 환경에서, 나바레(Alessandro Nivola)의 왕의 “가입”의 요구는 국가적 충성을 위한 요구처럼 들린다. 낭만이 현실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프랑스왕의 죽음에 덧붙여 2차 세계대전이라는 20세기 최대의 비극적 현실을 불러들이고 그 구체적 참상을 보여준다. 원작에서는 결혼이 죽음 때문에 1년 동안 보류되는 것으로 끝나는데 비해, 영화에서는 6년 동안의 극심한 현실적 고통을 겪는 단련 과정을 거치게 한다. 그동안 비로운은 야전병원에서 죽어가는 부상자들을 간호하며, 나바레왕은 몸소 전선에 나와 병사들을 독려하고, 롱거빌(Matthew Lillard)과 듀메인(Adrian Lester)은 전투기 조종사로서 목숨을 건 활약을 펼친다. 프랑스 공주와 캐서린(Emily Mortimer). 마리아(Carmen Ejogo)는 감옥에 끌려가며, 로잘린(Natascha McElhone)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약한다. 심지어는 희극적 기인인 돈 아마도도 진지하게 변모하여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조신한 가정주부가 된 자퀴네타와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면회를 받는 애틋한 모습을 보인다.

   브래너는 등장인물들이 겪는 극진한 현실적 시련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의 낭만적 목표를 달성시키는 해피엔딩을 부여함으로써 낭만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그들이 6년간의 고행을 거치는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사랑의 유희에 탐닉하던 종전의 구애행태와 다른 진정한 사랑을 획득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의 화면이 2차 대전의 참상을 보여주던 흑백 뉴스릴에서 다시 총천연색으로 돌아옴은 비극에서 희극으로의 반전을 시각적 대비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낭만의 회복을 시사한다.

 『사랑의 헛수고』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암시- 서류, 글자, 연기, 정신적 생산-로 가득 차 있다.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뺨을 맞대고 춤을”(Dancing cheek to cheek)을 부르며 남자 주인공들이 도서관 천정으로 올라가는 장면은, 글로브 극장처럼 작은 반구로 되어 있고, 이것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장의 천장을 상기시킨다. 반구형의 천장은 점성술과 철학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브래너는『사랑의 헛수고』를 자전적 요소를 통하여 소개할 수 있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수의 배우들의 노래와 춤 실력이 아마추어급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브래너는 아마추어들이 노래와 춤을 통해 더욱 진솔한 애정 표현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브래너는 21세기의 영화적 매체에 의해 그것들을 모방함으로 할리우드 뮤지컬의 기술과 전문지식을 완성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브래너가 비인기작인 『사랑의 헛수고』를 뮤지컬 영화로 과감하게 시도한 이유는 흥행성패 여부에 상관없이 저평가된 원작의 뛰어난 작품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브래너는 셰익스피어의 대중 보급자라고 불릴 만큼 셰익스피어의 대중화를 표방하는 감독이지만 단순하게 흥행 성공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대중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의 진수를 즐기도록 전파하기 위한 대중성을 추구할 뿐 흥행성공을 위해 예술성을 희생시키는 경우는 없다. 결과로서 그가 영화의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그동안 저평가되어온 『사랑의 헛수고』의 진가를 드러낼 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이 초기작을 더 발전시킨 공연물 중 하나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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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2disc)
케네스 브래너 감독, 데렉 자코비 외 출연 / 워너비엔터테인먼트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 Mark Thornton Burnett의 글을 바탕으로 *

     

 

   브래너의『햄릿』은 19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햄릿』은 정말로 브래너가 마침내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영화감독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더 이상 영국자본회사나 안정된 연기자만 고집하지 않았고 “브래너의 햄릿”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햄릿』은 브래너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브래너가 감독, 주연을 맡고 데릭 자코비(Derek Jacobi), 줄리 크리스트(Julie Christie), 케이트 윈슬렛(Kate Winslet)이 각각 클로디어스, 거트루드, 오필리아로 출연하는 영화 『햄릿』은 셰익스피어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말해지는 1990년대 셰익스피어 영화 열풍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우선 제작사부터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 캐슬 락(Castle rock)이다. 또한 브래너는 셰익스피어 극에서 노련한 많은 베테랑들의 도움을 구했다. 클라디어스를 연기한 데릭 자코비는 1979년에「올드 빅 극장」에서 햄릿을 연기했고, 1980년 BBC버전에서도 역할을 맡았다. 만약 자코비가 브라나의 영화적 아버지라면 브래너는 자코비의 연극적 아들이다. 할리우드가 자랑하는 희극배우 빌리 크리스털(Billy crystal)과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과 각각 무덤 파는 일꾼과 오즈 릭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대배우 찰턴 헤스톤(Charlton Heston)이 왕을 연기하는 배우로 등장하고, 프랑스의 제럴드 드빠르디유(Gerald depardieu)가 레이날도로 등장한다. 쥬디 덴치(Judi Dench)가 헤큐바로 잠시 스쳐가는 등 여타 유명 배우들의 카메오 출연 또한 그 재미를 더한다.    

   게다가 영화 초반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의 결혼식 장면은 그 규모나 인원 면에서 한편의 장관을 이루고, 선왕 햄릿의 혼령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불꽃과 연기가 솟구치는 특수효과로 마치 공포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또한 영국으로 향하며 복수를 다지는 햄릿 뒤로 펼쳐진 눈 덮인 평원, 그 위로 밀려오는 포틴브라스 군대를 보여주는 장엄한 컴퓨터 그래픽 효과, 마지막 검술시합 장면의 박진감 넘치는 진행 또한 대중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만약 당신이 햄릿은 우울한 성, 음침한 옷과 구식 헤어스타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라 (commemorative programme 4) 이 말처럼 올리비에의 영화 『햄릿』(1948)이 어두침침하고 흑백영화라면 브래너의 햄릿은 컬러이고, 비극을 극적으로 보며준다. 올리비에의 『햄릿』에는 포틴브라스, 볼티만드, 로젠크란쯔와 길덴스턴, 레이날도 등 몇몇 등장인물과 레어티즈의 폭동 등이 삭제되어 있지만 브래너의 『햄릿』은 원작의 모든 대사를 전혀 삭제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의 전체 내용과 의미를 빠짐없이 전달한다. 따라서 햄릿의 다양하고 복잡 미묘한 성격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며 다른 인물들의 양면적 성격을 돕는다. 햄릿은 호화로운 외양, 흩날리는 눈, 엘시뇨어(Elsinore) 성의 겨울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햄릿』은 전례 없는 프로젝트이며 브래너의 축적된 영화적 명성이 셰익스피어에 다가갈 수 있도록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세 번째 셰익스피어 영화이기도 하다.

    아마 브래너의 『햄릿』에서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상처받은 마음의 다양한 크기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햄릿은 오프닝 실에서 어두움에 숨어 슬퍼하는 아들의 역할로부터 뒤로 갈수록 미친척하고 극적으로 다이내믹한 존재를 흉내 내며 폭발하기 쉬운 행동의 남자로 옮겨간다. 햄릿은 군국주의 국가로서의 덴마크를 묘사한다. 이미 오프닝 신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펜싱을 연습하는 장면은 앞으로의 참사를 예고한다. 햄릿은 덴마크의 힘이 군사들의 협력에 의지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예를 들면, 로렌크란츠(Timorthy Spall)와 길던스턴(Reece Dinsdale)이 연대복 띠를 두르고 있다던가, 자고 있는 오필리어 방에 군사들이 침입하는 장면이나 무덤 파는 사람이 해골을 계급에 따라 신중하게 나란히 배열해놓는 장면 등에서 잘 나타난다.

    브래너는 또한 현대 제작에서 종종 누락시키는 포틴브라스의 서브플랫을 발전시킨다. 엘시노어 성에서 중첩되는 언쟁들 사이사이에 포틴브라스 군대의 끈질긴 진군을 보여준다. 루퍼스 스웰(포틴브라스)는 차가운 확고함으로 노르웨이의 지휘관을 연기하며 침입을 강조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궁의 문을 순찰하는 보초의 긴장감도 정당함을 더해가며, 특히 영화의 마지막에서 햄릿과 레어티즈의 검술시합 장면과 포티브라스 군이 궁정을 에워싸며 좁혀오는 장면을 계속시켜 영화 전체에 긴장감을 더한다. 햄릿과 포틴브라스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지만 이들의 행동과 사건이 나란히 진행됨으로써 영화에 재미를 더한다. 조엘 파인맨의 형제 살인죄와 간음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햄릿』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

   또한 『햄릿』에서 창문과 문이 거울로 장식된 방의 인테리어는 잘 사용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세팅에서, 햄릿은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볼 수 있다. 올리비에의 햄릿이 엘시뇨어 성벽 꼭대기에 앉아 생각할 때 보이스 오버로 처리되는 반면, 브래너의 햄릿은 거울을 보며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독백을 내뱉으며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 또한 햄릿이 클라우디우와 폴로니우스가 그 뒤에 숨어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오필리어를 벽의 거울로 밀칠 때 거울 세팅은 훌륭하게 사용된다. 브래너는 그 세트가 “헛된 세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 있고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숨겨진 부패”를 의도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대담하고 비평적인 현대의 시각이고 원문의 상당한 지탱을 돕는 역할을 한다.

   브래너의 『햄릿』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오필리어에 대한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묘사이다. 그전까지 오필리어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하고, 수줍은 모습이었다면 여기서 오필리어는 생동감 있고 활기차며 당당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러 남성으로부터 위협과 조종을 당하고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받는다. 햄릿의 오필리어에 대한 태도 변화는 이 영화가 플래시백 베드신 장면을 통해 자주 보여주듯이 두 남녀가 이미 육체적 관계를 맺었기에 그녀에게 더욱 충격적이다. 미친 후에 그녀는 구속 복을 입고 다니면 독방감옥에 갇혀서 남자간수로부터 가혹한 물세례 처벌까지 받는다. 이처럼 처음 윈슬렛의 생명력 넘치던 모습에서 비참한 모습이 강조되어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고통 받는 한 여성의 비극적 상황과 파멸이 실감나게 묘사된다.     

    폴로니우스(Richard Briers)가 매춘부와 관계 후 옷을 입으며 레이날드에게 자기 아들을 감시 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의 다음 장면은 흥미롭다. 햄릿의 광증을 목격한 오필리어가 햄릿이 “상의의 끈을 모두 풀고” 라고 묘사하며 아버지의 침대에서 흐느끼는 장면은 그녀의 아버지가 자주 사창가에서 매춘부에게 그러듯이 오필리어가 햄릿에 의해 성적으로 범해졌음을 암시한다. 매춘을 일삼는 폴로니우스가 자신의 딸의 순결과 정조에 그토록 큰 관심을 보이는 아이러니는 현대의 많은 남성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물의 이미지도 중요하게 사용된다. 클라우디우스와 레이터스(Michael Maloney)가 햄릿의 몰락을 의논하며 테이블에 앉아 브랜디를 벌컥 벌컥 마시는 장면이 있는데 그들의 음모적 마심은 즉시 거트루드가 방으로 들어와 오필리어의 익사를 묘사함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물"의 암시는 영화에서 시각적 자극제로 사용되며, 여성의 순결은 가부장적인 위선의 자비임을 보여준다.
   영화의 중요한 장면마다 시각적 메시지와 대사의 관계가 오버랩 되기도 한다. 특히 교회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지만 화려하게 장식된 인테리어는 주인공들의 자백을 폭로하는 도발적인 장소로서 제공된다. 영화 시작부분에서 폴로니우스는 오필리어를 속죄소로 데리고 가서 햄릿에 대해 이야기 한다. 속죄소의 더 불안한 사용은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범죄로 인해 애통해할 때 나타나다. 클라우디우스에게 빛이 비춰지고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있을 때 어둠속에 있던 햄릿은 그의 칼을 창살 안으로 집어넣는다.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의 사용은 유령이 나오는 장면에서 더 정교하게 사용된다. 브라이언 블레스드(brian blessed)에 의해 연기된 높은 앵글 샷에서, 유령은 엄청나게 공격적인 유령으로 묘사된다. 유령이 햄릿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할 때, 불꽃이 튀고 숲 바닥이 갈라지고 나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지옥으로부터의 폭발”이며 초자연적인 방문이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비슷하게 유령이 거트루드의 방에 나타날 때, 기이한 음악이 들리는데 이것은 유령이 지옥으로부터 왔음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또한 종종 반복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심리적인 연관을 나타낸다. 클라우디우스와 폴로니우스가 햄릿에 대한 음모를 얘기할 때 햄릿이 그녀의 방에서 어머니를 마주할 때처럼 카메라는 그들 주위를 돈다. 햄릿의 마지막 펜싱 대결 장면과 오필리어의 장례식에 참석한 소수의 인원은 클라우디우스의 기울어가는 힘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거트루드의 마지막 신랄한 표현이 나타내듯 포틴브라스의 화려한 마지막 등장 전에 군주적 권위는 흔들린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들때, 포틴브라스 군대는 궁의 창문과 거울 문을 깨고 침입하는데 이것은 궁정이 깨지기 쉬운 환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영화 초반 결혼식 장면에서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과 마지막 검술시합 장면의 텅 빈 궁정의 대조를 통해 시각적으로 부각되는 이 왕실의 몰락은 전환기적 역사의 여러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버지 폴로니어스의 죽음을 복수하겠다고 공격해 온 레어티즈를 따르는 군중들의 모습은 시민의 성장으로 흔들리는 왕족과 귀족의 권위를 보여주는가 하면, 선왕 햄릿의 동상을 쓰러뜨리는 마지막 장면은 구 러시아로 대표되는 공산체제의 몰락을 상기시킨다. 햄릿은 군사적 장례로 치러지며 포틴브라스가 그 나라의 계승자로 됨을 알려준다.

   그러나 브래너의 『햄릿』은 단순히 군사적 기술과 정치적 우위 사이로 양분되는 것 이상을 담고 있다. 많은 면에서 『햄릿』은 『헛소동』의 선례로서 그의 다른 텍스트와 역사의 연관성을 생각한다.. 햄릿의 또 다른 독창성은 묘사의 표면에 나타난 주제이다. 햄릿에서 연극하는 장면은 adrian noble의 1996년 작품 『한여름 밤의 꿈』에서 가져온 것이다. 영화의 상호텍스트성은 캐스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웅장한 부분은 블렌하임(Blenheim) 궁전(엘시노어로 가장한)의 수많은 외부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블렌하임 궁은 1704년 프랑스를 물리친 말보로 공작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으로, 1874년에는 윈스턴 처칠이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 후손들이 지금껏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배경 자체만도 영국과 프랑스간의 갈등, 영국과 독일간의 갈등, 영국 왕족과 보다 강력한 정치권력 사이의 갈등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이에 반해 올리비에의『햄릿』은 상영시간을 152분으로 줄였기 때문에 상영시간이 4시간이 넘는 브래너의 『햄릿』과 비교하여 원작을 훼손시켰다는 비난을 받는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선왕의 죽음에다 외세의 위협에 놓인 덴마크가 그 배경으로서 중요한 것은 안과 밖 모두 크게 잘못되어 있는 위기의 덴마크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외세의 위협을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해 자신의 통치권을 확고히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위기의 상황을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아닌 외교를 통해 헤쳐나가는 클로디어스의 마키아벨리적 절대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리비에의 『햄릿』에는 포틴브라스가 없고 따라서 클로디어스는 형을 죽이고 형수를 아내로 취한 천하의 악인 외에는 다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 대신 올리비에는 인물의 성격과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두면서 거기서 비극의 원인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햄릿』영화를 만들기 전에 브래너는 『햄릿 만들기』(1995년)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하였다. 줄거리는 한 극단이 『햄릿』을 연습하고 마침내 영국 시골의 버려진 교회에서 『햄릿』을 공연하는 내용이다. 이 상상의 시나리오를 통하여 브래너는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햄릿』의 적절성과 가능성에 대해 불안을 나타낸다. 브래너는 예술성과 대중화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브래너 덕분에 셰익스피어는 좁은 선택의 범위를 뛰어넘어 작품 할 수 있는 인물로서 회복되었고, 영화는 그것을 진행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최근에 셰익스피어는 영화, 텔레비전, 뮤지컬 등의 혼합물로 나타나고 있고 브래너의 다양한 사고방식에 의해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브래너는 셰익스피어를 그 자신의 방식의 이미지로 만들었고 대중매체의 우상으로 셰익스피어의 출현을 주도해왔다. 브래너의 『햄릿』은 이처럼 작품성과 대중성의 절묘한 조화를 보임으로써 향후 할리우드 셰익스피어 영화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구체적 지침을 제공한다. 브래너는 지속적으로 현대의 요구에 맞추어 셰익스피어를 수정시키고 있는데 최근 몇 년간은 감독과 배우로서 셰익스피어와 관련되지 않은 영화에 참여하고 있다. 『비행의 이론』(1998) 『와일드 웨스트』(1999) 『엘도라도』(2000)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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