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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얀 마텔 지음, 황보석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길거리 좌판대에서였다. 무슨 행사가 있어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는데 한 코너에 책이 잔뜩 쌓여 있는 걸 발견했다. 회원가입을 하고 만원만 내면 책 세권을 골라 갈 수 있다는 말에 얼른 싸인을 하고 책을 고르기 시작했는데 그때 발견한 책이 <파이 이야기>이다. 얀 마텔. 뭐 이런 이름이 다 있어? 처음 보는 작가라 망설여졌는데 파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그려진 표지가 아름다워 결국 집으로 가져왔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든 생각은 대체 이렇게 재밌는 책이 ‘세 권에 만원’ 인 도서에 포함된 것이었을까? 였다. 너무 재밌기 때문에 작품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렇게 재밌고 놀라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이 작가는 대체 몇 살인가? <파이 이야기>를 썼을 당시 그는 38살쯤이었다. 그는 1963년 스페인에서 캐나다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지역에서 살았으며 그때의 경험들이 소설을 쓰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최근 영화로도 나왔는데 역시 원작을 따라가기엔...
1993년 첫 소설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로 데뷔하였는데(겨우 서른 살이었다) 이 소설 또한 좋다. <파이 이야기>만큼 탄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때 이미 그의 문체는 남들과 다른 독특함을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에 나의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폴이 죽어버리기 때문에 <파이 이야기>만큼 사랑할 수는 없는 소설이지만.
그리고 1996년에 발표한 <셀프>. 황보석 님이 번역하였다. 이분은 폴 오스터의 소설들 대부분을 번역하신 분인데 이 책도 번역했구나. 와우. 얀 마텔의 작품이기에 아무 배경 지식 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야한? 장면이 많아 얼떨떨했다. 내가 알던 얀 마텔이 맞는 것인가? 내용은 간단하다. 주인공은 서른살까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남자였던 그가 어느 순간 여자로 바뀐다는 것이다. 뭐?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마텔은 썼다. 주인공을 통해 독자들은 남성의 시각과 여성의 시각을 둘 다 가질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주인공의 성이 바뀌는 것은 너무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인공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지 않냐는 듯이. 그래서 나 또한 뭐 그럴수도 있겠지라며 할 수 없이 주인공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이 바뀐 후 티토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티토가 모임으로 일주일간 집을 비운 사이 이웃집 남자가 주인공을 성폭행한다. 그녀는 충격에 빠지고, 고통스러운 며칠을 보낸 후 그녀의 몸은 다시 남성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원하지 않지만 그가 되어야 하고 그럼으로 티토를 떠나야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극적일 수가. 주인공의 절망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나는 그에게 어떤 위로도 해 줄 수 없다.
소설에서 성은 핵심이다. 성행위, 강간, 수음, 동성애, 계간 등등. 이것이 과연 진정한 문학 소설인지 독자들이 고민할 수도 있겠다. 문득 하니프 쿠레이시의 <시골뜨기 부처>가 떠오른다. 성과 연관 지어 보자면 둘이 죽이 잘 맞을 수도 있겠군. 마텔은 책에서 인간의 본성과 본능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마텔의 성장과정과 비슷한 면이 많아 그의 사생활이 더욱 궁금해진다. 그의 이러한 자유롭고 거침없는 글쓰기가 놀랍고 부럽다. 용감하군요 당신은 진정.
# 나는 세탁물이 면죄를 받는 모든 과정, 불결함에서 구원에 이르기까지 거치는 모든 단계, 현대 미술관에 일렬로 전시된 모든 그림들을 따라갔다......세탁물이 마치 지옥으로 끌려들어가는 그렇게도 많은 사악한 영혼들처럼 기계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물은 더 차오르기를 그만두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작동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에는 숭고한 미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설교를 듣고 있는 세탁물들의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작에서 복음주의자의 기쁨을 느꼈다.....그러면 나는 소리쳐 어머니를 불렀고 그 다음에는 셔츠, 스커트, 블라우스, 속옷, 바지, 양말, 등속과 함께 나까지도 죄를 면제받고 셋째 날에 승천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희미하게 반짝이는 생명력으로 촉촉이 젖어 그 갱생 기계에서 빠져나왔다.
# 종이 여자들에 대한 그 변덕스러운 갈망-나는 많은 여자를 원한다! 나는 아무 여자도 원치 않는다-에서 나는 어쩌면 내 식사가 정말로 빈약하다는 것, 그 식사가 내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잇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통고라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그 즐거움이 너무도 컸다.
# 서너 달 위에 나는 첫 월경을 했다. 내가 월경 주기에 대해 품고 있던 고상한 견해는 고열과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밤잠을 설친 뒤-나는 감기가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피로 물든 시트에서 잠을 깬 날 아침에 현저히 흐려졌다.
# 사실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할 때면 오래 끌기를 좋아했다. 키스할 곳이 너무도 많았다. 오른쪽, 왼쪽, 위, 아래 그리고 한가운데. 평평하고 매끄러운 앞니. 둥글고 뾰족한 위쪽 송곳니. 단단한 앞어금니.
# 나는 사람들이 왜 그것을 강간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내게 그것은 살인이었다. 나는 그날 살해되었고 그후로 언제까지고 내 안에 죽음을, 다채로운 내면에서 배회하는 회색을 끌고 돌아다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