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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ㅣ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평점 :
화양연화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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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가슴이 철렁한다.
눈치챈 건 아닐까, 내가 깡통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조차 잊고
언제부턴가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걸.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차를 타고
모르는 내색을 아무도 않지.
이게 뭐야?
여기 어디야?
아이가 물으면
집에 갈래, 울먹이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뜨거워지네.
이건 강아지 이건 나무 이건 칫솔 그렇게 일러줄까 허둥지둥
구파발이라고 우리나라라고 지구라고 하면 되나.
강아지가 뭐야, 지구야 뭐야, 다시 물으면?
무서워라
-걱정 마, 좋은 데 가고 있어
-다 와가, 가보면 알아
나도 잘 모른단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왔는지, 저건 무언지
나도 실은 모른단다.
무서워서
입을 닫고 있단다.
내가 누군지도 사실은 모른다고
고백해버릴 것만 같네.
참아온 울음이 터질 것 같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란다 여기선
일러주는 이름이나 외고 있다가
코밑이 시커멘지면, 겨드랑이에 털이 돋으면
낮은 돈에 취하고, 밤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뻘밭에 쓰러져 눕는 거란다.
눈에는 핏발이 오르고
더러운 냄새를 입에 풍기며
제 말만 게워내는 어른이 되지.
모를 것도 물을 것도 더는 없어져
날개옷이 있어도 소용없다네.
떠날 날 문득 닥치면
또 무섭고 서러워 눈물 흐르지.
이곳 어디였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쓰던 몸 놓고 어디로 가자는지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으므로
나도 두렵단다, 여기는 어딘지
나도 모른단다, 아아 아가들아
네가 누군지
나는 또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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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좀
금 간 브로크의 키 낮은 담
삐뚤빼뚤한 보도블록 곁으로
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거리고
귀가하던 늙은 내외가 구멍가게 바랜 파라솔 아래 앉아
삶은 달걀과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는 곳.
우편함 위에는 포장이사 열쇠수리 딱지들 옹기종기 붙어있고
반쯤 열린 철대문 안쪽으로
문간방 새댁네의 부엌세간들이 비치기도 하는 곳 얌전한 곳.
직장 없는 안집 둘째가 한번씩 청바지에 손을 꽂고 골목 이쪽저쪽 훑어보다가 침을 칙 뱉고 다시 들어가는 곳.
대문 돌쩌귀엔 솔이끼도 몇 돋아 있는 곳.
스티로폼 상자에 파와 고추 두그루씩과 상추 몇포기가 같이 사는 곳.
떨어진 자전거 바퀴 하나가 볓년째 모셔져 있는 곳.
몽당비가 잘 세워져 있는 곳.
이 하찮은 곳을 좀
부디 하찮은 대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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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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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