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 수집광
앤 패디먼 지음, 김예리나 옮김 / 행복한상상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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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바로 자연계 전체를 계king, 문phylum, 강class, 목order, 과family, 속genus, 종species(나는 아직도 이 분류체계를 순서에 맞게 줄줄 욀 수 있다. “필립 왕이 신을 도우려 오시네king Philip, come out for God's sake” 라는 문장을 이용한 기억법을 열두 살 때 익혀둔 덕분이다)의 가장 좁은 분류체계로, 그리고 집의 여분의 방으로 끼워 맞추고 싶은 진지한 노력이었다. 35-6

 

 

* 분류학은 결국 제국주의의 일종이다. 19세기 영국 해군 조사대가 등급을 매겨야 할 다양한 종으로 런던을 가득 메우고 있었을 때 린네식 분류법에 따라 이들을 적소로 분류하는 일은 부인하기 힘든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파타고니아나 남태평양에 가서 수백 년 동안 그 지역만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새나 도마뱀, 꽃을 찾아내서 라틴어로 다시 이름을 붙여보자. 짠! 또 하나의 자그마한 영국 식민지가 생겼다! 오빠와 나 역시 그런 기분이었다. 이름을 붙이는 일은 통치권을 주창하는 일이었다. 40

 

 

* 자연 채집가들은 모두 특이한 취향과 기술을 공유한다. 패턴의 인식, 변칙과 규칙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 체험한 것을 정리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충동 등이 그것이다. 42

 

 

* 내 인생에서 커피가 시간의 속도를 높이는 대신 늦춰 준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긴긴 나태의 밤들은 내 대학교 커리큘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카우퍼스웨이트 가의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고, 우리 셋은 따뜻하고 밝게 불이 켜진 방에 모여 앉아 던스터 기숙사 전체가 잠들 때까지 문학과 정치를 이야기했다. 결국 교육이라는 건 그 사람의 삶을 감미로운 정수로 가득 채우고, 불순물을 걸러 내고, 바닥에는 아주 조금의 찌꺼기만 남게 하는 일을 가르치는 게 아닐까?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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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캐롤 오츠 : 작가의 신념 - 삶, 기술, 예술 위대한 생각 시리즈 8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송경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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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행로를 걸으면서 몇 번이나 예술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숭배에 열중해버려라. 만약 당신을 흥분시키거나 인상적이거나 긴장하게 하는 목소리나 통찰력을 발견한다면 그 안에 빠져버려라.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것이다. 46

 

 

* 나는 글쓰기란 결코 그저 책장 위에 단어들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비친 영상, 감정의 집합체, 날것 그대로의 경험을 구현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기억할 만한 예술을 만들려는 노력은 독자나 관객에게 그 노력에 걸맞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달리기는 명상이다. 좀 더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달리기는 내가 마음의 눈으로 그때까지 쓴 원고 사이를 거닐고 교정을 해서 오류를 잡아내고 글을 더 개선하도록 만들어준다. 끊임없는 교정이 내 방식이다. 나는 장편을 쓸 때 일관성 있고 유동적인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이전 부분으로 돌아가 퇴고한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최소한 각 문단이 다른 모든 문단과 함께 작용해 소설이 한결같이 흐르는 강과 같이 되도록, 소설의 마지막 두세 장을 쓰면서 동시에 시작 부분을 퇴고한다. 꿈이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신경생리학의 어떤 법칙에 따라 우리를 실제 광기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광기를 향한 일시적 비행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달리기/글쓰기라는 활동 한 쌍은 작가를 이성적으로 건전하도록 해주고,(아무리 환상적이고 일시적인 제어일지라도) 제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하게 해준다. 58

 

 

* 널리 읽고, 열성적으로 읽고, 의도가 아니라 본능의 인도를 받아라. 당신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가가 되고 싶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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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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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707쪽이다. 1000장이 넘더라도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줄스와 모린의 삶을 엿보고 나니 내 삶을 다 살아버린 기분이다.

 

* 얼마 뒤 그는 담배를 찾으려고 일어섰다. 담배는 그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져서 이불과 엉켜 있었다. 그가 말했다. “예전에 나는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줄 알았어. 그런데 살 수 있더군. 그냥 계속 살아가. 언제나 계속 살아가면 돼.”

“뭐라고요?.....뭐라고 했어요?”

“언제나 계속 살아가면 돼.” 654

 

* 줄스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손을 뗐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리듯이, 그러면서도 열렬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예쁜이, 이해해. 나도 널 사랑하고. 난 항상 널 생각할 거야. 내가 형편이 좀 나아져서 자리를 잡고 이리로 돌아와 결혼하게 된다면....어째됐든 난 그 여자랑 결혼하고 싶어. 날 죽이려고 했던 여자 말이야. 난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해. 그러니까 돈을 좀 번 다음 이리로 돌아와서 그 여자랑 결혼할 거야. 두고 봐. 내가 그렇게 지금보다 조금 나아져서 돌아오면, 그때 너랑 나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렇지? 넌 정말 예쁜 동생이었어. 그렇게 고생했으면서서도 머리를 써서 헤쳐 나온 것도 사랑스럽고. 하지만 여기 이 집도 불에 타서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잊지마. 남자들이 다시 네 삶에 끼어들 수 있어, 모린. 널 다시 두둘켜 패고 강제로 네 무릎을 벌릴 수 있어. 왜 안 되겠어? 세상에는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정액도 남자도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정말로 그런 일을 원하지 않는 거야?”

“그래!”

“모린, 정말로? 말해봐.”

“그래. 절대, 절대로 싫어.” 7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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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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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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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가슴이 철렁한다.

눈치챈 건 아닐까, 내가 깡통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조차 잊고

언제부턴가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걸.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차를 타고

모르는 내색을 아무도 않지.

 

이게 뭐야?

여기 어디야?

아이가 물으면

집에 갈래, 울먹이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뜨거워지네.

이건 강아지 이건 나무 이건 칫솔 그렇게 일러줄까 허둥지둥

구파발이라고 우리나라라고 지구라고 하면 되나.

강아지가 뭐야, 지구야 뭐야, 다시 물으면?

무서워라

-걱정 마, 좋은 데 가고 있어

-다 와가, 가보면 알아

 

나도 잘 모른단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왔는지, 저건 무언지

나도 실은 모른단다.

무서워서

입을 닫고 있단다.

내가 누군지도 사실은 모른다고

고백해버릴 것만 같네.

참아온 울음이 터질 것 같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란다 여기선

일러주는 이름이나 외고 있다가

코밑이 시커멘지면, 겨드랑이에 털이 돋으면

낮은 돈에 취하고, 밤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뻘밭에 쓰러져 눕는 거란다.

 

눈에는 핏발이 오르고

더러운 냄새를 입에 풍기며

제 말만 게워내는 어른이 되지.

모를 것도 물을 것도 더는 없어져

날개옷이 있어도 소용없다네.

 

떠날 날 문득 닥치면

또 무섭고 서러워 눈물 흐르지.

이곳 어디였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쓰던 몸 놓고 어디로 가자는지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으므로

 

나도 두렵단다, 여기는 어딘지

나도 모른단다, 아아 아가들아

네가 누군지

나는 또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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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좀

 

금 간 브로크의 키 낮은 담

삐뚤빼뚤한 보도블록 곁으로

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거리고

귀가하던 늙은 내외가 구멍가게 바랜 파라솔 아래 앉아

삶은 달걀과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는 곳.

우편함 위에는 포장이사 열쇠수리 딱지들 옹기종기 붙어있고

반쯤 열린 철대문 안쪽으로

문간방 새댁네의 부엌세간들이 비치기도 하는 곳 얌전한 곳.

직장 없는 안집 둘째가 한번씩 청바지에 손을 꽂고 골목 이쪽저쪽 훑어보다가 침을 칙 뱉고 다시 들어가는 곳.

대문 돌쩌귀엔 솔이끼도 몇 돋아 있는 곳.

스티로폼 상자에 파와 고추 두그루씩과 상추 몇포기가 같이 사는 곳.

떨어진 자전거 바퀴 하나가 볓년째 모셔져 있는 곳.

몽당비가 잘 세워져 있는 곳.

이 하찮은 곳을 좀

부디 하찮은 대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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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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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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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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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몹시 힘들 때 읽었다. 기쁘고 명랑한 상태였다면 읽다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문장들이 마음을 다독였다.

 

* 독서로 자유를 얻는다. 독서로 객관성을 획득한다. 나는 내가 되기를 멈추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만둔다. 내가 읽는 것은 때로 나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의복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명료함이고, 만물을 비추는 태양이고, 고요한 대지에 그림자를 드리운 달이고,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간이고, 녹색 이파리를 흔드는 나무의 견고함이고, 농장 연못에 깃든 평화이고, 포도나무 덩굴이 우거진 해안의 비탈길이다. 78

 

* 포기는 자유다. 원하지 않는 것이 힘이다. 163

 

* 그렇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실이기에 다들 스스로를 잃어버리며 산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기쁨 없이 나를 잃어버린다. 201

 

* 철자법도 인격이기 때문이다. 단어는 보이고 들릴 때 완성된다. 그리스 로마 알파벳의 호화로움은 단어에게 왕실의 가운을 입혀 숙녀와 여왕으로 만들어준다. 333-4

 

* 예술은 왜 아름다운가? 쓸모없기에 아름답다. 삶은 왜 흉측한가? 온통 목적과 목표와 의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흉측하다. 인생의 모든 길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존재한다. 413

 

* 일본산 찻잔 세트의 잔 하나가 깨졌을 때, 나는 그 원인이 하녀의 부주의한 손길이 아니라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고뇌라고 상상했다. 그들의 은밀한 자살 결단은 내게 그다지 놀랍지 않다. 우리가 권총을 자살에 이용하듯 그들은 하녀를 이용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나처럼 정확히 안다는 것은) 현대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다. 514-5

 

*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각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사소한 일로 터무니없이 동요하고 몸서리를 친다. 날씨가 흐리다고 괴로워하는 자는 비범한 지성을 갖춘 사람이다. 대체로 인류는 둔감해서 날씨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날씨는 항상 거기 있는 거니까. 인류는 비가 자기 머리에 떨어지지만 않으면 비를 느끼지도 못한다.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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