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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평점 :
* 가디머는 부정성이 예술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부정성은 예술의 상처다. 이런 부정성은 매끄러움의 긍정성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거기에는 나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특별한 것 하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초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 릴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것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이 있다는 것, 이 사실성은 또한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의미 기대에 맞서는 극복할 수 없는 저항이다.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이 점을 인정하라고 강요한다. ‘거기에는 너를 보지 않는 지점이 전혀 없다.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 특수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타격이며, 타격으로 인한 쓰러짐이다. 모든 예술적 경험이 그런 특수성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예술작품으로부터 타격 작용이 일어난다. 그것은 관찰자를 타격하여 쓰러뜨린다. 매끄러움은 전혀 다른 것을 의도한다. 그것은 다정스레 관찰자에게 밀착하여 그로 하여금 좋아요라고 말하게 한다. 그것은 오로지 관찰자에게 만족을 주고자 할 뿐, 타격을 가하여 그를 쓰러뜨릴 생각이 없다. 17-8
* 오늘날에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도 매끄러워진다. 추 또한 악마적인 것, 섬뜩한 것 혹은 끔찍한 것의 부정성을 잃어버리고 소비와 향유의 공식에 맞춰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추는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것을 돌로 변화시키는 메두사의 시선을 완전히 상실했다. 세기말의 예술가들과 문인들이 활용했던 추에는 무언가 심원하고 악령과 같은 것이 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적인 추는 도발이자 해방이었다. 그들은 전승된 지각 관습을 근본적으로 거부했다. 19
* 아름다움의 미학은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근대 미학에서야 비로소 미와 숭고가 분리된다. 미는 그 순수한 긍정성 속에 갇힌다. 강력해지는 근대의 자아는 미를 만족의 대상으로 긍정화한다. 이 과정에서 미는 숭고에 대립하게 된다. 숭고는 그 부정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직접적 만족을 주지 않는다. 미와 구별되는 숭고의 부정성은 숭고가 인간의 이성으로 환원되는 순간 다시 긍정성으로 바뀐다. 이로써 숭고는 이제 바깥이,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적 표현 형식이 된다. 29
* 숭고가 주는 최초의 느낌은 버크에서와 마찬가지로 고통과 불쾌감이다. 숭고는 구상력에게 너무 위력적이고, 너무 크다. 구상력은 그것을 파악할 수 없고, 하나의 형상으로 요약할 수 없다. 그래서 주체는 숭고 앞에서 동요하고 압도당한다. 여기에 숭고의 부정성이 있다. 36
* 미 전체를 소비문화의 싹으로 보고 의심하거나 포스트모던의 방식에 따라 숭고를 미와 대립시키는 시도는 별로 도움이 못된다. 미와 숭고는 근원이 같다. 그러므로 숭고를 미에 대립시키는 대신 해야 할 일은 내면화 할 수 없는, 탈주체적인 숭고를 다시 미에 반환하고, 미와 숭고의 분리를 철회하는 것이다. 39
* 사진은 문화적인 코드를 갖는다. 스투디움은 이런 코드를 좇으면서 많건 적건 즐거움을 느끼지만, 이런 즐거움은 “결코 나의 쾌감도, 나의 고통도 아니다.” 스투디움은 어떤 열정도, 어떤 정열도, 어떤 사랑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절반의 욕구, 절반의 욕망”만을 가동시킨다. 그것을 이끄는 것은 “막연하고 피상적이며 무책임한 관심”이다.
사진의 두 번째 요소는 “풍크툼”이다. 이것은 관찰자에게 상처를, 상해를 입히고 전율을 낳는다. “이번에는 내가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반면 나는 스투디움의 영역에서는 주권적인 의식을 갖고 돌아다닌다), 거꾸로 그 요소가 자신의 맥락으로부터 화살처럼 발사되어 나를 관통한다.” 풍크툼은 불현듯이 내 온 관심을 장악한다. 풍크툼 읽기는 “짧고도 적극적이며, 도약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다.” 풍크툼은 나를 노려보는, 내 눈의 주권성을 의심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맹수의 시선으로 자신을 알린다. 그것은 눈요기로서의 사진을 온통 꿰뚫어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56-7
* 영화의 영상들은 그 시간성으로 인해 풍크툼을 갖지 못한다. “스크린 앞에서 나는 눈을 감는 자유를 취할 수 없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미 다른 영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쉴새없이 탐식을 강요받는다. 온갖 다른 특성들이 활동하지만, 숙고는 없다. 그래서 나는 포토그램에 관심을 갖는다.” 영상의 게걸스러운 소비는 눈을 감을 수 없게 한다. 풍크툼은 보기의 금욕을 전제로 한다. 59
* 대상에 대한 미적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주체는 자유롭게 된다. 미적 관계는 대상 또한 해방시켜 각자의 특수성을 갖게 한다. 자유와 강제 없음은 예술 대상의 특징이다. 미적 관계는 어떤 측면에서도 대상을 압박하지 않으며, 대상에게 어떤 외적인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예술은 자유와 화해의 실천이다. 82
*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이다. “예술은 타자를 그 현전성에 고정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타자를 구원한다. 전적인 타자로서의 미는 시간의 힘을 제거한다. 오늘날 미의 위기는 미가 그 현전성으로, 사용가치와 소비가치로 환원되는 데에서 비롯된다. 소비는 타자를 파괴한다. 예술미는 소비에 대한 저항이다. 100-1
*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 다시 말해 시화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다. 작가들의 시적인 시선은 사물들 사이의 숨은 연결을 발견해낸다. 미는 관계의 사건이다. 미에는 특별한 시간성이 내재한다. 미는 직접적인 향유를 거부한다. 사물의 미는 훨씬 나중에 다른 사물의 조명을 받아 회상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는 인광을 발하는 역사적인 퇴적물들로 구성된다.
미는 망설이는 자이며 늦둥이다. 미는 순간적인 광휘가 아니라 나중에야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다. 이런 신중함 덕분에 미는 품위를 지니게 된다. 즉각적인 자극과 흥분은 미로 접근하는 길을 막는다. 사물들은 우회로를 거쳐 사후에야 비로소 그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그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미는 오랫동안, 천천히 걷는다. 1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