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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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는, 삶의 아마추어다. 방향을 틀어 다른 사람의 전문 영역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가 엇비슷하게 이해한 결과의 그래프가 그들 지식의 그래프와 대체로 겹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접는 게 좋다. 또 한 가지, 이 책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미리 일러둔다. 그들 대부분은 죽었고, 상당수가 프랑스인이라는 점도, 그중 하나인 쥘 르나르가 이런 말을 남겼다.

“죽음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느 때보다 책에 의지하게 된다.” 69

 

 

* 그리고 예술가가 노년이 되어 단순함을 내세우면 어쩐지 한없이 뭉클해진다. 이 예술가는 지금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시와 화려함은 젊은이들이 부리는 재주야. 그리고, 맞아. 으스대는 것도 야심이 있을 때 얘기지. 하지만 우리는 이제 늙었어.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단순하게 말하자고. 이건 신심 깊은 사람들에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아이가 되는 걸 의미할 수도 있고, 예술가에게는 현명함으로 깊어지는, 그리고 평정심으로 깊어져 숨지 않는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겠지. 음악이 뭐 그리 화려해야 하나? 캔버스에 뭘 그리 많이 표시해야 하나? 들끓어 넘치는 그 형용사들은 다 뭐고? 내 말은 영원 앞에서 겸손해지자는 것만 뜻하는 게 아냐. 내 말에는, 그러니까 단순한 것들을 보려면 한평생이 걸린다는 뜻도 있어.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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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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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디머는 부정성이 예술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부정성은 예술의 상처다. 이런 부정성은 매끄러움의 긍정성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거기에는 나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특별한 것 하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초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 릴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것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이 있다는 것, 이 사실성은 또한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의미 기대에 맞서는 극복할 수 없는 저항이다.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이 점을 인정하라고 강요한다. ‘거기에는 너를 보지 않는 지점이 전혀 없다.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 특수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타격이며, 타격으로 인한 쓰러짐이다. 모든 예술적 경험이 그런 특수성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예술작품으로부터 타격 작용이 일어난다. 그것은 관찰자를 타격하여 쓰러뜨린다. 매끄러움은 전혀 다른 것을 의도한다. 그것은 다정스레 관찰자에게 밀착하여 그로 하여금 좋아요라고 말하게 한다. 그것은 오로지 관찰자에게 만족을 주고자 할 뿐, 타격을 가하여 그를 쓰러뜨릴 생각이 없다. 17-8

 

 

* 오늘날에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도 매끄러워진다. 추 또한 악마적인 것, 섬뜩한 것 혹은 끔찍한 것의 부정성을 잃어버리고 소비와 향유의 공식에 맞춰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추는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것을 돌로 변화시키는 메두사의 시선을 완전히 상실했다. 세기말의 예술가들과 문인들이 활용했던 추에는 무언가 심원하고 악령과 같은 것이 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적인 추는 도발이자 해방이었다. 그들은 전승된 지각 관습을 근본적으로 거부했다. 19

 

 

* 아름다움의 미학은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근대 미학에서야 비로소 미와 숭고가 분리된다. 미는 그 순수한 긍정성 속에 갇힌다. 강력해지는 근대의 자아는 미를 만족의 대상으로 긍정화한다. 이 과정에서 미는 숭고에 대립하게 된다. 숭고는 그 부정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직접적 만족을 주지 않는다. 미와 구별되는 숭고의 부정성은 숭고가 인간의 이성으로 환원되는 순간 다시 긍정성으로 바뀐다. 이로써 숭고는 이제 바깥이,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적 표현 형식이 된다. 29

 

 

* 숭고가 주는 최초의 느낌은 버크에서와 마찬가지로 고통과 불쾌감이다. 숭고는 구상력에게 너무 위력적이고, 너무 크다. 구상력은 그것을 파악할 수 없고, 하나의 형상으로 요약할 수 없다. 그래서 주체는 숭고 앞에서 동요하고 압도당한다. 여기에 숭고의 부정성이 있다. 36

 

 

* 미 전체를 소비문화의 싹으로 보고 의심하거나 포스트모던의 방식에 따라 숭고를 미와 대립시키는 시도는 별로 도움이 못된다. 미와 숭고는 근원이 같다. 그러므로 숭고를 미에 대립시키는 대신 해야 할 일은 내면화 할 수 없는, 탈주체적인 숭고를 다시 미에 반환하고, 미와 숭고의 분리를 철회하는 것이다. 39

 

 

* 사진은 문화적인 코드를 갖는다. 스투디움은 이런 코드를 좇으면서 많건 적건 즐거움을 느끼지만, 이런 즐거움은 “결코 나의 쾌감도, 나의 고통도 아니다.” 스투디움은 어떤 열정도, 어떤 정열도, 어떤 사랑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절반의 욕구, 절반의 욕망”만을 가동시킨다. 그것을 이끄는 것은 “막연하고 피상적이며 무책임한 관심”이다.

사진의 두 번째 요소는 “풍크툼”이다. 이것은 관찰자에게 상처를, 상해를 입히고 전율을 낳는다. “이번에는 내가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반면 나는 스투디움의 영역에서는 주권적인 의식을 갖고 돌아다닌다), 거꾸로 그 요소가 자신의 맥락으로부터 화살처럼 발사되어 나를 관통한다.” 풍크툼은 불현듯이 내 온 관심을 장악한다. 풍크툼 읽기는 “짧고도 적극적이며, 도약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다.” 풍크툼은 나를 노려보는, 내 눈의 주권성을 의심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맹수의 시선으로 자신을 알린다. 그것은 눈요기로서의 사진을 온통 꿰뚫어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56-7

 

 

* 영화의 영상들은 그 시간성으로 인해 풍크툼을 갖지 못한다. “스크린 앞에서 나는 눈을 감는 자유를 취할 수 없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미 다른 영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쉴새없이 탐식을 강요받는다. 온갖 다른 특성들이 활동하지만, 숙고는 없다. 그래서 나는 포토그램에 관심을 갖는다.” 영상의 게걸스러운 소비는 눈을 감을 수 없게 한다. 풍크툼은 보기의 금욕을 전제로 한다. 59

 

 

* 대상에 대한 미적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주체는 자유롭게 된다. 미적 관계는 대상 또한 해방시켜 각자의 특수성을 갖게 한다. 자유와 강제 없음은 예술 대상의 특징이다. 미적 관계는 어떤 측면에서도 대상을 압박하지 않으며, 대상에게 어떤 외적인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예술은 자유와 화해의 실천이다. 82

 

 

*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이다. “예술은 타자를 그 현전성에 고정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타자를 구원한다. 전적인 타자로서의 미는 시간의 힘을 제거한다. 오늘날 미의 위기는 미가 그 현전성으로, 사용가치와 소비가치로 환원되는 데에서 비롯된다. 소비는 타자를 파괴한다. 예술미는 소비에 대한 저항이다. 100-1

 

 

*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 다시 말해 시화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다. 작가들의 시적인 시선은 사물들 사이의 숨은 연결을 발견해낸다. 미는 관계의 사건이다. 미에는 특별한 시간성이 내재한다. 미는 직접적인 향유를 거부한다. 사물의 미는 훨씬 나중에 다른 사물의 조명을 받아 회상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는 인광을 발하는 역사적인 퇴적물들로 구성된다.

미는 망설이는 자이며 늦둥이다. 미는 순간적인 광휘가 아니라 나중에야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다. 이런 신중함 덕분에 미는 품위를 지니게 된다. 즉각적인 자극과 흥분은 미로 접근하는 길을 막는다. 사물들은 우회로를 거쳐 사후에야 비로소 그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그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미는 오랫동안, 천천히 걷는다. 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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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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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세상은 그렇다 치고, 어떻든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할 일은 재빠른 결론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재료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해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 원재료를 많이 저장해둘 ‘여지’를 자기 자신 속에 마련해둘 일입니다. 122

 

 

* 내가 그걸 알아본 것은 나 역시 때때로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내 쪽의 기척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히고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하려고 합니다. 특히 인터뷰를 할 때가 그렇습니다. 철저히 집중해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 자신의 의식의 흐름 같은 건 죽여버립니다. 그런 전환이 되지 않으면 정말로 진지하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습니다.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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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올리비에 여행 - 수채화판 실크로드 여행수첩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프랑수아 데르모 그림, 고정아 옮김 / 효형출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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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다른 사람들처럼 여행하는 것’은 내 취향에 전혀 맞지 않았다. 모터가 달린 차가 싫고, 주유소가 싫고, 기계, 속도, 소음, 무관심과 익명성이 떠도는 커다란 도로가 싫다. 제발 내 말을 믿어주길 바란다. 내가 애정을 갖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여행은 내 삶의 리듬도 내 세상도 아니다. 숨을 쉬고 살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느림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고, 풀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몽상에 젖는 것이다. 찌르레기의 비행, 어릴 때 먹었던 솜사탕처럼 뭉게뭉게 짙게 깔린 산등성이, 자기 일을 하느라 바쁘게 내 앞을 지나가는 전갈-하물며 전갈마저-나처럼 풀밭 위를 돌아다니는 방랑자.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내 마음에 드는 것들이다. 내 삶의 리듬은 과거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도착하기만 바란다면, 역마차를 집어타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걸어가야 한다.” 장 자크 루소가 그의 저작 <에밀>에서 한 말이다. 나도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어디에 도착한다는 말인가?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늘 얘기했던 것처럼, ‘가는 것’ 그 자체다.

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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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효용 - 노동자계급의 삶과 문화에 관한 연구 질문의 책 5
리처드 호가트 지음, 이규탁 옮김 / 오월의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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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문화 상품들은 수준 높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상품들이 대중의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고급문화와 민중문화가 보여줄 수 있는 삶의 가치, 대중의 저항, 지혜와 성숙함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은 고급문화만큼이나 가치있다. 하지만 최근의 대중문화 상품은 건전한 민중예술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망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수용자들이 깊은 내면에서 온 지혜를 만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며,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경험에 차별적인 시선만을 제공한다. 사실 과거부터 존재하던 전통을 새로운 가치로 대체하는 것보다 그냥 전통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더욱 쉽다. 대중매체에서는 항상 자신들의 수용자에게 교양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성숙함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 자체는 사실이지만, 이들 대중매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접근법이 자신들의 주장 자체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5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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