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TV를 통해 영화를 즐겨보았다.
어린 나이에도 외국의 수많은 배우와 감독의 이름을 줄줄 읊고다닐 정도였으니,
안정효의 소설에 나오는 헐리우드키드 만큼은 아니더라도 얼추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광적인 사람도 있음을 일깨워주었던 책
'존 웨인'의 서부극를 위시하여 당시 자주 볼 수 있었던
리처드 위드마크, 딘 마틴, 버트 랭카스터, 로버트 밋첨,
수전 헤이워드, 잉그리드 버그만, 리즈 테일러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배우들이 나왔던 수많은 영화들을
그 어린 나이에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구분했다.
가끔 주위 어른들이 영화얘기할 때면,
끼어들어 아는체 하고싶어 안달났던 기억들...
주로 TV를 통해 더빙된 영화를 보다보니,
그 당시에는 배우들이 정말로 한국말을 하는 줄 알았던 시절도 있었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을 잃지않았던 서부극의 대명사 존 웨인
유독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기억이 많았던 어린시절...
'태권V'를 비롯한 만화영화들, 존 보이트의 '챔프',
'슈퍼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국민학교 들어갈 때 쯤이었나,
어머니 손붙잡고 극장에 가서 '죠스'를 보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영화를 보고난 후에도 '딴딴~딴딴~'하던 저 유명한 존 윌리엄스의 주제음악이
한동안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던 추억들...
성룡의 '사형도수'를 보고난 뒤에는
코브라 권법을 흉내내며 동네 아이들과 장난치던 추억들...
그가 지금 이렇게 세계적인 스타가 될 줄은 그당시엔 상상도 못했다
당시 TBC(지금의 KBS2)의 '토요명화', MBC의 '주말의명화',
그리고 KBS의 '명화극장'은
나의 주말 밤을 설레게했던 장본인들이었다.
명화극장이야 일요일이니 문제가 없었지만,
토요일은 두 방송사의 시간대가 겹쳐 곤란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토요일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신문의 편성표에서
그날 방영될 두 영화의 제목과 배우, 감독을 체크하고
그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TBC 쪽이 성우들도 좋았고 훨씬 재미있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간혹 두군데 모두 놓치기 싫은 영화를 방영할 때에는,
채널을 돌려가며 두 영화를 몇분씩 번갈아가면서 보다가
결국 죽도밥도 안되었던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일요일을 책임지던 KBS의 명화극장...
여기에는 항상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뿔테안경과 터틀넥의
영화평론가 정영일씨의 오프닝이 있었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놓치면 후회합니다...'
좋은 영화를 방영할 때면 어김없이 날려주시던 저 멘트...
그를 보며 영화평론가를 꿈꾸기도 했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고서 남몰래 가슴아파했던 기억도
이젠 까마득한 추억의 파편이 되어버렸다.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불렸던 정영일
그리고...
그렇게 좋아했던 배우들 역시 지금은 거의 다 고인이 되었다.
TV에서 더빙영화가 사라진 지도 이미 오래전이다.
누군가와 흘러간 추억의 영화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소중한 기억들을 되살려보고 싶어도,
그러기엔 이미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가끔씩은...
그때 그 시절이 정말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