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5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웰메이드 액션스릴러 영화가 따르고있는 여러가지 공식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플롯을 보여주고있다. 인질사건의 발생, 잔악한 범죄자, 주인공인 노련한 협상가, 동료들간의 불협화음과 인질범과의 밀고당기는 심리전, 단순무식한 진압대원들과의 마찰, 인질들 내의 현명한 조력자, 등 액션매니아라면 상당히 익숙한 장치들이다. 문제는 이렇게 익숙한 재료들을 작가가 과연 어떠한 양념과 솜씨로 독자들에게 제공할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검증된 작가 '제프리 디버'이기에 그만큼의 기대감으로 작품을 대하게 된다.

초반 몇페이지를 읽다보면 학생들과 선생님 사이에 대화들이 오가는데, 도대체 누가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안가는 몇몇 대사들과 다소 산만한 상황묘사들을 보면서, 그의 작품이 맞는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동안 이 작가의 링컨라임 시리즈를 6작품이나 읽었던 터라 나름 작가의 글쓰는 스타일에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그의 작품들은 모두 한 번역가가 일임해서 해왔는데, 이 책은 출판사가 달라서인지 번역가도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작가의 데뷔작이다보니 아직 문장의 노련미가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이것은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의 문제라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협상가라는 특이한 직업이다보니, 범죄자들과의 '대화'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처음에는 그의 능력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동료들도 그가 무력이 아닌 대화만으로 적을 설득하고 인질들을 하나씩 구출하는 모습에 감동하고 존경을 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한 스릴만점의 과정을 즐기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중요한 대화들이 등장인물들의 어정쩡한 어투와 불명확한 심리묘사로 인해 작가가 의도한 본래의 긴장감이 많이 퇴색된 느낌이었다.

주인공은 시종일관 '~이럴걸세', '~저럴걸세', 또는 '~하게'라는 우유부단한 어투를 쓰고있는데,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이런식이니 나중에는 대사 읽는게 짜증날 정도였다. 영어와 달리 상대의 나이와 지위에 따라 어체가 다른 한글을 구사함에 있어 이 부분은 분명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것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절하는 것은 오로지 번역가의 몫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등장인물 각각의 대화체가 유기적으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있다. 난 주인공이 협상가로서의 능력 자체가 있는 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의 대사가 거슬렸다. 그러다보니 긴장감이 느껴져야할 인질범과의 대화들이 지루할 정도로 재미없고 답답했으며, 동료들간의 미묘한 심리묘사도 생뚱맞은 표현으로 인해 잔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후반부에 진압대의 지휘관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완고하면서도 독선적인 성격으로 주인공의 충고를 무시하다 오히려 작전에 차질을 빚는 전형적인 캐릭터다. 그런데 이 지휘관마저 자기 부하에게 분명 고압적인 명령조로 얘기해야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자넨~하게'라고 지시하는 장면에선 정말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심지어 어느 부분에선 역자도 도저히 해석이 안되었던지, 뜻모를 단어를 써놓고 그옆에 조그맣게 영어단어를 직접 붙여놓은 문장도 등장한다. 독자들보고 알아서 해석하라는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 그나마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의 반전을 포함한 액션시퀀스가 일정부분 작품의 재미를 보상해주고는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뭉텅 빠져버려 나에겐 반쪽짜리 책이 되어버렸다.

작가가 독자를 위해 애써 준비한 여러가지 재미있는 내용들이 형편없는 번역으로 인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정말이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을 번역한 '최필원'씨라는 번역가는 이전에 읽어본 다른 작품에서도 전문용어와 심리묘사 부분에서 대충 얼버무리는 듯한 해석으로 뒷맛이 개운치 않았는데, 앞으로는 어떤 작품을 번역하든 다시는 읽지않을 것 같다.

<사족> 링컨라임 시리즈의 번역가 '유소영'씨는 법의학에 관한 전문용어 때문에 실제로 현직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등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그의 번역은 깔끔하고 세련되어 디버의 진면목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시리즈 중 '12번째 카드'같은 경우는 흑인들의 슬랭어가 많이 나오는 해석이 까다로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세심한 번역으로 다듬은 솜씨에 오히려 감탄을 하면서 읽었을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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