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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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여기 알라딘에서 3주째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재작년인 2020년에 나온 책인데 우리나라에는 작년말에 번역되어 나왔다. 원제는 'Why Fish Don't Exist' 직역하면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고, 사실 책의 내용에 비추어 엄밀하게 번역한다면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라고 해야 맞을 것 같은데 그냥 좀 더 알기쉽고 직설적이면서도 강한 화법으로 처리를 한 것 같다. 이 제목을 보니까 갑자기 오래전에 제목만으로도 엄청난 어그로를 끌면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생각난다. 유튜브도 썸네일이 중요하듯이 책도 제목이 중요하긴 하다.


저자 룰루 밀러는 직업이 과학 전문 기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녀의 논픽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장르가 굉장히 특이하고 복잡하다. 기자출신답게 기본적으로 필력이 좋아서 이야기를 시종일관 흥미롭게 끌고가는데 정말 책을 딱 잡으면 중간에 끊기가 힘들 정도로 대단한 흡인력을 보여준다. 번역도 흠잡을 곳이 없고 각 챕터마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삽화도 인상적이다.



이 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핵심 키워드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과 '어류', 즉 물고기다. 거기에 작가 자신의 내면적 성장과 치유의 코드를 섞어넣었다. 그리고 중반부 이후에는 각각 '우생학'과 '분류학'이라는 반전 키워드가 등장하여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올린 이야기의 흐름을 180도 뒤엎어버리는 구성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마치 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되짚어보는 전기물처럼 보이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스타일의 자기계발서인가 싶기도 하다가, 후반부에는 업계의 비리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사회고발 르포같은 느낌도 난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가 절묘하게 섞여있고 거기에 충격적인 반전까지 더해져서 색다른 재미의 책읽기와 함께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스탠포드 대학의 초대 총장을 역임했던 어류학자로 생물학계에서는 대단한 업적과 함께 존경받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책을 다 읽고나면 이 낯선 인물에 대해 거의 박사가 된 듯한 느낌을 받게되는데 작가가 그의 모든 저서와 기록물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재조명하고있는 덕분이다. 그러다보니 결국 그의 치부까지도 들여다보게 되고 알고보니 열렬한 우생학 지지자였다는 것...



초반에는 저자의 인생멘토처럼 화려하게 등장시켜 본받고싶게 만들다가 중반 이후에는 완전히 나락으로 보내면서 독자들에게 확실한 충격요법을 선사한다. 어떻게보면 이미 죽은지 한 세기가 다되어가는 사람을 거의 부관참시하는 수준인데, 이것이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저자가 최초로 밝혀낸 새로운 사실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전부터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별 관심이 없던 것을 수면 위로 끄집어낸 것이겠지...


저자가 진짜로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의 흐름 그대로 우연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되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좌절에도 굴하지않는 긍정적 에너지에 감동받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가 우생학을 지지했던 그의 비뚤어진 사상을 뒤늦게 알게되어 크게 충격을 받고 실망을 하게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알려진 우생학과 관련한 그의 논란을 먼저 접하고서 이것을 이슈화시키기 위해 책을 쓰기로 하고 자료조사를 하면서 이왕이면 드라마틱한 재미가 가미된 구성이 낫겠다 싶어서 일부러 모른척 하다가 뒤늦게 알게되는 설정으로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후반부에는 또 '캐럴 계숙 윤'의 'Naming Nature'라는 책을 중요하게 언급한다. 분류학을 다룬 그 책에서 발견한 '어류라는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과연 저자에게 얼마나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전세계의 물고기를 찾아서 이름 붙이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한 인물과 절묘하게 대칭선상에 위치하는 이 명제를 엮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우리가 알고있는 '어류'라는 종은 사실 하나의 종으로 분류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이 이론을 확신하기 위해 여러 학자들에게 연락해서 일일이 확인을 받는 장면도 나오기는 하는데... 글쎄... 어류, Fish, 물고기라는 이름이 의미가 없는 말이라면 벌써 학계에서 난리가 났을테고 생물학계에서 공식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당연히 교과서에도 적용이 되었겠지...


구글에서 캐럴 계숙 윤과 Naming Nature를 검색해보면 별거 안 나온다. 세계적으로 대단한 주목을 받았던 흔적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학계에서도 그냥 흥미로운 관점 정도로만 생각하고 아무도 신경 안쓰는 화두인데, 작가 혼자 너무 호들갑떠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고기를 포기하면 얻게 되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편견들을 버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충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계발서에서 흔하게 나오는 이런 아전인수격 궤변을 제일 싫어한다. 마지막에 저자가 무슨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듯 흥분해서 반복적으로 얘기하는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꺼내는 느낌이다. 한편으론 자신의 동성 배우자에 관해 필요이상으로 많이 언급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양성애적 성향에 고민하다 결국은 편견을 버리자는 결론을 통해 자기합리화와 함께 스스로 당당하고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뭏든 분명 재미있고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책이기는 한데, 그 주제와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인생관을 좀 억지로 끼워맞추듯이 엮고있다는 느낌도 살짝 받았다.


이 책이 나왔던 2020년에 스탠포드 대학교에서는 결국 관계자와 학생들의 건의에 의해 '조던 홀' 등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관련한 기념관의 이름을 모두 교체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류'라는 명칭이 없어졌다는 얘기는 전혀 들은 바가 없다.


그러니까 결국 이 책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과는 달리, 한 역사적 인물의 의미있는 업적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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