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아웃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1995년작으로 출간된지 무려 25년이 지난 옛날 작품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국내에서 재출간되었다. 요즘 우리나라 출판계에서는 철지난 일본소설 찾아내서 재출간하는게 유행인가보다. 전에 리뷰했던 '소문'이나 '요리코를 위해'도 모두 2~30년전 작품들이었다.


난 이 작품을 이미 오래전에 알고있었기 때문에 책을 구매한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이번 재출간 소식으로 드디어 그동안 책장에서 잠자고있던 2000년판 구판을 꺼내어 읽게되었다. 이 작품이 95년 당시 일본에서 워낙 대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여서 5년 뒤인 2000년에 오다 유지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개봉을 했고 그 때 영화 개봉에 발맞춰서 책도 출간이 되었던 거다. 영화는 못봤지만 '일본판 다이 하드'라는 광고문구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작품은 영화 '다이 하드'의 플롯을 그대로 따라간다. 다이 하드는 1편이 1988년에, 2편은 90년에 나왔던 영화다. 중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어떤 지점을 장악하고 인질들이 발생하며 우연히 홀로 고립된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며 싸워나간다는 플롯인데, 이 책의 내용도 장소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흡사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다이 하드 시리즈가 특별한 점은 악당들과 주인공의 독특한 캐릭터 묘사에 있다. 특히 주인공에게 밀리지않을 정도로 냉철하고 똑똑한 악당 캐릭터는 이후 수많은 액션영화들의 기준이 되었을 정도로 정말 혁신적이었다. 이 책은 초반부 테러의 장소가 되는 배경설명과 주인공 무리들의 캐릭터 빌드업, 그리고 테러리스트들의 범죄진행을 교차편집 형식으로 보여준다든지, 주인공과 대등한 머리싸움을 할 정도로 똑똑한 악당들의 묘사와 테러를 막기위해 혼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죽도록 개고생하는 주인공 등, 다이 하드가 새롭게 만들어낸 액션스릴러의 공식들을 대놓고 활용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흥미로운 서브캐릭터와 반전을 위한 요소들이 추가되어 내용을 좀더 풍성하게 만들고있긴 하지만, 이 작가가 다이 하드라는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거기에 93년에 나왔던 '클리프행어'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75년작 '아이거북벽'에서 참고한 듯한 흔적도 보이는데, 아뭏든 다이 하드라는 기본 뼈대에 여러 산악 액션영화들을 버무려서 그럴듯한 일본식 산악 액션스릴러로 재창조한 작품이 바로 이 '화이트아웃'이다.



작가의 필력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다른 장점들이 부족한 부분을 많이 커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문장에서 고급스러운 테크닉과 여유가 보이지않고, 투박하고 단순한 표현들과 설명하기에 급급한 듯한 묘사 등 노련함이 부족하다. 특히 내가 일본작가들의 글에서 가장 싫어하는 '지나친 디테일'이 많이 보인다. 대사와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데 혹시나 독자들이 모를까봐 지금 이 인물의 마음상태가 어떤지 또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일일이 자세하게 설명해주려하는 일본 특유의 고질적인 강박증같은 거다. 그래서 중반부에는 남녀 주인공들의 지나친 심리묘사와 인물들의 독백인지 작가의 독백인지 분간이 안가는 시시콜콜한 부연설명때문에 진도가 늘어져서 좀 짜증나기도 한다.



하지만 충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한 댐과 발전소 시설의 구조라든지 주변 산들과 날씨 등 전체적인 배경묘사가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그려져서 글을 읽고 있음에도 영상으로 보는 듯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점은 아주 훌륭하다. 생소한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이런 액션스릴러에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내용전개에 필요한 부분 이외의 군더더기 장면들이 별로 없어서 비교적 스피디하게 진행되며 쓸데없는 감정과잉과 신파같은 요소도 없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처리는 마치 '쇼생크 탈출'의 엔딩이 연상될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방법으로 마무리한 점도 정말 좋다. 아마 우리나라였으면 틀림없이 울고불고 눈물 짜내는 씬으로 처리했을텐데...


작품에 등장하는 오쿠토와댐은 아무래도 작가가 만들어낸 설정인 것 같다. 실제로 검색이 되지않는 명칭인데 주변지역과 산이름을 참고하면 아마도 예전에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나가노와 후지산 사이에 있는 미나미알프스 지역의 험준한 산악지대가 주요 배경무대인 것 같다.



이 책은 초반부 악당들이 댐을 장악하고 여주인공이 인질로 잡히는 부분부터 대충 스토리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해서, 이거 계속 읽어야하나 하고 잠시 망설이게 되는 부분도 있는데, 중반 이후 고정관념을 벗어난 반전 형식의 전개와 함께 휘몰아치는 마지막 클라이막스 액션 시퀀스 등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요소들이 확실하게 읽는 재미를 주고있다.


비록 헐리우드 영화의 설정을 빌려오긴 했지만, 이런 다양한 소재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일본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확실히 부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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