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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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이벤트로 작가의 친필 사인본을 준다고 했고, 선착순 500부 한정이었나 해서 기대도 안했는데 받고보니 사인본이었다. 생각보다 엄청 빨리 주문했나보다. 별것 아닐수도 있겠지만 한사람의 팬으로서 기분이 좋은건 어쩔수 없다.


요 네스뵈가 오랜만에 내놓은 스탠드얼론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또 믿는 작가이지만, 사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최근작 몇편은 아직도 구매를 하지 않았다. 갑자기 번역가가 바뀌어서 나왔던 '박쥐'를 읽었을 때 영 느낌이 별로여서 그 후로는 노진선씨 번역이 아니면 아무래도 구입을 좀 망설이게 된 것이 그 이유다. 그래도 항상 기본 이상은 하는 작가니까 기회되면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하고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마침 내가 선호하는 독립된 작품에다가 번역가도 믿음직한 분이라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구매했던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김승욱씨는 예전에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익숙해진 이름인데, 최근 핫해진 '듄' 시리즈도 이 분 번역이다. 장르소설 뿐만 아니라 여러 유명 인문학, 순수문학 등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고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스타일이어서 이제까지 이 분 번역으로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웠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본작 킹덤은 영문제목도 'The Kingdom'이고 작년 2020년에 발표된 최신작이다. 요 네스뵈는 1960년생이니까 우리나이로는 환갑이 되는 시점에 발표한 작품이 되겠다.


일단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느낌부터 먼저 말하자면, 한마디로 그냥 끝내준다!



요 네스뵈의 필력이야 범죄스릴러 장르에서는 당연히 최상급에 해당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놀랍게도 그 이상의 한차원 더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번역가의 내공과 스타일에 따른 미묘한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익숙하게 알고있던 요 네스뵈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의 작품들에서는 범죄스릴러 장르라는 큰 틀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거의 모든 대사와 행동들이 마지막 결말을 향해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역할로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각각의 장면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순수문학에 가까운 훨씬 풍성한 디테일과 감정선을 담아내고 있다.


복잡미묘한 캐릭터의 심리를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기 때문에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와 몰입도가 증가해서 그냥 저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문장 하나하나가 현란하면서도 또 너무 튀지는 않게 잘 억제된 노련한 기교가 느껴지고, 대사들 또한 군데군데 적절하게 수위조절된 유머와 함께 너무나 고급스럽다. 딱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고 절묘한 타이밍에 끊어주는 장면전환 또한 일품이다.


사건해결과 범인찾기에 몰두하는 스토리가 아니다보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글에서 전에 없던 여유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때로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로맨스 소설을 읽고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인물들간의 미묘하고 섬세한 심리묘사를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아간다. 아니 이 양반이 어디 가서 고급문학수업 과정을 별도로 마스터했나 싶을 정도로 분명히 한 단계 레벨업이 된 글솜씨이고 정말 글 자체가 예술이다. 60대의 나이로 접어든 기념으로 스스로 각성이라도 한 것인지... 특히 로위가 섀넌에게 속에 품었던 말을 고백하는 장면 같은 묘사는 정말 기가 막힌다.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는 배경이 주로 오슬로와 베르겐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전부 생소한 지명들만 나와서 또 구글지도를 찾아봤다. 하지만 부달호수니 후켄이니 하는 지역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노토덴이라는 도시만 겨우 나오는데 아마도 그쪽 근처가 주무대인 것 같다.



북유럽의 낯선 지역만큼이나 결코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개성있는 인물들의 기이하면서도 운명적인 드라마가 계속해서 여운을 남긴다.


살인이나 잔인한 폭력 시퀀스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정적인 장면들로 채워져있음에도, 시종일관 무섭고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폭풍전야같은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요 네스뵈의 작품에서 의미없이 쓰여지는 장면은 단 한군데도 없으며 결말을 위한 복선들이 지뢰밭 수준으로 깔려있음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이 작품 역시 단 한문장도 허투루 넘기지않도록 집중해서 읽으려 했는데, 사실 그렇게 애쓸 필요도 없이 그냥 읽다보면 저절로 초집중 모드가 된다. 주인공 로위가 애용하는 중요한 아이템으로 씹는 담배가 자주 나오는데 대화상대나 기분에 따라 이것을 아랫입술에 끼울 때가 있고 윗입술에 끼울 때가 있다. 이것도 분명 복선 중에 하나일 것이라 예상하고 끼우는 위치가 어떤 의미일까 하면서 읽는 중간에 분석해보기도 했다. 결국엔 별 의미없었고 혼자 오버해석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이런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도 집중해서 읽게만드는 힘이 있다.


처음에는 두꺼워서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지만, 읽다보면 점점 줄어드는 분량이 아까울 정도로 계속 더 읽고 싶어지는 책...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


요 네스뵈의 모든 작품들 중에 단순히 범죄스릴러적인 재미면에서는 아직까지도 '레오파드'나 '레드브레스트'같은 작품을 좀 더 우선순위에 놓고싶지만, 문학적인 완성도를 따진다면 단연코 이 작품 '킹덤'이 1등이다.


김승욱씨의 묵직하면서도 수준높은 번역이 큰 부분을 차지했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이제는 대적할 상대가 없는 어나더레벨의 작가로 거듭난 것 같다.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작품을 읽게되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다음 작품도 하루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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